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82화 (82/365)

82화. 조율 (2)

조촐한 방.

구석엔 갓 태운 향초로부터 연기가 어지러이 흐른다.

올 굵은 삼베를 쌓아 올린 거칠고 투박한 침대에 앉은 나는 걸치고 있던 어스름을 가진 긴장과 함께 내려놓았다.

그리 버거운 일은 아니었으나, 서슬 퍼런 검을 휘둘러 누군가를 베는 행위에는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따랐다.

방 너머, 아니.

마을 방책 너머엔 방금 막 피어오른 듯한 불길이 크게 치솟고 있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탈영병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는 거겠지.

몇을 베었던가.

가만히 의식해 보자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내 머릿속을 선명히 스쳤다.

마지막 상대는 폭행을 당한 여인 둘을 끼고 노는 탈영병 무리의 두목이었는데,

놈은 특별히 손목을 잘라 마을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에서 진 병사로서 대접해달라 울부짖었지만, 그가 저지른 행동이 그 설득을 논파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나 있었을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울분을 토해내듯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뒤론 모르겠다.

곧장 소년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왔으니.

그나저나 맥레인은 또 날 혼자 두고 어딜 간 거지?

말들을 먹일 구유가 진정 꽉 차 있는 걸 확인이라도 하러 갔나?

별들도 재 말하면 반짝인다더니,

벌컥, 방문이 열린다.

그 너머엔 날 훔쳐보기라도 하듯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과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내 그들 앞으로 덩치 큰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맥레인?”

한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난 그는 방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답게 인사하곤 이내 문을 닫아버렸다.

“어디 다녀오시는 겁니까?”

“받아야 할 건 확실히 받아야지, 겸사겸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좀 나누고 왔고.”

“뭔가 흥미 있는 이야기라도 있었나요?”

내 물음에 맥레인은 대답 대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질문해왔다.

“어때?”

“뭐가요?”

“생각 없는 거야?”

“무슨 생각이요?”

마른 헝겊으로 열성을 다해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는데, 느닷없는 맥레인의 행동에 나는 표정으로 물음표를 그려야 했다.

“밖에 널 보러 온 사람들 말이야. 아주 이쁜 아가씨들도 있던데.”

“그래서요?”

“눈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노골적으로 말해주길 원하는 거냐?”

이내 답답했는지 맥레인은 내 옆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툭툭 쳤다.

기침에 시달리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손이 매웠지만, 그에게 아직 그만큼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것에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맥레인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곤 시시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그저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다.

사실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감정들을 소중히 하고 싶을 뿐이지.

가령 대가성이 짙은 관계라거나, 고작 한밤의 한 달빛만을 보고 지나치는 가벼운 사이는 원하지 않는다.

안드레의 지고지순함을 답습한다 해도 그가 느끼는 마음처럼 내게도 소중한 것이라면, 기꺼이 나는 그것을 껴안고 가고 싶어.

그게 지금 이성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는 내 마음가짐이다.

언젠간 이 부분에 대해 맥레인에게 상담할 날이 오게 되겠지.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못 하겠어.

이윽고 맥레인은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수고했다, 디안.”

그는 그러면서 나지막이 질문을 이었다.

“네게 진정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세요.”

“어떠냐, 네 마음은?”

그 질문에 나는 검을 바삐 정비하고 있던 손을 멈춰야만 했다.

지금부터는 그에게 내가 가진 걸 털어놓을 때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할게요, 맥레인.”

“그래, 좋아.”

“잘 됐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제 검으로 인해 저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게.”

맥레인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오늘 하루에만 수십을 베었는데도?”

“죄책감을 따지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촉박하잖아요. 아니, 이 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 말에 그는 마치 쓸개를 씹은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지는 맥레인의 말은,

약간은 자조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었다.

“그나마 이 땅이기에 잠깐 쉬어갈 시간도 있는 거야. 하지만 너와 같이 자유를 배우는 이들에겐 틀림없이 벅찬 땅이지.”

