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봉합 (5)
이른 아침.
필요한 장비들을 갖추고 어스름을 뒤집어쓴 나는 이젠 익숙한 모습으로 건물 밖을 나섰다.
그런 내 앞에,
밖을 서성이던 매튜 아저씨가 날 보며 반기셨다.
“출발하는 거니?”
“예, 매튜.”
“어제 너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 좀 놀랐단다. 디펠리스의 간호사가 이런 곳에 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어제는 시간이 늦어 모든 걸 다 설명해드리지 못했지만…,”
매튜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지으셨다.
“아니, 내게 모든 걸 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 디안. 넌 이미 내게 있어 걱정되는 가족이 아닌 자랑스러운 가족이니까. 조언이 필요하다면 이 늙은이가 뭐든 말해줄 수는 있다만, 네 일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내 역할은 그저 너를 열렬히 응원해주는 것 하나뿐이야.”
오늘도 어제와 같이 이 골목길에 한줄기 햇볕도 안 들어오겠구나 싶었는데, 지금 내 앞에 반짝이며 내리쬐고 있구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참.”
매튜 아저씨는 생각났다는 듯 나를 재차 불러세웠다.
“맥레인과 포키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의 말대로,
어젯밤 맥레인과 포키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디펠리스의 간호사와 거래를 마치고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나 바로 다시 돌려보내야만 했다.
“네가 괜한 걱정을 할까 말은 하지 않았는데, 맥레인이 포키스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거든.”
매튜 아저씨는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어디 이름 모를 술집에 처박혀 있을 거다. 오늘 중으론 꼭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그는 내게 손을 흔들며 자신 때문에 지체된 내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굽이진 골목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맥레인은 포키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혹 자신의 몸 상태에 관해 포키스에게 털어놓기로 결심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것 같진 않아.
가족들 가운데 맥레인과 포키스는 처음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려는 성향을 줄곧 보여줬으니 말이야.
내가 아는 맥레인은 자신의 몸보다는 가족들의 안위를 더 살필 사람이니까.
바보같이.
* * *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날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불쑥 다가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직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네요. 뭐, 어제는 경황이 없었으니…, 저는 디펠리스의 수습 간호사 유리 벳즈라고 해요.”
“디안.”
내 대답에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자 두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립지역 사람이니 역시 소개할 건 이름 하나뿐이로군요.”
그 말엔 비아냥보단 뭔가 어렴풋한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말에 내가 괜히 오해할까 싶어 그녀는 잡은 손을 붕붕 휘두르며 갑자기 빨라진 말투로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까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로구나 라는 뜻이에요 내 말은!”
자유인이라.
반대로 나는 그녀에게서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이곳의 자유는 갈피가 없는데, 그녀는 중대한 갈피를 잡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베즈나르를 통해 보여준 실력을 생각하면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어요.”
“괜찮습니다. 둘 사이에 일방적인 무례는 없었으니까요.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에게 안 해도 되는 위협을 한 것 같아 이 기회를 빌려 사과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묶인 매듭 하나가 풀린 듯싶어,
그녀의 얼굴이 한껏 밝게 펴졌다.
“베즈나르는 원래 신중하고 점잖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특히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일단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지요.”
짙고 두꺼운 눈썹을 마치 토끼 귀 움직이듯 움찔거리던 그녀는 주위를 살피고는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녀는 이번엔 나를 거처의 숨겨진 입구로 통하는 지하실로 안내했다.
동시에 유리의 눈짓에 베즈나르는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입구에, 나머지 둘은 들어왔던 정문 쪽에 우직하게 서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윽고 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오니, 그녀는 하얀 천을 무언가에 적시곤 내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자 그녀는 똑같이 다른 천을 어떤 액체에 적신 뒤 자신의 코와 입을 가렸다.
“숲 안개와 허브를 물과 섞은 겁니다. 숨쉬기가 불편하겠지만 꼭 이렇게 하셔야 해요.”
그녀를 따라 젖은 흰 천으로 입과 코를 막으니 정말로 습습한 안개가 내 안면에 맞닿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향긋한 허브의 향기가 탁했던 호흡 감각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 같아 버틸 만은 해.
이제 유리는 무언가를 덮어놓은 자루를 치워 그 내용물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분명 어제 내가 봤던 것 중 하나다.
거대한 유리관.
그 안에 난쟁이 하나가 박제되다시피 한 모습으로 갇혀 있다.
이미 숨을 거둔 건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허옇게 질린 동공으로 섬뜩함을 흘려내고 있었다.
“제가 포드까지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포드는 질병까지 거래되는 몇 안 되는 곳이니까요.”
