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봉합 (3)
비록 어디에 누워도 편할 곳 없는 폐가였지만,
반대로 어디에 누웠든 잠을 청하는 내 맘은 편하기만 하다.
이 평온함,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그랬던 걸까.
언제 어느 시점에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 버린 것 같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창가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도, 그 안에 체류하며 뛰노는 먼지도 보이지 않는 아직은 어두운 아침이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잘 잤니, 디안?”
낡은 부츠를 닦고 있던 매튜 아저씨가 날 보며 인사한다.
그런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누운 자리 머리맡을 보니 책을 부둥켜안은 채 잠들어있는 비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따듯한 냄새가 솔솔 풍겨나는 걸 보니 안나 아주머니도 이미 일어나 계신 것 같고.
그제야 이 뭉클한 평온함이 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은 나의 평온이다.
그들이 있는 그곳이 이 같은 폐가라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행복하다고 말할 자신이 있다.
“매튜, 맥레인과 포키스는 안 보이네요?”
“혹 도움 될만한 정보가 있는지 아침 일찍부터 나갔단다.”
자연스럽게 매튜 아저씨의 옆에 앉아 다른 이의 낡은 신발을 집어 든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러자 매튜 아저씨는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도 씁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참, 디안. 맥레인의 기침이 아침부터 부쩍 심해졌더구나.”
어제는 재회를 만끽하느라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매튜 아저씨는 맥레인의 결정을 존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날 속이셨었지.
하지만 원망은 하지 않는다.
원망 대신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씁쓸함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맘이 아플 뿐.
그래서 난 일부러라도 더욱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포드라면 맥레인을 치료해 줄 자가 분명 있을 텐데.”
저도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줄곧 그 생각부터 했어요, 매튜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 주겠니?”
다 닦은 신발을 막 내려놓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뒤돌아 매튜 아저씨에게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의자 위에 걸어 놓은 어스름을 집어 올렸다.
“얘, 디안! 밥은 먹고 가야 할 거 아니니?”
음, 안나 아주머니의 말씀을 거스를 수는 없지.
* * *
비질라는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 위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아랫입술을 깨물어 자신의 기억을 더듬다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싶으면 눈썹을 지켜 뜬 채 다시 그리기에 열중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몰래 등 뒤로 다가가 보려 해도,
작은 귀를 쫑긋 세우며 반응한 비질라가 아직 보면 안 된다며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다리길 몇 분.
비질라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자, 디안 오빠.”
그러면서 내게 넘긴 종이 안에는,
분명 앳된 소녀의 삐뚤빼뚤한 정성이 들어가 있었지만, 단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건…,”
여느 전문가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정보량으로 구성된 지도.
비록 한 구역에 한정하여 만들어진 지도이지만,
글쎄, 비질라에게 포드 전체를 돌아다닐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지도의 규모는 더욱 커졌을 거다.
안나 아주머니와 같이 이 거리를 돌아다녔던 기억을 모조리 꺼내 담아내 줬구나, 비질라.
나도 암기로는 꽤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야 원, 비질라의 암기력과 비교하면 태양 앞에서 별빛 내세우는 꼴이네.
“정말 고마워, 비질라. 큰 도움이 되겠어.”
“응!”
비질라가 그려준 지도를 고이 접어 벨트 주머니에 넣고, 안나 아주머니가 장만해놓으신 새 셔츠를 입은 나는 마지막으로 검집에 물린 셀레어를 벨트에 고정해 묶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매튜 아저씨가 슬쩍 안나 아주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안나, 그래도 그렇지 아마포로 만든 셔츠를 입히다니. 저 골목길에서 이 셔츠의 깃이 조금이라도 보였다간 다들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안나 아주머니는 오히려 단호하게 대꾸하신다.
“우리 가족이 입을 옷인데, 싸구려를 입힐 순 없잖아요?”
“그보다 저 비싼 걸 사느라 그동안 자네가 궁핍했을 거 아냐?”
그 말에 안나 아주머니는 그저 해맑게 웃기만 하셨다.
