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조율
한걸음 걸었을 때,
다섯이 죽었다.
두 걸음 걸었을 땐,
디안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뒤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엔 뭔지 모를 홀가분함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 홀가분함에서 보기 힘든 절제와 냉정이 보인다.
그놈 참 명검일세.
“디안, 반 박자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잖아?”
나는 그에게 건조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내가 한 발자국 옮겼을 시간에 능히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자 이어지는 그의 대답이 참 걸작이다.
“저들은 제 예상대로 움직였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훨씬 느렸습니다.”
압도적인 격차는 도리어 강자 쪽에게 불합리한 모순을 선사한다.
비록 상대가 탈영병이긴 해도 최소 수년은 진영 싸움을 하며 칼밥을 먹었을 자들 일진데.
그런 그들에게서 앞서 말한 모순을 고백하는 디안의 모습을 보니,
바로 판단이 섰다.
적어도 중립지역에서 디안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낼 존재는 없을 거라고.
그를 이기려면 압도적인 수로 기습을 해야만 승산이 있을 거다.
그마저도 만약 인챈트의 힘을 쓰게 된다면,
금화 수천 개 치 화약을 집중적으로 쏟아붓거나 하지 않는 이상 숫자가 제아무리 많다고 한들 주축들이 범인에 불과하다면 의미가 없다.
물론 그 화약을 쓰는 자들조차 포키스와 같은 잔뼈 굵은 저격수여야 할 거다.
일반적인 탄환으로는 어스름으로 짠 후드를 뚫어낼 수 없을 테니 밤중의 별을 저격하는 심정으로 빈틈을 노려야 그나마 승산을 빌어볼 수 있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립지역 자체에서 구태여 그런 수고를 쏟아부을 단체나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걱정해야 할 것은,
값비싼 용병이나 순례자 정도.
용병이야 얽혀 있는 것이 돈뿐이라 걱정은 덜 되지만,
역시 문제는 광신으로 얽힌 순례자.
그들은 늘 그렇듯 방황하는 재해 주위를 그림자처럼 떠돌다가 어느 순간 빈틈없이 옥죄어 올 거다.
그 순간은 절대로 피할 수 없어.
그렇다면 그전에 디안이 느끼고 있는 모순을 조금이라도 조율해낼 필요가 있다.
더 늦게 전에 말이야.
“맥레인, 이제 마을로 가는 겁니까?”
“그래, 가야지.”
아까의 그 살벌함은 어디 갔는지,
디안은 온화한 표정으로 벙 쪄있는 두 소년에게 다가갔다.
디안을 바라보는 두 소년의 눈엔,
선망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렇게 디안이 그들을 설득할 동안,
나는 뒤돌아 집요한 욕지기 같은 기침을 꾸역꾸역 삼켰다.
* * *
두 소년은 군말 없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희망 섞인 목소리로 내게 절박하게 요구했다.
마을을 점거한 탈영병들을 없애 달라고.
이에 맥레인은 소년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그러자 소년 중 하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지금 마을은 금화 두 개도 낼 수 없는 형편이라면서.
생각보다 탈영병들의 수탈이 도가 지나쳤던 것 같은데.
맥레인은 그런 소년의 절박함에 단호한 모습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두 소년이 금방 울상이 된다.
나는 맥레인을 슬쩍 흘겨보았지만, 그는 펼친 손가락 두 개를 계속 강조하다가 진지한 말투로 운을 뗐다.
“침대 두 개, 밀주 이상 되는 술 두 병, 말을 배불리 먹일 꽉 채운 구유 두 개.”
그 제안에 두 소년은 다시 벙찐다.
“시체는 마을 사람이 치우고, 놈들이 뭘 가졌건 우린 상관 안 하니 다 가져가도 좋아. 어때?”
곧이어 맥레인이 특유의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년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소년은 잽싸게 고개를 흔들며 맥레인의 손을 붙잡는다.
“거래 성사야.”
