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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83화 (83/365)

83화. 이치

“재키, 정말 점성술사를 만나러 가는 거야?”

썩은 이를 드러내며 두려움을 내비친 에탄이 말을 타고 나가려는 재키에게 물었다.

“그래.”

“하지만 보우가 하는 얘기 들었잖아,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그쪽이 우릴 찾았다면서!”

“그 말인즉슨 우리가 맞이할 운명이 혹할 만큼 그들에겐 구미가 당긴다는 소리겠지.”

“나…난 모르겠어. 애초에 점성술사들은 탑에서 추방당한 놈들이잖아? 어쨌든 마법사라고 마법사! 예언이라면서 저주를 걸지도 몰라!”

“에탄, 잊었어? 라티아의 절반을 쓸어버린 소용돌이가 어디서 나왔는지?”

재키의 말에 에탄은 금세 떠올랐다는 듯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알지, 알지! 우리 보스의 가족이잖아!”

“우리가 그 패를 가지고 해내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없지, 없지!”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난쟁이 조합에서 운영하는 은행마저도 털 수 있다고. 점성술사가 우릴 찾았다? 중립지역에서 크게 한탕 해치워 먹을 우리 운명이 궁금해서가 아니겠어?”

에탄은 그제야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천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런 그를 보며 재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동시에 자신이 한 말들을 상기하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에탄의 말대로 점성술사들은 연금술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들이다.

비록 탑의 마법사와 같은 위상을 떨치진 못했지만, 그런 그들 밑에서 별들을 통해 세상을 읽어왔던 자들이기에.

두 발 걷는 자들에겐 실질적인 마법사로 군림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변덕스럽고, 별이 해주는 이야기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편집증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그들 입으로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소한 돌멩이 하나일 수도 있고,

새끼 숫양 한 마리일 수도 있으며,

당사자를 제외한 타인의 목숨일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점성술사의 예언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지.

다가올 운명을 들려주잖아?

맞이할 운명에 대한 답을 얻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야!

재키는 운명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믿지 않았지만, 어젯밤 시몬이 해준 이야기 덕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가 그랬지,

운명은 앎으로써 개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재키, 출발하자.”

이윽고 머릿기름을 발라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시몬이 우아한 몸놀림으로 말 위에 올라탔다.

이어 시몬의 박차를 시작으로 둘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나갔다.

* * *

길을 피해 한창 숲을 가로질러 가던 매튜는 잠시 쉬어가기 위해 작은 모닥불을 지폈다.

그리곤 잘 타지 않는 가지를 가져와 늘 지니고 다니는 컵을 매달아 놓은 그는 싸구려 커피를 끓여 유유자적한 시간을 만끽했다.

비록 세월이 그를 녹슬 게 만들었다 하나, 그만큼 축적된 경험으로 인해 우러나오는 그의 행동들은 젊었던 시절에 비해 틀림없이 능숙하고 노련했으리라.

아직 가족에 대해 수소문을 하는 입장이지만,

모든 이들의 눈길을 피해 그림자만을 밟으며 이동해야 했지만.

그에겐 촉박함 대신 여유로움만이 감돌고 있다.

구태여 근심하며 정신을 소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걸 진즉에 깨달았으니까.

되려 그는 가족들과의 재회를 확신한다. 불온한 생각으로 그 찬란한 재회의 순간을 갉아 먹히게 두지 않을 거니까.

커피를 한 모금 넘긴 매튜는 주름진 입술로 한껏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커피가 썼던 것일까,

아니면 떨어진 두 사람에 대한 것 때문일까.

“선택에 후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거면 된 거야…, 맥레인.”

푸념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매튜는 커피를 두어 모금 더 마신 뒤 미련 없이 바닥에 끼얹었다.

이어서 좀 더 편한 모습으로 바닥에 걸터앉은 그는 그 옛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낡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표지를 넘기고 첫 장을 넘기자,

곧 갈피에 끼워져 있던 바싹 마른 꽃잎 두 개가 그를 반긴다.

사냥꾼 일을 하면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서 받은 그 꽃잎은 매튜에겐 아련함의 증표 같은 것이었다.

메말라 맡을 향기도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에 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제 매튜는 원하는 쪽을 찾기 위해 갈피를 한 움큼 집어 넘겼다.

이내 나타난 갈피 속엔 그가 손수 그린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처럼,

매우 선명하고 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시몬, 그리고 맥레인과의 첫 만남.

그것은 이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순간.

시몬은 평민이었다.

바꿔 말하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산증인이기도 했다.

죄인이 된 이유도, 그저 빼앗기기만 해서 이루어진 결과였던 거다.

맥레인은…,

죽은 여인을 안아 들고 그 거대한 숲을 가로질러 사하린까지 걸어왔다고 했지.

어째서인지 스스로 새긴 듯 보이는 양팔의 끔찍한 흉터와 함께 말이야.

자리를 박차고 모험을 쫓아 나온 사냥꾼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던 평민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떠안은 기사가,

그날 그 자리에 모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오묘한 운명이 따로 없구나.

뭐라도 홀린 듯, 우리는 먼저 여인을 고이 묻었다.

특히 시몬이 가장 열성적으로 나서서 그녀의 안식을 도왔었지.

그다음은…,

뭐랄까, 그냥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내가 찌들은 설렘을 꺼내면,

시몬은 뜨거운 기구함을 내밀었고,

맥레인은 그 위를 복잡한 운명으로 덮었다.

어느새 우린 서로 나눈 이야기로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라니.”

매튜는 새삼 세월의 속절없는 빠름에 탄식했다.

망가져도 고칠 기회조차 주지 않고 흘러버린 세월은 심지어 되돌아보면 볼수록 빠르게 지나치네.