이제 맥레인은 아비베오에서 보여주었던 그 날카로움을 간직한 얼굴로 내게 조언했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아주 지독한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이 오게 될 거다. 그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누구나 중독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독과 같지.”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나도 몰라, 그저 버티는 것밖엔.”

“그렇다면 저도 그때가 되면 그저 버텨 봐야겠네요.”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이후엔 서로 식은 웃음을 내뱉는다.

“참,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최근 일대에 탈영병 무리가 줄줄이 나타났다고 하더라고.”

“정말로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걸까요?”

“그 말은 틀렸어, 엄밀히 말하면 지금도 두 제국은 전쟁 중이거든. 다만 그것이 모종의 이유로 지지부진에 빠졌을 뿐.”

맥레인은 손에 들고 왔던 짐을 풀더니, 그 안에서 돌돌 말린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조만간 고착된 전선이 크게 출렁일 거다. 우린 그 전에 얼른 내빼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네, 맥레인.”

“참, 오는 도중에 제법 똘똘한 아이가 하나 있던데.”

그 말을 하곤 자리서 일어난 맥레인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방문 밖을 기웃거리던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그런 여인들 사이에 껴 있던 아이를 향해 손짓한 맥레인이 턱짓을 하기 무섭게,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장장이의 아들 비숀입니다.”

검댕이 묻은 얼굴을 한 어린 소년이 방에 들어서서 내게 인사를 올렸다.

“정비는 이 아이에게 맡기도록 해.”

“제 장비를 말입니까?”

“그래, 기사 체험한다 생각하라고.”

그러면서 맥레인이 슬쩍 내게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내게서 검을 받아 든 소년은 굉장히 능숙한 솜씨로 정비를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흙 묻은 부츠를 포함해 갈라진 가죽 띠, 떨어진 단추까지 능수능란하게 정비해내는 그의 솜씨에 곧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 저희 마을을 구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두 분을 잘 모르지만, 두 분이 오늘 해주신 일은 깃발을 휘날리는 기사의 본분과 같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꾸벅,

저 어린 나이에 능수능란한 어휘를 구사하며 인사를 하는 소년을 보니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 * *

그날은 유독 우중충한 하늘만큼 마음도 울적했다.

아침부터 마법사들의 변덕처럼 억수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깬 나는 비를 막을 가죽 외투를 둘러쓰고 거리를 나섰다.

사하린.

철 지난, 그러나 정겨운 바드의 노랫소리가 자랑거리인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오늘도 밭일을 위해 고군분투할 예정이었다.

밭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가 지났을까.

상황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기세 좋게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더해 마법사가 작정이라도 한 듯 일대 구름을 이곳 하늘에 긁어모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먹구름은 점점 비대해져만 갔다.

결국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밭 위로 만들어놓은 보가 터져버린 거다.

터진 보를 막지 못하면 밭은 끝장이다.

“아스틴! 너는 위쪽 도랑을 맡아!”

목청이 터져라, 빗소리를 뚫어가며 소리를 지르자 금발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화답하듯 크게 소리쳤다.

“시몬! 그냥 포기해! 물살이 너무 세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보를 막지 못하면 우리가 일 년 내내 일군 밭이 통째로 사라져!”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고!”

“보를 막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어!”

밭의 주인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따듯한 물에 발을 담근 채 빗소리를 안주 삼아 고급스러운 술을 들이켜고 있겠지.

가진 자의 것에 평생을 바쳐 일하고 그 찌꺼기를 받아먹고 사는 나는,

지금 가진 자의 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이 주는 찌꺼기조차 없으면 연명하지 못하는 볼품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이 밭에서 같이 일하게 된 자들은?

그들은 누가 책임진단 말이야?

이 봇물을 막지 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해서,

“시몬! 미쳤어?!”

무조건 막는다.

터진 보에서 쏟아지는 물살은 언뜻 보면 산이 만든 폭포와 같아 그 기세가 엄청났다.

