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불한당 (2)
“말해 봐, 만스타인 세공소의 가장 특별한 보석에 대해”
시몬의 물음에 귀 큰 자는 터진 입술을 움찔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부 다 말할 기세더니 이것만은 대답을 못 하겠냐, 어?!”
이에 재키가 곧바로 이를 드러내며 녀석이 쓰고 있던 안대를 벗겼다.
그 안에 드러난 귀 큰 자의 두 눈은,
짙은 두려움에 절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어, 만스타인 세공…,”
“없나요…?”
시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마치 주문을 외듯 홀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확실히 없는 거지요? 없어?!”
“이게 완전히 미쳤나…?”
재키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얼굴 전반적으로 번지듯 퍼진 두려움은 벗겨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 모습을 본 재키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시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제지했다.
“뭐가 없다는 거지?”
“새 말입니다, 새! 나한테 붙여놓은 새!”
“새? 무슨 새?”
“그놈들은 아직 내게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고요!”
“그놈들은 누구고 네게서 뭘 의심한다는 거야?!”
“아니… 아니야…! 이 모든 건 그들의 의도인 게 분명해! 당신들이 날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이 날 움직이게 만든 거야!”
피를 튀기며 엉뚱한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 시몬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본 재키는 귀 큰 자의 턱주가리를 잡은 다음 매섭게 쏘아붙였다.
“오래 산 귀쟁이들을 엘더라고 부른다지? 엘더는 다 고고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이렇게 쳐 망가져 폐인처럼 지내는 걸 보면?”
“나는… 그저 세공사였을 뿐입니다…!”
“지랄, 살아있는 것들을 깎아 보석으로 만든 주제에.”
재키는 망설임 없이 귀 큰 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하지만 귀 큰 자는 되려 재키를 보고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킥, 당신은? 당신들은?! 당신들도 남들을 죽이고 후려쳐서 빼앗는 밑바닥 인생들 아니신가?”
그러나 그런 도발에 넘어갈 재키가 아니었다.
재키는 오히려 귀 큰 자보다 더욱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맞아, 근데 같은 밑바닥이라도 엄연히 다른 점이 있지. 그게 뭔지 알아?”
순간,
재키가 지은 섬뜩한 표정에 귀 큰 자는 마주쳤던 눈을 황급히 내리깔아야만 했다.
그러나 재키는 그런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긴 채,
무표정한 얼굴로 얼굴만을 집요하게 두들겨 패며 말한다.
빡!
“너는”
퍽!
“처맞기만 하는 새끼고.”
퍼억!
“우리는”
퍽!
“때리기만 하는 놈들이거든.”
주르륵,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린 귀 큰 자의 면상으로부터 흐르는 핏방울.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자 맥이 빠졌는지 힘없이 그의 고개가 스르르 떨어진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재키는 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피 묻은 자신의 주먹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도망자와 무법자의 다른 점이야. 알겠어?”
“커…흑…커헉…”
시몬은 재키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처음, 디안을 데리고 감정을 받게 했었을 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 이유는,
“보스?”
“계속해, 지체하지 말고.”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시몬의 재촉에 더욱 의기양양해진 재키는 귀 큰 자 앞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곤 대뜸 사근사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보우와 재재가 널 살살 다뤄줬나 봐?”
“허흑…흑…아니…절대 아니야…닙니다.”
의식의 끄나풀을 잡고서 간신히 대답을 내뱉은 귀 큰 자의 입에선 조각난 이빨 조각이 핏물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왜 보스가 묻는 말에 개소리로 대답하는 거야?”
다정한 말투와는 달리 재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귀 큰 자의 얼마 남지 않은 멀쩡한 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그러자 발작하듯 움찔거린 귀 큰 자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뭔가를 필사적으로 말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흐…흐흐흐흑…흑요…”
“뭐?”
“흑요석!”
