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노래 (2)
거국적인 행사에 걸맞은 만찬이 상 위에 한가득 차려져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리에 앉은 이들은 단 두 명뿐이었다.
0의 주인 에르앵.
그리고 맥레인.
“들지.”
에르앵은 태연한 표정으로 술 담긴 잔 주변에 있던 유리병을 집었다.
“이번 북쪽에서 힘겹게 건너온 물건들은 제법 실하고 좋더군.”
이어 유리병을 살짝 기울여 술잔 안으로 내용물을 쏟자, 안에 담겨있던 술 표면에 살얼음이 꽃피었다.
“드디어 그 차갑기만 한 땅에서도 수준급에 해당하는 연금술사들이 양성된 모양이야.”
“에르앵님.”
“건배하지.”
맥레인은 경직된 표정으로 에르앵을 살폈다.
그러나 에르앵은 담담하게 손에 든 잔을 재차 흔들며 맥레인을 재촉할 뿐이다.
하는 수 없이 맥레인은 얼른 잔을 들어 올렸다.
“차게 먹지 않아도 되는가? 자이든에서 가져온 한파인데?”
“저는 기업 놈들이 만든 냉소를 싫어해서요.”
제법 무례한 태도임에도 에르엥은 오히려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런 그의 웃음에 맥레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자네는 늘 한결같아.”
“기사에게 변화는 독이니까요.”
맥레인의 즉답에 에르앵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은 자네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때가 그리워, 왜 흐르는 시간 위에 변해가는 건 나 혼자인지… 참으로 애석해.”
“에르앵님…,”
“그대가 쟁취한 승전보에 내가 너무 우울을 쏟아버렸군.”
“그렇지 않습니다.”
맥레인은 들고 있던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르앵님, 이제 본론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물음에 에르앵은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들의 위치를 정돈하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곧 눈사태가 몰아칠 것 같네.”
“앵거스의 깃발이 결국 선을 넘기로 작정한 겁니까.”
맥레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3년, 크리카 프리거스.]
[세상을 얼린 냉정한 눈보라]
그 막강한 인챈트를 중심으로 세를 불린 가문이자 오쿨루스를 받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바로,
앵거스 가문.
그들이 결국 에르앵님께 칼끝을 겨눈 것인가.
“그들이 흘리는 눈송이는 그 하나조차 이 땅에 떨어지지 못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맥레인, 이번엔 달라.”
“그들이 달라진다 한들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이 루멘의 발언가들 마저 포섭했네.”
그 말에 맥레인의 얼굴에 있던 핏기가 한순간에 가셔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고결하다 믿었던 자들도 결국엔 한낱 두 발 걷는 자들이었을 뿐. 어쨌든 그들의 발언 덕분에 이 성채 내에서도 내게 등 돌린 자들이 몇 생겼을지도 몰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래 맥레인은 떠올렸다.
2년 전, 오쿨루스의 향후 세력을 결정짓는 중대한 전투에서 앵거스 가문은 명령을 무시하고 가진 재해를 개방했었다.
그 무시무시한 창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눈보라는 에르앵님, 그러니까 오쿨루스님이 펼친 태풍을 타고 일대를 영구동토로 만들어버렸지.
결과적으로 명예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작했던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끝이 나버렸고,
그로 인해 오쿨루스께서는 앵거스 가문의 영토 절반을 몰수하고 가진 명예마저 박탈시켰다.
한마디로 태풍의 눈 밖으로 나버려 완전히 격리된 세상 안에 갇혀버린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앵거스 가문이 원하던 그림이었을 줄은…,
사실 이 부분은 맥레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오쿨루스 기사들의 정점으로서 국경을 수비하는 데에 혼신을 기해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저 안에 끼어 있을 정치적 매듭이 도대체 몇 개나 될지 그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잘못은커녕 부당함만을 들먹이며 주객을 전도하려는 가문과.
그런 가문이 내세운 명분을 빌미로 이참에 세력을 불리려 작정한 거머리들의 합작을 막아낸 역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맥레인은 속으로 작게 원망해본다.
1등 서기관씩이나 되는 놈은 도대체 뭘 했길래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느냐고.
안 그래, 조이 크레비디?!
빠득,
분개한 맥레인이 어금니를 씹는다.
그런 맥레인을 보고 있던 에르앵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맥레인.”
“에르앵님…?”
“나는 이미 패배했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겐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야.”
“에르앵님, 주군께서 일말의 의심 없이 휘두르실 수 있는 검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 자넬 적극적으로 휘둘렀어. 앞으로도 계속 휘두를 생각이고. 그래서 지금 자네가 그 기나긴 전장에서 돌아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에르앵님!!”
에르엥의 입에서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감지한 맥레인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했다.
하지만 에르앵의 눈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통찰에,
맥레인의 이글거렸던 감정들은 맥없이 식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그는 맥레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세상에 몇 없는 0의 주인이었으니까.
“우리의 시작을 떠올려보세, 힘들게 밭을 갈아 고개를 내민 곡식을 거두어 낡은 갑옷을 장만했었지. 그 당시엔 제아무리 볼품없었다 한들 갑옷을 구하면 견습 기사가 될 수 있었잖나.”
“…그랬지요.”
“몰락했지만 그래도 깃발이라고, 내 가문의 깃발을 발판삼아 우리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기사로서 살아갔었지.”
맥레인은 저도 모르게 그 당시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가장 화창했던 인생의 초입에, 그만큼 심장을 두들기던 모험도 없었으니.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어쩔 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해.”
에르앵은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0을 손에 얻은 날, 우리 앞에 나타난 마이스터가 처음으로 가르친 게 뭔지 기억나나?”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그래, 그건 불 뿜는 용이나 자신하며 말할 수 있는 단어지. 결국엔 나도 자네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야. 실수하고, 서툴며 또 완전하지 않지.”