그렇게 바로 두 소년을 각 말의 뒤에 태우고 이동한 우리는 그들에게서 마을에 처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규모가 꽤 큰 축에 속했던 마을은 첨탑은 물론이고 열두 명의 자경단까지 따로 운용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다는데,
2년 전, 한 남자가 마을에 불쑥 찾아와 이곳에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거다.
그는 제법 성실하게 일하며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과거 군인 출신이었다는 걸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마을의 보안관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근래 중립지역에 곧 전쟁이 일어날 거란 뒤숭숭한 소문이 들려왔고, 거기에 더해 남쪽 라티아는 이미 전쟁이 벌어져서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는 둥 가중되는 혼란에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런 시기에, 참으로 적절하게 탈영병 무리가 마을에 들이닥쳤다는 거다.
하지만 방책과 첨탑을 가진 마을은 그들을 충분히 막을 여력이 있었고, 이제 보안관의 지휘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때.
그가 돌연 탈영병들을 마을로 들여보냈단다.
알고 봤더니 그는 2년 전에 탈영한 군인이었고, 큰돈을 만져보기 위해 마을을 물색하던 중 이곳을 골라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던 거였다.
한패인 탈영병을 들여온 그 보안관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는데,
군인에 몸담고 있었던 시절 유독 중립지역에서 곡식이 비싼 값에 유통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곡창을 낀 마을을 털기로 작정해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했다.
그 일련의 사연들을 모두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지금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이 시몬 바스티유라는 공식을 거쳐 탄생한 것 같아서.
맥레인도 나와 같은 감상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에 더욱 집중하려는 듯 마른기침을 시작으로 담담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너희 꼬맹이들은 마을에 도착하면 먼저 가서 마치 도망쳐 온 것처럼 행동해라. 놈들이 따져 묻거든 제분소에서 무법자와 한바탕 전투가 일어났다고 말해.”
“그…그리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소년에게 맥레인은,
“곧 마을에 그들이 들이닥칠 거라고 해.”
간결히 대답한 뒤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디안.”
“예, 맥레인.”
“적당한 때에 들어가서 놈들을 끝내라.”
맥레인은 고삐를 당겨 내 쪽으로 말을 붙이곤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되도록 통찰을 쏟아서 놈들을 평가해 봐. 그들이 걸친 것, 들고 있는 것, 각각의 행색을 읽고 수준을 예상해 보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두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비질라와 함께 라티아에서 사 왔던 그 책들 말이다.
이어 맥레인은 마지막으로 내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상대에 대한 평가에 과대도, 과소도 붙이지 마라. 붙을 것 같으면 객관으로 털어내도록 해. 명심해라, 이는 네가 평생을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니까.”
뭐랄까.
맥레인이 내게 해준 조언은 수도 없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해주는 이 조언은 유독 더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느덧 소년의 안내를 받은 우리 앞에 어둑한 하늘을 묻힌 방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획한 대로 두 소년은 말에서 내려 별안간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헐떡이는 숨을 안고 마을을 향해 달려나갔다.
“맥레인, 기침은 좀 어때요.”
“괜찮아.”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이내 마른기침을 짧게 뱉은 맥레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안 괜찮아.”
그런 그에게 이번엔 내가 말했다.
“저는 그럼 맥레인에게 부탁 하나만 할게요.”
그 말에 맥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데.”
“매일매일 제가 숙제를 잘 풀고 있는지 봐 달라고요.”
이내 잠자코 있던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하는 채점은 꽤 까다로울 텐데.”
“까다로울수록 좋죠, 전 자신 있거든요.”
제법 오기도 좀 부려본다.
그러면 그는 좀 더 실없이 웃어주었다.
“이제 슬 가 봐라.”
“네.”
“참.”
막 가려는 찰나 맥레인이 날 불러 세웠다.
그는 걸치고 있던 어스름을 벗어 내게 던져 주었다.
“걸치고 가라, 너에게 처음 당하는 놈은 아마 떨어진 하늘에 당했다 착각할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어스름을 걸친 나는 마을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 * *
두 소년은 일러준 대로 맡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박동을 뱉어낼 것처럼 헐떡이는 둘의 표정엔 그럴싸한 당혹이 묻었고, 그 과정에서 제법 매운 구타가 있었으나 그마저도 잘 참아낸 것이 기특할 정도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란에 보초를 서고 있던 탈영병들을 포함해 가장 큰 집으로부터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나온 자들까지 한곳에 모여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수가 열아홉.