침묵이란 문이 두려움이라는 두드림에 활짝 열리는 순간.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트…특출난 흑요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아무리 깎고 다듬어도 망가지지 않고 더 영롱하게 반짝였는데…”
귀 큰 자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움찔거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세공소의 주인인 칼 만스타인은 그 역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에 걸맞은 구매자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말에 귀 큰 자는 한참이나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시몬과 눈을 마주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구매자가 제 발로 칼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구매자는 칼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대단한 거…거물이었지요.”
“그게 누구지?”
“제리드 모리슨”
뭐가 그리 무거울까.
부담감에 짓눌린 혓바닥으로 힘겹게 내뱉은 그 이름은,
듣기에 또 얼마나 버거웠길래,
시몬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지금 뭐라고 했어?!”
비교적 무지한 재키마저도,
“보스, 저만 들은 거 아니죠?”
갈 곳 잃은 눈동자로 황당함을 토로해낸다.
“철강왕 제리드를 말하는 건가? 그 제리드?”
재차 되묻는 시몬에게,
“마…마.…맞습니다, ‘제리드 강철’의 그 제리드.”
귀 큰 자는 더욱 선명한 목소리로 확답할 뿐이다.
이어 시몬과 재키는 말없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를 추궁했다.
“계속 말해.”
“흐르는 시간마저 도…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그는 웬걸,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급하게 칼에게 흑요석을 보여달라 했었습니다.”
“해서 만스타인 세공소에 가서 그 보석을 보여줬다?”
“네…넵, 그리고 그 보석에 무언가를 품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인위적인 호…호박석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요구했습니다.”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해?”
“제리드 가문의 가…가보.”
“그게 뭐지?”
그 질문에 귀 큰 자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였어…, 난 정말 그럴 줄 알았다고…! 내가 돌아왔던 그 날 눈에 보인 건 검은 재뿐이었어!”
“그게 뭐였냐고!”
혼잣말을 미친 듯이 내뱉는 귀 큰 자의 모습에 참을 수 없던 시몬이 대뜸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하지만 귀 큰 자는 할 말이 더 있는지, 이제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시몬에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 사실 호박석이 될 보석은 흑요석이 아니었습니다! 제리드는 무…무… 무슨 생각인지 흑요석이 아니라 여자를 세공한 보석으로 일을 진행하길 원했어요. 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원료를 세공하고 깎았는데…, 나…난 그래도 다른 놈들만큼 열성적으로 일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 난 도중에 참을 수 없어서 떠났다고요!”
열변을 토해내는 그에게,
재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없이 일갈했다.
“어쨌든 내가 아는 특별한 보석은 흑요석뿐입니다! 모든 결정적인 일은 내가 떠났을 때 벌어졌단 말입니다!”
더는 그의 시원찮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시몬은 품에서 작은 머스킷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제리드 가문의 가보가 뭐야.”
“죽은 시…심장.”
“심장? 뭐의?”
“…,용.”
* * *
숲을 가로질러 그리소의 움막으로 돌아온 시몬과 재키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싸구려 밀주를 나눠 마셨다.
그 밀주는 입안에 치기 섞인 말이 조금만 섞여도 그 열에 불이 붙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독했지만,
잔을 비울 때마다 그들의 눈빛은 더욱 선명해져 갈 뿐이었다.
“보스, 세공소는 ‘진짜 큰 건’이었습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유리한 패를 모두 가지고 있는 건 우리 쪽이니, 고민하다가 때가 됐을 때 적절한 걸 내야겠지. 그전에 우린 지금보다 더욱 확실한 게 필요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신 같은 거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애들을 시켜 쓸만한 점성술사를 찾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보스.”
재키가 시몬의 술잔을 채우며 넌지시 물어본다.
“이미 맘속으로 어떤 패를 낼지 결정하신 것 같은데요.”
그의 떠봄에,
시몬은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몬의 모습에,
재키는 흥분을 애써 감추며 채워진 술잔을 비운다.
알게 됐거든,
시몬이 내리라 마음먹은 그 패가,
재키 자신도 원했던 패였다는 걸.
