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80화 (80/365)

80화. 그리고 무법자

햇살이 참 낯설고 반갑다.

아비베오에서 빠져나와 맞이하는 세상의 첫인상이 그랬다.

가족들을 다시 만난다면 왠지 모르게 방금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낄 것만 같네.

잠시,

고삐를 잡아 말을 멈춰 세운 나는 고개를 돌려 숲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밝은 세상으로부터 푸른 장막을 세운 숲의 경계에서는 아직도 밤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만 같구나.

마침 눈을 마주친 나무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잘 가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물 흐르는 소리를 실컷 듣고 다시 돌아오라면서.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맥레인의 물음에 난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 맥레인,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근처에 제분소가 있을 거야, 일단 거기로 가서 생각을 좀 해보자고.”

“지도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이제는 내 질문이 지겹다는 듯 맥레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벤투스의 목을 툭툭 두들겼다.

“얘가 곡식 냄새를 맡았으니까.”

사실 벤투스가 이미 갈 곳을 정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그에게 뭐 하나라도 질문을 더 하고 싶었다.

다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연기한 나는 물 흐르듯 주제를 바꿨다.

“참, 맥레인.”

유독 햇살 아래 창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거든.

능숙하게 고삐를 놀려 그의 옆으로 말을 붙인 나는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젠장, 햇살 좀 느껴보려 했는데 거기에 밤을 끼얹어?!”

“그냥 좀 덮어요, 이렇게 포근한 밤이 어딨어요?”

“어쭈, 이젠 나한테 명령까지 내리네?”

이번엔 내가 그의 말에 심드렁하게 답한다.

“아, 예.”

“…뭐?”

그런 내 대답에 맥레인은 기가 찬 듯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익숙한 침묵을 뒤로한 채 들판을 따라 이동하니 곧 벤투스의 직감대로 거대한 풍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풍차 안에선,

자작자작.

톱니에 맞물린 맷돌이 바쁘게 돌아가며 허옇게 갈린 밀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비공식적인 겨울의 첫눈처럼 느껴졌다.

“누…누구세요?!”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자작자작.

풍차 안, 매섭게 돌아가는 맷돌 근처엔 어린 두 소년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방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잔뜩 경계하면서도, 한창 갈리고 있는 밀을 주워 담기 위해 포대를 들이밀고 있었는데.

그 몰골을 보아하니 딱 봐도 고된 노동에 찌든 것처럼 보였다.

“우리를 마을로 안내해준다면 값을 치러주마.”

맥레인은 기침을 참아가며 그들에게 은화를 꺼내 보였지만, 순간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것을 쳐다보던 아이들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저씨, 우리 그런 거 받다가 걸리면 큰일 나요.”

“그리고 낯선 사람을 함부로 마을에 데려가면 안 된다고요.”

그들의 말투와 팍 굳어버린 표정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린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정 원한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그러나 그 잠깐의 눈빛을 놓치지 않은 맥레인은 은화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그들을 유혹했다.

하지만,

소년들은 예상 밖으로 극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가라고요!”

“이 안에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외치는 그들의 극성은.

그 맥레인도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결국엔 맥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내게 신호를 보냈고, 우린 그렇게 제분소 밖으로 나와야 했다.

“제가 말해 볼까요?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 같은데.”

“아니야, 디안.”

맥레인은 새어 나오는 기침을 막을 요량인지 급하게 꺼낸 연초를 입에 물고선 불을 붙였다.

이어 불붙은 연초를 크게 한번 빨아들인 뒤 감색 연기와 함께 내게 말을 건네는 맥레인.

“야,”

“네, 맥레인?”

“네가 아는 노래 중에 개과천선에 성공한 이야기는 없냐?”

“많죠.”

맥레인은 정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재차 묻는다.

“정말?”

“네, 그 주제 대부분은 장르적으로 고전에 속한 노래들이지만요. 사랑 노래가 유행인 요즘과는 어울리지 않죠.”

“그렇구만, 그래서.”

“그래서?”

“그 노래 중에 실화에 속한 이야기도 있으려나? 아니, 없겠지?”

