76화. 노래
일곱째 날이 밝았다.
우리는 검이 아닌 마른 장작들을 들고서 마주쳤고,
이내 묵묵히 모닥불을 지폈다.
그렇게 작은 불씨가 춤을 추며 몸을 불리고 있을 무렵.
첫날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조차 모두 다 휘발되어 어색한 기류만이 감돌던 때에,
맥레인은 특유의 능글스러운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잖아.”
“중요한 거요?”
“그래, 이름 말이야.”
“이름?”
진정 의문을 느낀 내 표정에 맥레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 검술 말이야, 이름을 붙여줘야지.”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애초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자각조차 없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맥레인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두들기듯 휘둘렀다.
“세상에 이름만큼 선명한 흔적이 있을 것 같냐?”
“남겨도 되는 겁니까? 저 같은 사람이?”
“너 같은 게 뭔데?”
“고아인 무법자에다가 수배범이기도 하면서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
내 담담한 대답에 맥레인은 뭐가 그리 웃긴지 갑자기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너무 냉소적인 자아 성찰인데.”
“이것도 다 맥레인한테 배운 거예요.”
“핑계 대기는.”
맥레인은 잠시 춤추는 모닥불의 무대를 솎아내곤 웃음기를 덜어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디안이야, 그 외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어. 그 이름에 모든 설명이 들어가 있을 테니까.”
그런 그의 말에,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게 해준 말들이 너무나 좋았으니까.
“기억나냐? 우리 둘이서 처음 마을로 내려갔었을 때 말이야.”
“기억나죠.”
“거기서 네가 그랬지, 소중한 사람을 잃어봤냐고.”
그랬지.
그랬었지.
뒤이어 맥레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연신 기침을 내뱉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나도 잃어봤다. 그래서 네가 어떤 마음인지 더 잘 알아.”
아주 잠깐,
그의 과거를 힐끗거리며 훔쳐본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잃어버린 사람으로부터 우리 같은 놈들이 기억되는 법이야.”
맥레인,
당신의 말이 맞아.
아리아는 나를 디안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남겨주었어.
이 세상에 디안이라는 흔적을 새겼어.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을 봐서일까.
맥레인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른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흔적을 남겨라, 떠나간 이가 남겨준 너란 흔적이 없어지지 않게.”
그러면서 맥레인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털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네 검술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났거든.”
“그게 뭡니까?”
맥레인이 연초를 입에 문 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운명의 노래.”
“운명의 노래?”
“너의 기구한 운명도 그렇고, 그런 널 고작 은화 한 개 받고 가르친 내 운명도 만만찮게 기구하니까.”
그 말이 제법 그럴싸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내 웃음에 맥레인도 같이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에서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맥레인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 물음에 맥레인은 방금 막 꺼낸 부싯돌을 부딪쳐 입에 문 연초를 태웠다.
스읍,
후.
이윽고 입 밖으로 감색 연기를 한가득 내뱉은 맥레인은.
이제껏 말해주지 않았던, 혹은 기피 해왔을지도 모를.
과거의 이야기를 담담히 시작해나갔다.
* * *
태풍,
글라디옴,
오쿨루스 역대 최강의 기사.
그 외에도 범인은 견줄 수도 없는 수많은 수식이 한 남자의 망토로부터 흘러내렸다.
맥레인 베나즈.
그가 앞 열에 도열한 기사들을 제치고 밖으로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가 걸치고 있던 은빛 갑주는 햇살을 찬란히 부수며 사방에 흩뿌려진다.
맹세하는데, 용의 시대 이후 최선의 공식들로 벼려진 그 갑주는 적들이 가진 어떤 무구로도 뚫을 수 없었으리라.
“오셨습니까, 글라디옴.”
곧 앞 열을 유지하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맥레인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조차 맥레인과 마찬가지로 수십의 사선을 지난 역전의 용사였다.
“그래, 베르융.”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대충 옆에 끼고 있던 투구를 뒤집어쓴 맥레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베르융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저 무례한 야만인 놈들의 결투에 응할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베르융, 전쟁이라는 건 짧을수록 좋은 거야. 심지어 짧은 와중에 집으로 돌아갈 이까지 많아지면 금상첨화지.”