그중에 제법 서열이 높아 보이는 자가 둘 정도.
갑주를 걸치진 않았지만, 제법 깔끔한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인원에 포함되어 있진 않을 거다.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들리진 않았지만,
방책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경만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갈무리할 수 있었는데,
참으로.
끔찍한 짓을 저질렀구나.
마을 광장엔 본보기로 처형한 마을 청년들의 사지가 효수되어 있었다.
그 주위를 정신이 나간 듯한 노파 하나가 맨발로 서성인다.
뒤이어 한 집에서 거대한 풍채를 한 중년의 남자가 뒤뚱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덜 잠긴 바지 단추를 매만진 채 땀으로 흠뻑 젖은 상의를 흔들며 팔자 좋게 광장에 모인 일행과 합류했다.
맥레인,
당신이 해준 조언이 무색할 정도로.
저들은 평가 내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짧게 감상을 내린 나는 제분소에서 느꼈던 그 묘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에 대한 감상이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확실히 바꾸어낼 수 있다는,
그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은 제분소에서 상대했던 얼간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
한 호흡.
아니,
그 반으로 끝낸다.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나는 방책으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 * *
밤하늘 한쪽으로부터 묘한 괴리를 느낀 남자는,
뒤늦게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자각하곤 입 벌려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입에선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했을 땐, 그의 두 눈은 흰자를 드러내며 뒤집혔다.
그렇게 머리 하나가 바닥에 쏟아질 무렵,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인근에 있던 동료의 머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그 찰나에.
이번엔 한 남자의 아래턱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끄아아악!”
이윽고 터진 비명에,
그들의 의식이 급변한 상황을 인식한다.
그와 동시에 한 쌍의 팔이 막 땅에 떨어져 내렸다.
이어 그들 사이에서 실낱같은 은빛이 번쩍이자, 이번엔 덩치 큰 사내의 상체가 대각으로 말끔히 절단되어 그 내용물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어…어어어?”
“아악?”
의문으로 점철된 단말마 사이로, 밤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밤은 두 개의 번뜩이는 별을 빛내며, 그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달 조각을 쥐고 사정없이 휘둘렀고.
이내 그 밤의 이동 선상에 있던 장정들로부터 자비 없는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제분소에서 먼저 당한 자들과 같이 한마디 말도 허락받지 못하고 스러져야만 했다.
애초에 죽음을 자각하는 그 순간까지도 뭐에 당했는지도 몰라 몸을 떠나 바닥을 뒹구는 얼굴에선 의식이 덜 끊긴 눈알들이 바삐 굴러만 다녔다.
그렇게 광장에 모여들었던 자들 가운데 두 명만이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와 그 지옥도를 그린 악마를 볼 수 있었다.
“히…이…”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공포에 질려 신음을 내뱉는다.
그러자 곧 그 옆에 있던 장정의 상체가 쏟아져 내렸다.
무너진 신체에서 들려오는 소리만큼 끔찍한 것도 없을 터.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끄…끅…!”
목구멍 안으로 얹힌 두려움으로부터 간신히 새어 나온 비명을 지를 뿐이다.
이어서 섬뜩한 피비린내를 느낀 그가 떨리는 고개를 겨우 틀어 어느새 자신의 뒤에 있는 밤을 보며 빌어본다.
“제에…발…”
그는 운이 좋았다.
적어도 죽기 직전 단어 하나 정돈 말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의 머리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광장에서 볼일을 마친 밤은 유유히 마을 한가운데를 거닐며 남은 표적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 어떤 말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 * *
맥레인은 천천히 마을로 들어섰다.
그리곤 펼쳐진 광경을 보며 디안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따라가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 어릴 때가 생각나는 것 같군.”
그러면서 광장에 주저앉아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우리는 이제 어디서 쉬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