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87화 (87/365)

87화. 봉합 (4)

“따라오시지요.”

여인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뒤따르자 내 뒤로 기사 베즈나르가 경계심을 잔뜩 드러낸 채 바짝 따라붙는다.

그렇게 골목 하나를 벗어나자,

베즈나르 뒤로 또 다른 남성 하나가 자연스레 따라붙었고, 다음 골목에선 여성 하나가 추가로 또 붙어왔다.

그들은 베즈나르와 같이 나를 향한 경계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는데, 그 모습을 보아하니 베즈나르와 같이 저 여인을 지키는 기사들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윽고 앞장서던 여인이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 차분함을 쏟아냈다.

“델, 하이즈. 물건을 아래층으로 옮겨주세요.”

“알겠습니다.”

“수행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베즈나르 뒤를 따르던 두 남녀가 동시에 고개 숙이며 답하고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지듯 움직였다.

“들어가시지요, 저희가 마련한 임시 거점입니다.”

이내 뒤집어쓴 후드 속, 작게 드러난 여인의 하얀 턱선이 문을 가리켰다.

이에 나는 군말 없이 그녀의 턱짓을 따라 낡고 허름한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기사가 호위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 듯싶은 게,

안으로 들어선 건물 내부는 비록 최소한의 구색만을 갖춰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색 하나하나를 따지고 봤을 땐 하나같이 이곳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물건들뿐이었다.

“차를 드릴까요, 커피를 드릴까요?”

여인은 자연스레 작은 유리병 안에 든 불씨를 철판에 쏟아 그 위에 물 담긴 쇠 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장작 먹인 불꽃이 아닌 연금술사의 파편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걸 보니, 슬슬 궁금한 점이 생기는데.

디펠리스의 간호사는 대관절 무엇이기에 개개인이 저 정도의 영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하는 거지?

“전 괜찮습니다.”

꾸역꾸역 밀려 올라오는 궁금증을 억누른 내게 여인은 오히려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밤에서 건져 올린 듯 진한 검은색 머리카락, 그 아래 정숙함이 묻어나는 둥그스름한 눈매 속엔 어두운 청금석이 반짝이는 여인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부분 넋을 놓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차피 저의 시간을 빼앗으러 오신 거 아닌가요?”

그러나 그녀는 곧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게 급히 사과했다.

“베즈나르의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그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베즈나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해서, 어느 가문에서 오셨는지요? 아직 인챈트를 수여 받지 못했다곤 하나 곧 기수가 되는 베즈나르를 이토록 압도하신 것을 보면 에인츠 가문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전 깃발이 없습니다.”

삐이이.

쇠 주전자에서 끓는 소리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여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조심스레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넘겨 그녀에게 얼굴을 보였다.

달그르르.

이제 쇠 주전자가 뜨거움에 겨워 춤을 추듯 들썩이다가.

베즈나르가 급히 그것을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을 때.

여인은 일순간 뺨을 붉게 물들이며 내 눈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깃발이…, 없다니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뺨에 얹은 새빨간 노을을 털어낸 그녀가 내게 묻자,

나는 앞서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깃발이 없습니다. 중립지역 사람이지요.”

“그…그렇다면 귀족도 아닌데 어찌 저를…?”

“그 복장, 디펠리스 수도 간호사의 복장이 아닙니까?”

여인은 잠시 자신이 걸친 옷을 살피더니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 디펠리스 수도의 수습 간호사입니다.”

됐어,

그녀라면 분명.

“저를 도와주십시오. 가족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부탁하자, 그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는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리를 해서 제게 부탁을 하셨군요?”

베즈나르가 조심스레 뜨거운 차가 담긴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자 찻잔에서 모락모락 핀 김이 나와 그녀 사이를 흐리멍덩하게 갈라놓는 것 같아, 대번에 몸을 숙여 그녀 앞에 놓인 잔을 옆으로 획 치우며.