천천히 다음 장을 넘기자,

또 다른 그림이 나왔다.

조촐한, 그러나 자잘하게 내려앉은 햇살 하나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그려진 그 그림의 비석 부분엔…,

‘엘라’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실수와 주인 없는 책임만이 공허하게 떠도는 그녀의 죽음은,

지금의 시몬 바스티유를 만든 가장 강력한 계기였지만, 동시에 시몬을 변화시킨 사건이었지.

한참 과거를 회상하던 매튜는 이제 수첩을 닫고 모닥불을 죽여 이동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온다.

찌르르, 찌르르.

그리워 바라마지 않던 새 소리가.

“오, 세상에…, 별들이시여.”

보라색 꽁지깃을 가진 어여쁜 새는, 유리구슬이 박힌 한쪽 눈으로 매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늦은 밤.

한참을 이동한 시몬과 재키는 곧 마주한 작은 폭포 앞에서 멈춰 섰다.

돌담 같은 아담한 턱 위로 산산이 부서지는 물살엔 이따금 별 조각이 반짝였다.

이윽고 시몬이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던 찰나,

“기다리고 있었다.”

방울진 이슬이 굴러가듯 청명하고 가냘픈 목소리가 폭포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이내 곧게 뻗은 갈대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타난 한 여인.

보는 이로 하여금 광대가 살살 떨릴 만큼 아름다운 그녀가 처연한 눈빛으로 시몬과 재키를 마주한다.

오늘 아침 햇살이 아직도 묻어있는 듯한 새하얀 은발에, 물에 깎인 윤택한 돌의 표면처럼 매끈한 목덜미와 그 목덜미를 아찔하게 붙잡은 작고 곧은 어깨.

그 어떤 장신구도 걸치고 있지 않으나 이따금 흐르는 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받은 하얀 살결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걸치고 있는 푸른 후드는 딱 보아도 성인 남성만 한 창으로도 꿰뚫지 못할 것만 같은 신묘함이 뚝뚝 흘렀다.

이제 눈꽃과 같은 진한 회색빛 속눈썹을 들어 올린 그녀가 푸른 눈동자를 드러내며 말한다.

“그대들의 운명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재키는 정령이란 존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신묘한 존재와의 마주침에 익숙하지 않은 듯 굳은 얼굴로 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보았다.

반대로 시몬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럼 점성술사여, 말해다오.”

“그 전에, 너희 수중에 들어온 거대한 운명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뭐지?”

“찬란한 보석, 그 안에 감춰진 죽은 심장.”

그 말에도 시몬은 꿈쩍하지 않았지만, 재키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너희들은 그 심장에 대해서 알아야 해.”

“제리드 가문의 가보라는 건 알고 있다.”

“그 가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해냈는지는 모르겠지.”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푸른 눈에 별이 한가득 담겨 번쩍인다.

“궁금하지 않는가? 제리드 가문이 어떻게 철강왕이라는 이명을 거머쥐게 되었을까?”

“점성술사여, 밤은 아직 기니 부디 천천히 설명해주시게.”

이젠 시몬도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들은 산을 끓였다.”

“산을…, 끓여?”

“그래, 솟아난 암벽을 뚜껑 삼아서. 그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생명마저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제리드 강철’이야.”

“하지만 어떻게…? 난쟁이들의 도움을 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전혀, 그들은 산의 중심으로 향하는 땅굴을 파 자신이 가진 가보를 넣었을 뿐.”

시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가보라 하면…?”

“맞아, 용의 심장을 넣었다. 산을 끓인 건 그 심장의 박동이었어.”

“세상에…,”

이제 여인은 가녀린 팔목을 어루만지며 좀 더 느긋하고 진득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던 그 심장은 이제 하나의 운명을 붙잡아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디안…”

점성술사가 처음으로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런 이름이었구나.”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디안, 그는 자신의 운명을 두고 심장과 피할 수 없는 내기를 해야 해. 아니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기?”

여인은 대뜸 양팔을 벌려 천칭을 흉내 내듯 한쪽 손을 아래로 기울였다.

“심장은 그에게 필멸의 박탈을 선사해주고, 그는 그 특권을 경험할 때마다 심장에게 가진 운명을 빼앗기게 될 거야.”

“…아!”

시몬, 그리고 재키가 서로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이미 예전부터 쭉 봐오지 않았는가?

디안의 그 경악할 만한 치유력 말이야!

안드레와 같은 부류인 줄만 알았건만…,

이제 본질을 파악한 시몬은 본격적인 표정으로 대화에 임했다.

“해서, 그 말들의 정확한 요지가 뭐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가 심장에게 가진 운명을 팔 때마다 보여주었던 막강한 힘을?”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알겠어.

시몬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거스를 수 없는 급격한 감정의 변화나 필멸의 박탈을 꾀할 상황을 유도하게 된다면, 필시 그대들은 그토록 바라던 결정적인 패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거야.”

이후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시몬이 점성술사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해준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마주할 운명을 위한 답이었다는 소린데.”

“이해가 빠르구나.”

“그럼 이제 말해주지 않겠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무엇인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은 다시 한번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처럼, 푸른 안광을 번뜩인 그녀가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의 대들보인 너는 염원하던 따듯한 햇빛 아래서 대단한 사치를 부리게 될 것이다.]

[대들보의 열렬한 추종자인 너는 부족함 없는 사치를 부려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긍지마저 갖게 될 것이다.]

* * *

아침.

뚫린 창으로부터 너울거리며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떠 보니.

저 앞에 먼저 일어난 맥레인이 마른기침하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내게서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리는데,

그는 안도한 듯한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투박한 손가락 위엔,

정말 낯익은 새 한 마리가 걸터앉아 나와 맥레인을 번갈아 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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