그러면서 소용돌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던 그때 그 상황을 떠올린 재키는,
마찬가지로 그때 보았던 시몬의 표정을 떠올리며.
결국엔 그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만끽하듯.
달콤한 안주 삼아 마지막 잔을 달콤히 삼켰다.
* * *
한 사람의 의지로 인해 일그러진 하늘 아래.
기막히게 쏟아진 재해를 광경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달아난 두 사람이 겨우 숨을 고르고 있다.
[보스, 보셨습니까?!]
재키는 아직도 못 믿겠다는 듯이 얼빠진 표정으로 저 너머 지반을 갉아먹는 소용돌이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재차 이어진 물음에 시몬은 짧게 대답했다.
[디안.]
[네?]
[디안이야. 저게 바로 디안이라고.]
그 말을 내뱉는 시몬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별안간 눈앞에 뚝 떨어진 기회를 맞이한 이처럼.
미소에 가까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 * *
속박에서 풀려난 귀 큰 자는 폐가를 떠나지 않았다.
모진 고문으로 손가락 대다수가 꺾인 두 팔을 조심스럽게 껴안은 채 이따금 느끼는 고통에 짧은 신음을 내뱉을 뿐.
그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부어오른 눈두덩이 속에 파묻힌 눈을 힘겹게 부라린다.
“다 보고 있었지, 다 보고 있었을 거야.”
마치 주문을 외듯, 넋을 잃은 모습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다 보고 있었잖아, 다 봤어, 나를 오래전부터 봐 왔잖아.”
푸르릉.
밖에서 뜬금없이 말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조용히 열린 문 너머로 걸어들어오는 한 남자.
그는 중얼거리는 귀 큰 자 옆에서 고급스러운 연초를 입에 물고선 그 귀하다는 가루 화약을 끝에 찍어 불을 붙였다.
“다…봤…”
“그래, 늙은 세공사 양반. 지금도 당신 정수리 위로 알베로스가 날고 있지. 크게 원을 그리며 말이야. 알지? 알베로스는 구름 위까지 날아다닐 수 있다는 걸.”
귀 큰 자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날 죽여 줘, 너희들의 계획대로 움직여 줬잖아.”
“계획대로 움직여줬다? 오만도 유분수지.”
귀 큰 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인 남자는 합금 실로 짜 만든 황색 코트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순환의 증거였던 구름이 지금은 그저 날씨의 수단이 된 것처럼, 우리 수중에 들어온 당신도 일개 수단에 불과해.”
냉정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에,
귀 큰 자의 얼굴엔 서서히 핏기마저 가시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잘 해 줬어. ‘오래된’ 산 증인 역할 말이야.”
철컥.
일련의 동작조차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인 손엔 어느새 검은 머스킷이 들려 있다.
그런데 그 검은 머스킷을 살피던 귀 큰 자의 표정이 심히 일그러졌다.
마치 너무 익어 문드러진 과일처럼.
“당신…, 제리드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심장을 잃은 철강왕의 핏줄들이 아무리 빨라 봤자지.”
귀 큰 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런 그의 눈에 작게 비친 남자는…,
“당신 같은 사람들은 날씨만을 쫓는다 들었…,”
탕!
사치스러운 화약이 빛을 뿜는다.
그 찰나의 빛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왼쪽 뺨엔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윽고 총구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연기를 음미하듯 들이킨 남자는 조용히 총을 집어넣은 채 절명한 이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맞아,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곧 찾을 수 있게 됐어. 그 날씨라는 거 말이야.”
그렇게 남자가 폐가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일대에 짙게 깔린 그림자로부터 수십 개의 안광이 번뜩이며 나타났다.
폐가에서 나온 남자는 그런 이죽거리는 그림자 무리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홀로 떨어진 날씨의 윤곽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나, 이 땅의 지랄 맞기가 도통 가늠이 되질 않으니 좀 더 때를 기다린다 ‘순례자’들이여.”
그 말에 밤중에 모인 조그마한 그림자는 언제 모여있었냐는 듯 뿔뿔이 흩어져 흔적마저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