이럴 땐 안나 아주머니 편이 되어주어야지.
“매튜,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후드를 걸치고 다닐 거라 노출되지는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벨트에 달고 다녔던 작은 주머니를 끌러 안에 있던 금화 하나를 꺼내 들자 매튜 아저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건…?”
“매튜 아저씨야말로 본인의 궁핍함보단 가족을 살피셨잖아요.”
라티아에서 그가 미소와 함께 건넸던 금화가 아직도 기억에 아른거린다.
매튜 아저씨도 이내 기억이 났는지 피식 웃으며 군말 없이 내가 내미는 금화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그의 미소를 뒤로한 채 밖을 나섰다.
* * *
비질라가 그려낸 지도는 전체적으로 파이의 한 조각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 속엔 막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 양방과 사방으로 뚫린 복잡한 미로가 한가득이다.
그러한 미로 곳곳엔 여러 표시가 그려져 있었는데,
비질라는 그 표시에 대한 정보를 오른쪽 구석에 정성스레 정리해놓았다.
엑스 표시는 연금술사가 운영하는 기상 화합물 상점.
체크 표시는 원정대가 운영하는 식당.
동그라미 표시는 대형 기업의 사업장.
마지막으로 십자 표시는 의약을 취급하는 곳인데,
아쉽게도 지도 내엔 십자로 표시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의 지명이 ‘긴 밤’인 것을 보면,
그리고 지금 막 밖에 나서기 무섭게 간간이 들려오는 고함과 난잡한 신음을 생각하면 양지에서 쉬이 볼 수 있던 간판을 발견한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찾기 위해 이 구획을 벗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히 무리해서 감당치 못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일단은 이 구획을 더 철저하게 돌아다녀야겠어.
후드를 푹 눌러쓰고 빠른 발걸음으로 첫 골목길을 지났다.
정돈된 기색 하나 느껴지지 않는 울퉁불퉁한 바닥, 곳곳에 언제부터 고여있었는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는 웅덩이.
뚝뚝, 어느 곳에서 떨어지는지 알 길이 없는 물방울과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이 불가한 넝마 같은 부랑자들.
약에 취해 온몸이 벌겋게 상기된 채 나를 노려보는 건달과 그 옆에 붙어 기다랗게 말린 연초를 피는 여인.
첫 골목에서 본 것은 그게 전부였다.
이윽고 다음 길목에 접어드니 이번엔 제법 큰 길이 나왔다.
그곳에선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북적거림도 느껴져 어쩌면 뭐라도 건질 수 있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달한 곳엔 꽤 많은 좌중이 모여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독점하다시피 한 단상 위, 요란한 복장의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좌중에 인사를 건네며 외쳤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은 길었던 기다림을 충족시킬 만큼 대단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지요. 그 말인즉슨 내일도, 모레도, 글피에도 만나지 못할 수 있는 기약 없는 한정판이란 소립니다!”
남자의 말에 몇몇 흥분한 난쟁이가 휘파람을 불며 호응했다.
딱 보아도 단상 위 남자가 고용한 끄나풀 같은데, 그 효과는 아주 톡톡해서 이내 모두가 박수치며 환호했다.
곧이러 남자가 물건을 덮고 있는 천을 거두자,
나는 있는 힘껏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거두어진 천 너머로 드러난 것은 다섯 개의 유리관이었다.
그리고 그 유리관 속엔 귀 큰 자, 인간, 난쟁이 같은 다양한 종족이 발가벗은 채로 갇혀 있다.
그런 그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 보여.
딱 보아도 극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언제 눈을 감고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여든 좌중은 전시된 그들을 보며 오히려 더 크게 환호할 뿐.
이제, 남자가 열변을 토하며 말을 잇는다.
“첫 번째는 칸디카스 병입니다. 아시다시피 저 멀고 먼 늪 바다를 건너온 귀한 질병이지요. 피부엔 비늘 같은 경화된 종기가 돋아나고, 동공은 푸르게 물들어 ‘청어병’이라고도 불립니다.”