튀기는 물살에 맞기만 해도 살이 아려올 정도로.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보와 연결된 아래쪽 도랑의 길목을 트기 위해 삽을 들고 토사를 퍼 올렸다.

그렇게 손바닥 가죽이 다 찢겨가라 토사를 퍼 올린 끝에, 쏟아져 내리던 봇물이 길을 바꿔 도랑을 향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봇물의 기세에,

나는 발을 접질려 결국 물살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시몬!”

하지만 완전히 떠내려가려는 찰나, 아스틴이 내 손을 붙잡고 끌어올렸다.

“이 정신 나간 놈 같으니!”

“하하, 그래도 막았으니 된 거 아닌가?!”

“정말 못 말리겠군!”

깊은 안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그와 나란히 서기 무섭게,

“어…어?!”

나는 그의 뒤를 덮쳐오는 묵직한 토사를 보며 아연실색했다.

이후 모든 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랑으로 봇물을 흘려보냈음에도 기어이 밭은 대부분이 침수되었고,

아스틴은,

찾을 수 없었다.

소유주는 밭을 망쳤다는 죄목으로 내게 엄청난 보상금을 요구했다.

정작 밭을 정식으로 관리하는 자들은 그의 조카와 그 일가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소유주는 보상금 대신 다른 은밀한 제안을 내밀기도 했었다.

내 오랜 벗인 엘라를 밤 시중으로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에 극렬히 반발하지 못했다는 게 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지만, 더욱 절망스러운 건.

엘라는 나를 위해 기꺼이 그 일을 감수할 거라는 사실이다.

해서 도망을 치기로 했다.

탈주하게 되면 수배령이 떨어지고, 적발되어 잡히면 가장 자비로운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교수형이다.

그럼에도 지금 상황보단 낫지 아니한가.

그래서 엘라를 설득해 도시를 떠나려 했는데,

아스틴의 가족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래, 원망스럽겠지.

나는 그들의 원망을 거스를 자신이 없다.

해서 엘라를 떠나보내고 순순히 벌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가 지금까지 모은 얼마 되지 않는 자산을 아스틴의 가족에게 넘기고, 그대로 나는 목매달려 모든 것을 청산하면 되는 거야.

억울했지만,

이 세상은 나라는 존재의 억울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형을 기다리는데, 외지에서 찾아온 사냥꾼이 미끼로 써먹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갓 들어온 내가 그 미끼에 가장 부합했었고,

그렇게 감옥에 빠져나온 나는 사냥꾼의 매정한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싶었다.

내 억울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일단 당신의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그러자 사냥꾼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답한다.

“난 매튜다. 그러는 넌 이름이 뭐냐, 죄인?”

“시몬, 시몬이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사형수가 됐나?”

“내가 지은 죄라곤 내 삶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뿐이오.”

“너희들의 사연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아니! 나는 다릅니다!”

초로의 남자인 매튜는 날 다그쳤다.

그저 인근 숲에 나타난 괴이한 현상을 퇴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을 뿐.

이내 숲에 도달하기 무섭게 매튜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었다.

“도대체 저 숲 너머에 뭐가 있는 건가…!”

마찬가지로 잘은 모르지만 막연한 섬뜩함에 덜덜 떨고 있던 나는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무엇인가를 발견해 소리쳤다.

“저길 보시오! 저기!”

매튜는 조심스럽게 활을 겨누었으나,

이내 거둬야만 했다.

숲에서 걸어 나온 이는,

양팔에 흥건한 피를 묻힌 채 누군가를 안아 들고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저리도 아리따운 여인이 숨을 거두었구나.

그런 그녀를 안고서 걸어오는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 * *

“…”

잠에서 깬 시몬이 상체를 일으켜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참으로 오래된 기억이 꿈에 나타났구나.

아니,

이 오래된 기억을 꿈꾼 이유가 있었을지도.

저 멀리서 재키가 다가온다,

그는 곧 시몬에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보스, 점성술사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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