맥레인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자네 최근에 득남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아들이 대단한 기사인 아버지가 영토 소유권에 한 줄짜리 문장을 적는 과정에서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나? 난 솔직히 모든 전투가 결투로 이뤄졌으면 하거든?”
맥레인의 여유 속 찐득한 능글맞음에 베르융은 할 말을 잃었는지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빨리 끝내자고, 저들도 그러고 싶어서 나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 아니겠어?”
“그럼 글라디옴,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맥레인이 허리춤에 찬 아밍소드를 뽑으며 나아간다.
그에 맞춰 등을 수놓은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점심 저녁, 두 끼를 대접해줘야 할 거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맥레인의 등을 향해.
일선의 기사들이 모두 방패와 갑옷을 두들기며 거나한 함성을 내질렀다.
그런 그들의 맞은편은,
마찬가지로 수천에 달하는 흑색 병사들이 끔찍할 정도로 정돈된 모습으로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그들 사이에서도 한 장정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니 그에 맞춰 흑색 벼락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일선에 나선 두 기사가 서로 마주 서자, 맥레인은 잡은 검을 머리 앞에 세워 예를 보였다.
“오쿨루스의 기사 맥레인 베나즈다.”
그에 맞춰 상대도 똑같이 들고 있던 길쭉한 워해머를 가슴에 한 번 가져다 대며 화답했다.
“아드레드의 기사 율 지브라다.”
그리고 그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특정 병기가 취해낼 수 있는 특수함을 모두 다 내보이며 격렬하게 부딪친 그들 사이에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압적인 풍압과 벼락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4년, 모비리타 벤투스]
[세상을 질주한 바람]
맥레인의 검에 잠들어 있던 재해가 눈을 뜨고, 동시에 그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모비리타 벤투스의 파편들이 뿜어져 나온다.
반대로 상대의 워해머로부터 튀어나온 벼락은 몰아칠 때마다 신체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빨라진다.
이제 그들의 결투는 인외에 해당할 정도로 파급에 치달았다.
평평했던 대지는 축축한 흙을 토해내며 엎어지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검게 질렸다.
쾅-
쾅-
바람이 벼락을 씹고, 벼락이 바람을 관통하는 경이로운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양옆에 도열한 자들에게까지 몰아쳤다.
그리고 그 괴이한 재해 가운데,
두 사람의 확실한 격돌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팽팽했던 균형은 어느 순간 한쪽으로 급격히 치우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둘 사이에 피어오르던 재해가 뚝 그쳤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재해에 맞추어 달아오른 하늘은 짧은 비를 쏟는다.
양 진영의 병사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이내 한 사람이 배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의 떨궈진 목 뒤로.
번쩍이는 아밍소드가 박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베르융이 자신의 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맹렬히 소리쳤다.
“글라디옴!”
그러자 그 뒤를 따라 병사들의 광적인 외침이 전장을 가득 채워나갔다.
[글라디옴!]
[글라디옴!]
* * *
만을 끼고 항구를 펼친 성채로부터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쿨루스.
지금은 사라진 난쟁이 조합, ‘오른손’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채를 기반으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한 군벌.
그리고 그 군벌을 유지하는 주축은 당연하게도,
힘이다.
인간의 최정점 시기였던 용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세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는데.
그 새로운 국면에 쓰인 힘이란 단어는 곧 인챈트였다.
그래,
오쿨루스는,
0의 재해를 주축으로 모여든 군벌.
현자의 기억법으로 정립된 최강의 재해 중 하나가 바로 오쿨루스의 반석.
오쿨루스는 고대어로서 ‘눈’이란 뜻을 가졌으며,
이 말은 즉.
오쿨루스가 품은 0의 재해의 정체는 태풍이란 소리다.
개인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실체적인 힘을 가진 이 시대에서 용의 시대 때나 통했던 문명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태풍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바람이라 칭송받는 이가 지금 막 배를 타고 항구를 통해 승전보를 가져왔다.
“글라디옴!”
