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봉합
포드.
중립지역의 가장 굵직한 삼거리를 잡아먹고 그 몸집이 도시만큼 비대해진 정류소.
그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중립지역에 만연한 날것의 긴장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류소의 실권을 장악한 상인 조합이 법치라는 테두리를 둘러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법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가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통상적인 개념과 거리가 멀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명시한 법이라는 것이 딱 한 줄짜리 내용밖에 없었기 때문이란다.
‘당하면, 갚는다.’
포드엔 이렇다 할 경비병도, 그렇다고 안전을 위해 고용한 용병 나부랭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포드를 넘보지 못한 건,
바로 그 상권이 삼거리 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사방에서 몰려드는 이국의 유랑상인들과 그들이 쏟아내는 품목들이 삼거리를 기점으로 중립지역 전체에 퍼진다.
그러한 이동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포드의 상인 조합원들이다.
한마디로 무역의 박탈을 행사할 수 있는, 무법천지인 중립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게 그들이었다.
비록 뭣 모르는 삼류 무법자나 무너진 첨탑에서 도망쳐 나와 도적단 따위가 된 자들이 포드를 노리긴 했었으나,
그들 정도는 수배지 몇 장만 발부해 길거리에 뿌리면,
다음날 길거리에 매달려 말라가는 어패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나마 포드와 비견될만한 세력이라면 북부의 군벌과 남부의 유지를 꼽아볼 순 있겠지만,
즈라칸이 이끄는 군벌은 눈 속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터라 전해지는 이야기조차 희박할 지경이고,
세브리는 가지고 있는 영향력만으로 타국 귀족들과 관계하고 있었으니 딱히 손해를 보면서까지 포드를 넘볼 이유가 없다.
오히려 포드와 긴밀한 거래 관계를 구축했으면 했겠지.
물론 그마저도 남부가 한바탕 휩쓸려서 옛말이 됐지만.
그래서 결국엔 중립지역에서 제일가는 세력가가 포드가 아니냐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주자.
그들은 ‘상인 조합’이라고.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셈 하나뿐.
그들이 머리를 굴려 더한 숫자에 단일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포드는 유랑상인들에겐 기회의 땅과 같았는데, 무법천지인 이 중립지역에선 그 어떤 물건도 본래 값보다 더 비싸게 팔아 이문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끊임없이 포드에 마차를 끌고 오는 그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양도 대단했고, 그 때문에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거대할수록 그림자도 커지는 법이지.
포드엔 또 다른 별명이 있는데 그게 바로 ‘혈관’이다.
조합에 속한 상인들도 포드에 있는 골목길이 몇 개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외곽은 음지의 천국이라 불리지.
그렇다고 오입질하는 창부를 때리거나 잡부에게 화를 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거다.
그들도 종래엔 상인의 재산이니까.
…,
참으로 주도면밀하기도 하지.
아니,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안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곧바로 달려가 마중 나온 중년의 여인과 포옹했다.
“매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나 오피렛.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뺨을 맞대왔다.
이어 뒤따라 달려 나오는 조그마한 꼬마 아가씨가 대뜸 뛰어들어 내 품에 쏙 들어왔다.
“매튜 아저씨!”
“오, 비질라!”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포드 외곽.
언제나 달빛 없는 어둠이 내려앉는 곳.
간간이 고성과 교태가 들려오는 이곳에서 나는 헤어졌던 두 가족과 재회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재회도 아니겠지.
포키스와 만나 바로 포드로 달려오는 도중에 굉장히 기쁜 소식을 접했었다.
그의 새가 숲에 들어갔던 두 사람을 찾아냈다고.
그러니 이 순간에 모든 기쁨을 다 쓸 수는 없지.
“그나저나, 오히려 이런 곳에 숨어들 생각을 하다니.”
아직 남아있던 걱정을 내뱉으며 비질라를 안아 든 내게, 안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중립지역이라도 나이 든 여인과 어린 여아의 조촐한 동행에 그렇게 귀 기울이진 않으니까요.”