“그만큼 절박하니까.”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상황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애초에 난 성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리고 당신은 지금 제게 뭘 요구할 입장이 안 됩니다.”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내 시선을 급히 피하고는 아랫입술을 벌벌 떨었다.

이에 베즈나르는 턱 근육이 갈라져 도드라질 정도로 어금니를 씹은 채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의 철퇴와 처음 맞부딪쳤을 때부터 모든 가늠이 끝났다.

그는 날 이길 수 없고,

난 그에게서 패배할 수 없다.

그런 확신을 담은 얼굴로 베즈나르를 올려다보자,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분노를 애써 삼켜야만 했다.

“그리 부담스러운 요구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저 늘 그랬듯 아픈 사람 하나를 진찰해주시면 돼요.”

정중하게 이어진 내 부탁에 여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그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제아무리 디펠리스라고 해도 생사에 있어 만능이 될 순 없습니다. 신이 아니니까요. 거기다 저는 아직 수습입니다.”

겸손을 내보이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곧 당돌해진 표정으로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저조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귀족에게 진료를 요청받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지요. 당신이 보여준 절박은 분명 값져 보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제 쓰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래, 그 행동이 그녀로선 가장 타당한 것이겠지.

내 절박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에 기반한 거니까 수가 틀려도 내 쪽에서 그녀를 위협할 리는 없다고 판단한 거다.

저 여인, 굉장히 영리해.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갑자기 절박한 표정을 짓는 그녀가 역으로 내게 고개를 내밀어 간청했다.

“이틀간 제 경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약속만 해주신다면 지금이라도 그 부탁 들어드리겠어요.”

이틀이라.

“기간은 확답드릴 순 없지만, 가능한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그 차분하고 도도했던 인상은 어디 갔는지 쾌활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걸로 거래가 성사된 거겠지요?”

“좋습니다.”

난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제야 베즈나르도 잔뜩 머금고 있던 긴장을 풀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되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문 곁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베즈나르가 대뜸 앞길을 막아섰다.

다만 그의 그런 행동에 적개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첫 단추부터 제가 잘못 꿰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짧은 시간 동안 저와 목표를 공유하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의 그 살벌한 눈빛은 어디 가고, 그녀와 거래를 체결하기 무섭게 돌변한 모습을 보니.

정말 수호기사라는 직책에 딱 걸맞은 인물이로구나.

죽음을 불사하는 충성심이라는 미덕도 간직한 그가 제법 밉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에게서 어떠한 동경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것 같네.

맥레인이 해준 당신의 옛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런가.

만약에 나도 갑주를 걸친 기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하곤 해.

베즈나르는 그런 내 상상에 가장 부합하는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맹목적이어서 바보 같지만, 그것이 영광이라 믿는 그런 거 있잖아.

맥레인이 에르엥이라는 기사에게 보였던, 그리고 에르엥이 맥레인이라는 기사에게 보였던 것처럼…,

잠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탓에,

한참 내게 손 내밀고 있던 베즈나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싶어 바로 그의 손을 맞잡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껏 화답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반대로 나를 향한 동경을 머금은 채, 씩 웃어주었다.

* * *

드러난 굵직한 팔뚝에 빼곡히 들어찬 문신.

검은색 가죽 허리띠엔 검은 머스캣이 붙들려 있고, 반대편엔 짧은 아밍 소드 한 자루가 검집에 물려 있다.

그의 앞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정 둘이 남자 하나를 끌고 와 낡은 의자 위에 앉히곤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

“나…난 정말 해줄 말이 없다고! 부탁이야, 내…내가 뭐든 할게! 이중 첩자가 되라 하면 할게!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찾아준다니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미친 듯이 열변을 토했지만,

팔을 걷어붙인 남자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의 속박 작업이 모두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팔을 걷어붙인 남자가 뒤돌아 그를 내려다본다.

그에 맞춰 의자에 묶인 남자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평생 시궁에서 살아온 것 같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함.

이따금 메마르고 가는 입술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

강인한 턱과 솟은 광대.