“글라디옴!”
사방에서 들려오는 연호를 어깨에 짊어진 채 배에서 내린 맥레인은 뒤따르는 휘하 기사들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성채로 진입했다.
그렇게 성채 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오쿨루스와 협업하는 기업인 아페리나의 사절단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기업은 용의 시대를 대표하는 잔재 중 하나였다.
그들이 가진 기술적 위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실제로 연금술사들을 양성하여 새로운 시대의 공식들을 발 빠르게 익혀갔다.
이제 그들은 용의 시대의 잔재가 아닌, 그 이후 시대를 영위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된 것이다.
아페리나는 신앙을 판다.
하지만 맥레인과 그 휘하 기사들은 신앙을 믿지 않았다.
대신 신앙이 부르는 막대한 자금은 믿었다.
그 막대한 자금은 곧 기사들이 걸치고 휘두를 갑옷과 검으로 환전되었으니까.
해서 주교라는 늙은이가 다가오자 맥레인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행보와 앞으로도 이어질 승전을 축복하나이다.”
그슬린 라일락 줄기에 물을 묻힌 주교가 맥레인의 머리 위에 탈탈 털어내며 짧게 축복을 마치니 그들은 드디어 완전히 입성할 수 있었다.
이제 맥레인은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한 남자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글라디옴이 오쿨루스를 뵙습니다.”
그 인사에 나무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가볍게 일어나 맥레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고했네, 맥레인.”
0의 주인이자.
맥레인이 평생을 충성하기로 맹세한 남자.
에르앵.
길게 늘어트린 금발과 마찬가지로 햇살 묻은 눈썹을 가진 그의 깊은 두 눈에선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대의 헌신으로 기사들이 흘렸을 수많은 피를 아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 흘릴 각오로 저를 따랐습니다.”
“내 그걸 어찌 모르겠는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논공행상은 잠시 미루고 전쟁의 때부터 씻게.”
“감사합니다.”
“참, 오랜만에 나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맥레인이 잠시 뒤편에 있던 베르융의 눈치를 살폈으나, 베르융은 그런 맥레인을 보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제 투구를 옆에 낀 채 성을 나서는 맥레인과 베르융.
그들이 마주한 하늘은 이제 슬슬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글라디옴.”
“이름으로 불러, 여긴 전쟁터가 아니잖아.”
“맥레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듣기도 전에 들어달라고 하는 건 어느 나라 법도야?”
맥레인은 괜히 베르융의 옆구리를 툭 치며 찔을 부려본다.
이에 베르융은 씩 웃으며 스스럼없이 편한 말투로 답했다.
“제 아들이 일곱 살이 되면 시동으로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야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야망 같은 거창한 이유로 그러는 건 아닙니다.”
맥레인은 괜히 더 장난을 치려다가 베르융의 진지한 표정을 보곤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시동으로 거둬들일 생각이었어.”
“감사합니다, 맥레인.”
“나도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네가 그 아이를 시동으로 받아줘야 할 거다.”
“제가 말입니까?”
“참고로 여자아이여도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 아이가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까?”
베르융의 물음에 맥레인이 씩 웃었다.
“나와 메리안의 피를 가진 아이가 과연 그럴 거라 생각하나?”
“하,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말입니다, 맥레인. 자식 속은 죽어도 절대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그랬고 저 역시 아들을 모를 예정이니까요.”
“짜식, 선배라고 훈수 두는 거냐?”
“하하! 하긴 이제 막 난 갓난아이를 두고 하는 훈수치고는 주제가 넘었지요.”
“한참 넘었다 짜샤!”
* * *
이야기 속 해가 저물어간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내뱉는 맥레인의 뒤편으로도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다.
맥레인의 표정은 어느새 그리움에 가득 차오른, 그러면서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사근사근한 미소로 누군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안.
아름답고, 씩씩하며.
그림자조차 위로할 줄 아는 속 깊은 여인이었다.
아, 맥레인.
당신이 나지막이 부르는 운명의 노래는 감미롭지만,
그 뒤를 잇는 2절은 너무나 슬플 것 같아,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