동시에 비질라가 꼭 안겨서 소리친다.
“거기다 산 하나를 끼고 포키스 아저씨가 계속 지켜줬는걸요!”
별도 말하면 빛난다더니,
짙은 회색 후드를 푹 눌러쓴 포키스가 멋쩍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튼,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매튜.”
“그래, 그래. 그러자.”
들어선 내부는 제법 그럴싸한 공간이 마련된 폐가였다.
포드의 외곽, 영원한 밤이 낀 이 음지엔 이런 폐가가 골목길 하나당 두어 개는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부랑아들의 집이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네 사람이 조촐하게 모여 앉으니,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가족들은 다 무사한 건가요?”
“케니 언니는요?! 안드레 오빠랑 촙 오빠랑…, 디안 오빠는요?!”
이어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들이 같이 씁쓸해하려던 찰나, 나는 포키스와 눈을 마주치곤 한껏 달아오른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지금쯤 맥레인과 디안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거야.”
“세상에!”
“정말요? 정말이에요?!”
그래, 이렇게 모이는 거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키스가 있는 이상 이제는 정말 시간문제야.
벌어진 가족의 봉합 말이야.
“안나,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야. 지금 상황이 좀 어때?”
숲으로 달아난 우리와는 달리 정보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포드에 숨어든 그녀라면 알고 있는 것이 많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배후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두 명의 발언가가 시몬 바스티유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그런가,
하긴 우리가 한바탕 진창 냈던 곳이 대부분 배후 격에 해당하는 상대들이었었지.
그리 놀랍지도 않아.
“지명수배 역시 떨어졌지만, 그와 관련해서 이래저래 말이 많아요.”
“말이 많다?”
“많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시몬 바스티유의 자취를 쫓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앤서니 트와드가 목격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마찰이 있었데요.”
“그럴 수밖에, 앤서니 트와드 입장에선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일 테니까. 그뿐만이 아니야. 거기서 우리와 마주친 자들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용케 통제를 해내고 있는 걸 보면 앤서니는 꼭 본인 손으로 우릴 해결하고 싶다는 거겠지.”
자본가에게 가장 값진 것은 재물도, 땅도, 쌓은 업도 아닌 자존심이니까.
그 자존심 덕분에 우리가 시간을 벌게 되었지만, 글쎄.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그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뜻일 테니 전혀 예상치 못한 압박이 될 수도 있겠어.
어찌 보면 디안이 합류한 직후 우리가 했던 그 ‘건수’들이 교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네.
사실 목격자는 앤서니 트와드 뿐만이 아니야.
라티아에서 마주쳤던 그 쟁쟁한 세력가들의 눈은 장식이 아니잖아?
하지만 상황이 그래.
나서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거지.
어느 멍청이가 라이튼과 티바르 제국 앞에서 당신들 금화를 빼먹은 자가 나요, 하고 말하겠냐는 거다.
자 다시 가족 이야기로 돌아와서,
“포키스.”
“네, 매튜.”
“새를 날려 연락책인 조이와 아엘라에게 전해라. 절대로 머리 내밀지 말고 철저하게 숨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부정하라고 말이야.”
타지에서 고생하는 우리 가족들부터 챙겨야지.
조이의 성격상 우리를 이 땅에 내보내기 위해 목숨을 걸려들 테고 마찬가지로 서기로 위장하고 있을 아엘라도 어린 치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고를 칠 게 분명해.
“가족이 모이면 곧바로 동쪽에 있는 아크쉐로 이동할 거야, 지금은 돈보다 우리가 영위할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게 다다.
이 행동에 힘을 실어줄 시몬만 있다면 모든 건 순식간에 진행되리라.
이후 셋에게 간략하게 내가 아는 것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이 담아왔던,
가족의 죽음을 담담히 고백했을 때.
그들은 기꺼이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었다.
엔제이,
너는 이제 없지만,
우린 너를 간직했다.
* * *
좀처럼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건 맥레인도 마찬가지였는지, 항상 시달리던 기침조차 내뱉지도 않고 매섭게 고삐를 놀렸다.