설마 질병을 사고파는 건가?
저것마저도 누군가의 사치 일부분에 속하는 거야?
“두 번째는 무려 ‘베루눔’입니다. 그 희귀의 정도가 엄청나다는 사상병의 일종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물건은 지금 우울을 잉태한 상태입니다!”
아침을 잃은 거리 아래, 그에 걸맞은 경매라고 밖엔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금화 스무 개, 칸디카스 병을 사겠어.”
이어서 손을 든 자가 걸친 잿빛 후드 속에서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에,
일순간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몇몇 시선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딱 보아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의 생각까지 읽힐 정도였지만.
이내 그녀 옆에 우직하게 서 있던 덩치 큰 사내의 존재를 깨달은 그들은 얼른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허리춤에 두꺼운 철퇴를 매고 있던 그 사내는 마음만 먹으면 시선을 보낸 자들 대부분의 머리통을 쪼갤 수 있을 것같이 보였으니까.
그렇게 수월하게 물건을 낙찰받은 여인은 남자와 함께 바퀴 달린 유리병을 끌며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보았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휘날린 후드 속,
드러난 그녀의 옷을.
그것은 분명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한 소녀의 긴 꿈을 깨웠던 때.
맞아, 확실해.
그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입었던 케니의 옷과 똑같이 생겼어.
그렇다면 저 여인은 ‘디펠리스의 간호사’일 가능성이 있다.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 뛰어가는데,
굽이진 골목길에 접어들기 무섭게 갑자기 내 앞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부웅.
짓눌려 터져 나온 바람 소리와 함께, 간신히 피한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것은.
거대한 철퇴.
“움직임이 제법 쓸만하군, 하지만 더는 따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너에게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다.”
“그녀에게 물을 게 있습니다. 제겐 절박한 문제가 있거든요.”
내 말에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짧게 뻗친 검은 머리.
그 아래, 수십 개의 흉터가 어지러이 수 놓인 우직한 인상의 얼굴.
“너 같은 자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나 내가 모시는 분은 그런 사정을 모두 봐주실 만큼 한가로운 분이 아니야.”
“그럼에도 꼭 말을 나눠봐야겠습니다. 그만큼 제 절박함이 크니까요.”
“마지막 경고다.”
슬슬 남자가 행동에 방해되는 듯한 후드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 안에 드러난 것은,
범상치 않은 가죽과 철판으로 덧대어진 브리간딘.
그리고 가슴팍에 수 놓인 그림은 딱 보아도 깃발에 쓰는 상징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섬 없이 그 앞에서 어깨를 폈다.
그는 이제 망설임 없이 내게 다가와 철퇴를 휘둘렀다.
유연하게 돌아가는 손목,
그에 맞춰 거대한 철퇴가 원을 그리며 내게 쇄도했다.
이에 맞춰 어스름을 흩날리며 나아간 나는 허리춤에 있던 셀레어를 뽑아 그의 철퇴를 가로막았다.
“…놈!”
내게서 나오는 반발력에 범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남자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경악스러울 만한 힘으로 날 밀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겐 탐스러운 발판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반발력을 몸에 품은 채 한쪽 발을 주축으로 몸을 돌려 이내 휘두른 검 끝으로 받은 모든 반발을 환산하여 그에게 돌려주었다.
까각!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나와 그 사이에 튀기는 한 줄기 불꽃.
되려 한 걸음 물러선 남자의 표정엔 순간 당혹이 묻어 나왔다.
그렇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그만 하세요, 부탁드립니다.”
저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얼른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했다.
“베즈나르, 그대도 이젠 알지 않는가. 죽음을 각오해도 그에게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는 걸.”
“그렇다 한들 저는 수호기사입니다…,”
남자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아까와는 다른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난 얀츠의 기사 베즈나르다, 그대가 누구인지, 무슨 업을 가지고 살아왔는진 모르겠지만…,”
이윽고 그 거대한 산 같은 남자가 짧게 고개 숙여 내게 인사한다.
“그대의 실력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