이어 다시 고개를 내린 에르앵의 얼굴은 아침에 떠오른 태양보다 확고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자신하네, 단 한 번도 내가 믿는 명예를 등지지 않았다고.”
명예.
그것은 실체가 없어 보이지 않으나,
비로소 쟁취하였을 때 알 수 있는 것.
맥레인은 왜 에르앵을 따랐는가?
왜 그의 검이 되기를 맹세하였는가?
그만이,
맥레인에게 명예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약이 판치는 용의 시대 때에 불타고 없어졌다는 그 명예는 지금, 기사가 판치는 용의 시대 이후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맥레인은 일말의 의심도 내비치지 않은 채 에르앵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그래서 쌓아 올린 명예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명예를 저버린 자들에게 결과적으로 패배했지…,”
맥레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러나 이어지는 에르앵의 말에 맥레인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를 우러러봐야만 했다.
“그들 역시 내게서 승리를 받아가진 못할 거다.”
“도대체…?”
“그동안 그대를 전쟁터로 몰아넣어 미안했다. 하지만 그대가 겉돎으로써 앵거스 가문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었어.”
에르앵님,
도대체 당신은 어떤 그림을 그려온 겁니까.
“그들은 0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0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지 오래거든.”
맥레인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경악에 젖어 에르앵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앵거스 가문은 명예 없는 찬탈로 얻는 것조차 하나 없이 이 땅 위에 군림하게 되겠지.”
“…,”
“절대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기반조차 없는 그들은 찰나에 무너지게 될 거야.”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맥레인.”
“명예라는 건 결국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부일 수도 있다.”
에르앵이 씩 웃는다.
살짝 눈감을 때 빗겨 들어오는 따갑고 눈 부신 햇살같이.
곧 그들이 있던 홀의 거대한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잿빛 갑주로 중무장한 조이 크레비디.
“조이…?”
“에르앵…,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조이! 무슨 준비가 끝났다는 거야!”
“…,맥레인.”
조이는 말을 잇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홀에 성큼성큼 들어온 이는,
베르융.
곧바로 에르앵이 그에게 묻는다.
“조이에게 이야기는 모두 들었겠지, 베르융.”
“…,들었습니다.”
“베르융?!”
이제 에르앵이 어깨를 활짝 펴고 장대한 모습으로 맥레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기사 맥레인은 내 명을 받들라.”
단호한 그의 말에 맥레인은 난색에 젖은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너는 제일 먼저 이곳을 떠나, 기울어진 바위 아래 있는 난쟁이를 찾아라.”
이어지는 에르앵의 명령에 맥레인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다가,
마지막엔 고개를 푹 숙여 응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베르융, 조이.”
이어지는 에르앵의 말에 나머지 두 기사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기사들과 그 가족들을 이끌고 떠나라, 이곳에 기업의 끄나풀과 비열한 첩자들만이 남을 수 있게.”
“명 받들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퍼져라, 살아라. 종래에 다시 돌아와 장성하라. 실패한 나를 반면교사 삼아 그 위에 깃발을 꽂아라.”
세 기사는,
서로 감추려고 노력했겠지만,
모두 다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앵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세 기사에게 맹수와 같이 우렁차게 외쳤다.
“가거라, 나의 ‘명예’들아.”
* * *
나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을 디안에게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찬탈에 성공한 앵거스 가문은 곧바로 우리를 추격해왔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을 잃었으며.
평생 반짝일 것만 같았던 메리안의 눈도 그때 감겼다는 것을.
물론 모든 것을 말할 순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내 결정적인 실수와 그로 인해 철저하게 망가졌던 그때의 모습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죄스러웠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디안에게 나도 모르게 옛날이야기를 즐겁게도 떠들어댄 것 같네.
얼마 만이지.
가족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죽을 때가 다가오니 나도 궁상을 떠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든 참회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병신같기도 하고.
아무튼,
결과적으로 저도 패배해버렸습니다.
에르앵님.
20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비참하게 길면서 짧은 시간이더이다.
“…,디안?”
디안은,
모은 무릎 위로 턱을 묻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직후 고개를 들어 싱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맥레인은 멋있네요.”
“내 이야기 잘 들은 거 맞아? 이쯤 되면 네 머릿속이 궁금한데, 내 설명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상상은 자유잖아요.”
이 새끼,
할 말 없게 만드네.
“고마워요, 얘기해줘서.”
“자꾸 덧붙이지 마라, 정들게.”
“뭐야, 우리 이미 정든 거 아니었어요?”
“닭살 돋게 하지 마, 씨발.”
디안은 이내 원래의 모습대로 쾌활히 웃어 보였다.
결국엔 그런 그의 천연덕스러움에 나도 웃어야만 했다.
“맥레인.”
“왜.”
“결정했어요.”
“뭐를?”
“검술 이름요.”
디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명의 노래로 할래요.”
그의 두 눈은 밤하늘이 담길 때면 눈동자에 흩뿌려져 있던 별자리가 유독 더 빛나 보였다.
그때 뭐라고 했었더라.
역전의 별자리 어쩌고 하는 소릴 케니가 하는 걸 얼핏 들었었던 것 같은데.
뭐, 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기로 하고.
지금은…,
내일을 위해 잠시 침묵에 머물러 있는 게 좋겠지.
* * *
“보스.”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낀 채 날카로운 표정을 지은 재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
한껏 초췌해진 시몬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가족들을 찾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가장 중요한 것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재키의 높고 거친 목소리에 시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키.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를 풀 때가 왔어.”
그 말에,
재키의 두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