그 심정을 아는지, 벤투스는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고 덕분에 내 말은 욕지기할 만큼 숨을 뱉어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초원에 덩그러니 놓인 목장에 잠시 멈춰 선 우리는,
그곳의 성격 좋은 주인에게 음식과 우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거야 원, 나는 당신들이 바람인 줄 알았소. 그래서 오늘도 마법사들의 변덕이 시작되는구나 했다니깐?!”
푸근한 말투로 과장된 손짓을 하며 말을 하던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노랫말이 떠오르네.
“해서 베푸신 호의가 저희에겐 더욱 값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그렇구먼? 그럼 나야말로 지나가는 바람을 잠시 붙든 격이니 운수가 좋다고 해야 하나?!”
당신도 그 노래를 아는군요, 멋들어지게 장단을 맞추는 걸 보면요.
이내 목장주가 말을 보러 가기 무섭게 우유를 들이켠 맥레인이 내게 물었다.
“그건 무슨 노래냐?”
“유이 진거의 운을 주제로 한 좋은 날이란 노래에요.”
“생각해봤는데.”
“뭘요?”
“무법자 때려치우면 노래나 한번 불러보려고.”
이어 맥레인이 흠칫하며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본 그가 되려 놀란다.
“왜요, 비웃을 것 같았어요?”
“응.”
“전혀요, 오히려 궁금한데요. 제대로 노래 부르는 맥레인 모습이요.”
“아마 깜짝 놀랄걸.”
넋두리하듯 내던지는 그의 푸념에.
나는 슬쩍 울컥한 마음으로 따지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버텨요.”
맥레인은,
그런 내 말에 담담한 침묵으로 답할 뿐이다.
“끝까지 살아서 노래 배우라고요. 제가 다 알려줄게요.”
꾸역꾸역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벅참을 뱉어버릴 것만 같아 얼른 우유를 쑤셔 넣은 나는 차갑게 식힌 머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어보인다.
“슬 출발하자.”
“네, 맥레인.”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목장주가 헐레벌떡 우리에게 뛰어왔다.
“세상에, 지금 내가 본 게 맞는 건가? 아직도 믿기 지가 않소! 이런 세상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부들부들 떤 목장주는 말까지 더듬으며 우리의 말문을 닫아버렸다.
“저…저 말! ‘프레쳅스’가 아니오?! 3대 명마라 불리는 그 위대한 프레쳅스으으!!”
지금까지 검을 배우느라 말에 대한 지식은 오리무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쳅스라면 어렴풋이 알고는 있어.
세공소에서 배웠던 알량한 지식 가운데 분명 있었던 단어였고, 심지어는 노랫말에도 심심찮게 들어 있었다.
해서 놀랍구나.
벤투스,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내 상상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었네.
웬일로 맥레인은 목장주의 호의에 보답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소, 프레쳅스.”
“혹 저 존귀한 말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벤투스.”
“세상에, 이름마저 대단하구려…!”
이윽고 맥레인은 휘파람을 불어 벤투스를 불러들였고, 그런 벤투스에게 홀린 듯 내 말이 쫄래쫄래 뒤따랐다.
목장주는 다가오는 벤투스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이에 맥레인은 그가 보인 호의에 보답하려는 듯,
“벤투스, 인사해라. 이 무법지대에서 널 알아봐 준 사람이다.”
벤투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고,
이어 초롱초롱한 눈을 치켜뜬 벤투스는 목장주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고마웠습니다.”
방방 뛰며 목청껏 인사를 건네는 목장주를 뒤로한 채 우리는 다시 달려나갔다.
그렇게 주위의 풍경을 얼마나 뭉갰을까.
눈으로 흐리멍덩한 수채를 족히 수천 점은 완성했을 즈음.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떨어진 태양에 벌겋게 질린 하늘 아래, 세 길목으로 밀고 들어오는 끝없는 행렬을 품은 거대한 상권.
포키스의 새로부터 언질을 받고 도달한 목적지는,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