“아뇨, 오래된 노래들은 거의 다 실화에요.”

“그게 정말이야?!”

“용의 시대 때에는 술집마다 역전의 인생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데요. 그것이 곧 용의 시대를 주름잡는 장르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맥레인의 얼굴에 짙은 호기심이 묻어 있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런 그의 모습을.

“야, 그럼 그중에 가장 유명한 노래 가사가 어떻게 되냐?”

“그런데 맥레인, 저희 출발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기다려 봐, 때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때?”

“됐고, 알려줘 봐. 네가 아는 그 고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 가사.”

그의 요청에 난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더듬었다.

기억의 한 쪽,

켜켜이 쌓아놓은 노랫말들 가운데 가장 낡고 투박한 악보를 찾기 위해.

이내 눈을 뜬 나는 단조로운 음율과 함께 담담히 가사를 내뱉었다.

[사람을 둘 죽였네.]

[귀 큰 자 셋은 머리를 쏴 죽였지.]

[난쟁이 여덟은 노예로 팔고.]

[용 사냥한다는 허풍쟁이의 이빨을 뽑았어.]

[오직 미지근한 술병만이 내 입술에 닿았고.]

[업신여김과 욕설만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지.]

[난 그런 쓰레기 더미 속을 살아가는 부랑아.]

[과거를 잊고 쓰레기가 되어버린 멍청이.]

[어느 날 죽어가는 노인을 만났어.]

[그 주머니를 뒤지는데 그는 내게 말했지.]

[가져가 다오, 가져가 다오.]

[내 손엔 금으로 덧칠한 머스킷이 쥐어져 있었네.]

[노인은 식었지만, 머스킷은 뜨거웠어.]

[그는 발리아가의 용 사냥꾼.]

[그러나 고독에 중독돼 죽은 초라한 늙은이.]

[이제 금빛 머스킷에 비친 내 얼굴은 과거를 말하네.]

[나는 굽이 살폈던 자.]

[그리고 다시 굽어살피려는 자.]

[쓰레기 더미를 박차고 나와.]

[인생의 흥망을 결정짓는 표적을 쏘네.]

[이제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불러.]

[용 사냥꾼, 벤]

[용 사냥꾼, 벤]

담담히 가사를 부르고 난 뒤 마른 입술을 적신 나는 슬쩍 맥레인을 흘겨보았다.

그는,

그의 눈빛은.

한밤 아래 책을 읽는 비질라의 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언젠가.”

맥레인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되면 그 노래 제대로 불러주라.”

그의 요청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제분소 인근, 못나게 튀어나온 바위에 나란히 기대어 감상에 젖어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풍차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오던 제분소에서 별안간 소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맥레인은 자세를 고쳐잡고 바위 너머 상황을 주시했다.

* * *

아홉.

인간이 일곱, 난쟁이가 둘로 이루어진 그 무리는 딱 보아도 우리와 같은 무법자처럼 보였다.

아니, 같은 무법자라고 해도 그들은 질이 나쁜 불한당 같았다.

적어도 석양 아래에서 바람을 가르는 말을 타고 로망에 젖어본 적은 없어 보였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이 전신에 걸친 것들은 하나같이 아귀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덕지덕지 기워입은 그들의 갑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부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경을 거스르게 할 정도였다.

맥레인은 그런 내 모든 감상을 함축적인 단어 하나로 표현했다.

“예상대로 탈영병 새끼들이군.”

“탈영병…”

“쉿!”

채 말하기도 전에 맥레인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져다 댄다.

동시에 저 너머 제분소로부터 그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귀어, 네가 가서 꺼내 와.”

“왜 내가 가야 해?”

“신병 나부랭이 새끼가…!”

“신병 같은 소리 하네, 씨발 탈영한 지가 언젠데!”

“순진한 새끼, 탈영한다고 그 계급이 사라질 줄 알았어? 우린 단순한 탈영병이 아니야. 이 지역을 장악한 군벌이라고.”

“그래봤자 고작 삼십이잖아?”

“그 삼십으로 지금 무엇을 해냈는지 잘 봐라, 우린 지금 브바스를 장악했어! 무려 첨탑을 세운 곡창을 말이야!”