그 위로, 안구 전체가 검게 물들어 섬뜩하기 그지없는 안광을 내뿜는 얼굴.

“히…히이이!”

가히 끔찍한 시체나 유령을 맞이한 것만 같이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가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그저 자신을 옥죄는 무결한 속박의 정도를 상기시켜줬을 뿐.

이제 팔을 걷어붙인 남자가 거대한 상체를 쏟아내듯 허리를 숙여 의자에 묶인 남자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한다.

“앤서니의 쥐새끼야, 내가 원하는 대로 찍찍거려주면 평생 온전하게 뛰노는 쥐새끼가 될 수 있도록 약속할게.”

“마…말했잖습니까아아…! 제가 나서서 찾아드리겠다고요!”

“우린 너 같은 쥐새끼의 안내를 받을 만큼 한가롭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나 글로 표현이라도 해내란 말이야.”

“이…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제발!”

팔을 걷어붙인 남자는 더는 들어볼 것 없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턱을 까딱였다.

그러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정 둘이 생쥐 한 마리와 철제 통 하나를 각각 들고서 다가왔다.

이어 생쥐를 철제 통에 집어넣은 그들은 통의 입구를 남자의 배로 덮어버렸고,

동시에 팔을 걷어붙인 남자는 헤죽거리며 쭈그려 앉아 철제 통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대고선 검지와 중지를 비벼 튕겼고, 곧 그의 엄지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일어나 춤을 췄다.

“마치 통 안에 쥐새끼가 딱 네 모습 같네, 그렇지? 그런데 이 시점에선 너보다 이 통 안에 쥐새끼가 먼저 자유를 되찾을 것 같은데? 어때 너희들의 생각은?”

그의 말에 양옆에서 거들고 있던 두 장정이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놈의 드러난 척추뼈 너머로 쥐새끼가 자유를 만끽하겠지요.”

“그거 알아? 쥐새끼의 치악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거 말이야, 살아 숨 쉬는 와중에 공기가 들어찬 폐가 뜯기는 건 어떤 기분일까?”

살벌한 둘의 언행에 남자는 이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철제 통 안에 들어있던 생쥐는 슬슬 뜨거움을 느꼈는지 찍찍거리며 울었고,

이내 시간이 좀 지나자,

“아…아아아! 아아악! 잠깐 잠깐! 제발요 잠까아아안!!”

자신의 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자에 묶인 남자는 극렬하게 발작했다.

“누우우운! 눈! 눈!”

“뭐, 눈?”

“눈! 눈! 그들이 내 눈에 놈들 얼굴을 그렸어! 앤서니가 그랬어!”

그럼에도 두 장정이 배에 가져다 댄 통을 치우지 않자,

묶인 남자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몸부림쳤다.

“말했잖아! 말했잖아! 씨발, 말했잖아아아!”

팔을 걷어붙인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에 맞춰 두 장정은 남자의 배에 대고 있던 통을 떼어냈다.

그 안에 있던 쥐는 금세 통 밖을 뛰쳐나와 도망쳤고, 드러난 묶인 남자의 배는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눈? 그려?”

이어지는 남자의 심문에 의자에 묶인 남자는 이제 다 포기한 듯 털어놓았다.

“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꺼풀을 뒤집어쓰면 눈동자에 묻은 햇살이 보이잖습니까…, 그런 원리를 이용해 제 눈동자에 그림을 그려놨습니다…, 시몬 바스티유의 핵심 일당의 얼굴들을 말입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앤서니가 풀어놓은 정보원 모두가 다요!”

그의 고백에 팔을 걷어붙인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눈동자에 특정 모양으로 햇살을 담을 수 있도록 음각을 해버렸다는 건가? 하여간 기업가 새끼들이란.”

이어서,

중얼거림을 멈춘 남자는 거리낌 없이,

묶인 남자의 눈알을 맨손으로 뽑아버렸다.

이제 갓 뽑아낸 눈알을 손에 거머쥔 그가 두 장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순례자들이여, 슬 사냥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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