“결국엔 떠나야 하는 신세임은 변치 않아! 우리가 탈영을 왜 했는데,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서 한 거 아냐?!”

스릉.

말싸움 끝에 계급이 높아 보이는 남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항명하는 거냐?”

“하…하면 될 거 아냐! 하면!”

“네 계급을 잊지 마라, 제귀어 이 병신같은 신병 새끼야.”

이윽고 윽박지름에 못 이겨 제분소로 향한 사내가 곧 소년 둘을 붙잡아 끌고 나왔다.

소년들은,

그때의 그 냉정한 모습은 어디 가고 순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순순히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몇 포대나 나왔지?”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자가 나서서 소년들에게 묻자,

곧 둘 중 하나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스…스무 포대가 나왔어요.”

“서른 개.”

남자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단호하게 꾸짖었다.

“오늘 내로 포대 서른 개를 마련해라.”

“하…하지만 군인 아저씨, 이제 바람기름도 거의 다 떨어져서…”

“그럼 네 몸으로라도 풍차를 돌려. 안 그럼 네 누이를 내 위에서 돌려줄 테니까.”

살벌한 남자의 협박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낄낄거리며 비웃는다.

맥레인은 그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보다가,

별안간 어울리지 않는 흥얼거림을 시작했다.

“사람 둘을 죽였네…”

“…예?”

“뭐가?”

“아니…”

“그냥 좀 넘어가, 나는 노래도 못 부르냐?”

“그게 아니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어떻게 하는 건 네가 해야지, 가서 저 새끼들 족쳐.”

히죽 웃는 맥레인의 모습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맥레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 본다.

“뭐야, 그렇게 순순히?”

“그만큼 저놈들한테 악취가 나니까요.”

직후 자리를 뜬 나는 셀레어를 뽑아 들고서 성큼성큼 제분소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상황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난쟁이 중 하나가 뒤틀린 욕정을 숨기지 못하고 뽀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소년 하나를 방금 막 자빠트렸다.

“싫어…! 왜 이래요! 제발!”

짝!

거친 뺨 소리, 그럼에도 몸부림치는 소년.

그때마다 다시 들려오는 뺨 소리.

그렇게 난쟁이가 본격적으로 소년을 뒤집어 눕혔을 때.

나는 말 없이 검 면을 손바닥으로 두들겨 인기척을 내었다.

착 착.

내 손바닥에 맞아 얼얼하게 떨리는 검날.

그리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부들부들 떠는 장정들.

이내 홀로 서 있는 나를 보곤 격앙된 표정으로 노려본다.

하지만 그들과 그다지 말을 섞을 생각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많은 시간을 쓸 생각도 없던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나아가,

제일 앞에 있던 장정의 턱을 베어버렸다.

그렇게 턱 위로 말끔하게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그들이 일거에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 순간에도 내 검은 이미 둘의 배를 가른 뒤였다.

이어지는 그들 네 다섯이 동시에 내뿜는 연계는,

맥레인이 홀로 내뿜는 검무와 비교하면 바람에 패대기쳐진 들풀만도 못하구나.

달려드는 창 옆을 파고들어 그것을 든 어깨를 가르고, 흘러내리는 팔 아래로 몸을 숙여 진입해 턱밑으로 치고 올라오는 검을 상체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 피한 뒤.

당황한 놈의 눈을 보며 그 인중에 검을 박아 넣는다.

뒤이어 인중에 박힌 검을 왼편으로 휘둘러 그 광대를 찢고 이어 그 궤적 선상에 놓인 난쟁이의 목을 깊게 베었다.

마치,

생각이 없는 미물을 베는 듯한 기분이 강렬하게 든다.

저들의 대부분을 베는 데에,

맥레인과 함께 만든 내 검술의 한 동작조차 소비하지 못했으니까.

다시 다음 표적을 잡은 나는 주춤거리며 경악하는 그들의 표정을 바닥에 떨어트려 박제시켰다.

이제 셀레어의 몇 줄기 묻은 피를 털어낸 나는 비교적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뒤돌아 이제 막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맥레인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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