이어서 유리는 관 위쪽 뚜껑을 매만지며 설명을 이어갔다.
“포드 외에도 이런 종류의 물건까지 취급하는 캐러반과 기업이 있지만, 그쪽은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절 쫓는 무리가 특정 단체와 결탁해 그 세가 강해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해서 그들조차 쉬이 연줄을 만들기 힘든 이 중립지역을 골라 머나먼 길을 온 겁니다.”
“정확히 당신이 하려는 일이 뭡니까?”
“생화학 무기의 탄생을 저지하려 합니다.”
유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을 옥죄듯 팔짱을 끼었다.
“터쉬 제이스라는 기업이 이 유리관 안에 있는 질병인 칸디카스를 이용해 생화학 무기를 만든다는 첩보가 들어왔어요.”
“해서 당신이 파견을 나온 것이로군요.”
디펠리스의 간호사들은 내 상식 선상에 있는 간호사와는 개념이 많이 다른 것 같네.
“칸디카스 병을 이용해 치료제를 만들라는 디펠리스 병원의 명령이 떨어져 제가 이렇게 파견을 나왔죠.”
그녀는 슬픈 눈으로 위층 계단을 흘겨보며 한껏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저를 지키기 위해 디펠리스와 ‘협약’을 맺은 가문에서 기사를 파견시켜주었지만…, 일곱이었던 숫자도 이젠 셋이 되어버렸군요.”
자책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저들은 그저 맹세한 것을 지키는 것뿐이고, 당신 역시 당신의 신념으로 움직이는 거잖습니까.”
“마치 여느 기사님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녀의 말에 순간 내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맥레인의 과거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맥레인이 해준 과거 이야기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맹세와 신념이 결코 인격 위에 올라설 순 없는 법이지요. 제 의무감이 얼마나 막중하든, 당장에 느껴지는 우울함과 무기력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래, 그녀의 말이 맞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직후 담담한 말투로 질문을 이었다.
“그전에, 유리. 저는 중립지역이라는 우물 속 개구리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해서 먼저 질문 몇 가지를 하겠습니다.”
“좋아요.”
내 말을 들은 유리는 구겼던 표정을 풀고는 근처 의자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디펠리스 병원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 아니지요?”
첫 질문부터 그녀는 부쩍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신기한 눈으로 날 살펴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래요, 용의 시대 이후 셀 수 없는 새로운 공식에서 파생된 질병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요. 물론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지만요.”
“해서 당신을 노리고 있는 무리는 터쉬 제이스라는 기업에서 보낸 자들입니까?”
“정확히는 터쉬 제이스와 그 기업과 거래를 하기로 한 깃발이겠죠”
그녀의 얼굴엔 곧 두려움이 꽃피워졌다.
“중립지역까지 쫓아온 것을 보면 단순히 그들의 청부는 아닐 거예요. 아마도 그들 내부에서 직접 인물을 추려 저희를 추격하도록 지시했겠지요.”
“치료제를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요, 제가 가진 시약이라면 시제가 나오기까진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러고 나면 바로 복귀하는 겁니까?”
“네, 디펠리스 병원에 보고를 올리고 만든 시제로 치료제를 대량 양산해서 해당 병기를 살포할 지역에 배포가 시작될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틀이라는 시간을 말한 겁니까?”
“일단 치료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 이상 그들의 계획도 바뀌게 될 테니까요.”
“이를테면?”
그녀는 다리를 바꿔 꼬고는 상체를 숙여 턱을 괸 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완성된 치료제를 확보하고 자신들이 살포할 지역에 비싼 값으로 판매할 거예요. 기업은 늘 극한의 이윤을 추구하니까.”
유리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선 여러 핵심 도구가 필요해요. 다른 부수적인 물품들은 위층에 보셨던 사치스러운 가구와 섞어 들여온 터라 저들의 눈을 속였을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저들에게 우리 위치가 들통날 겁니다.”
“그래서 그 기점까지 계산한 기한이 이틀이라.”
“그렇죠.”
할 일이 명확해진 것 같네.
“나머지 이야기는 베즈나르와 하겠습니다, 그럼.”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려는데, 그녀가 대뜸 내 후드를 붙잡아 당겼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 * *
“유리님의 설명은 모두 다 들으셨겠지요.”
위층으로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 베즈나르가 다가왔다.
“핵심적인 내용이라면, 네. 모두 다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고이 접은 양질의 종이를 건넸다.
중립지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재질의 종이엔 여러 종류의 도구와 그에 관련된 설명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거기에 적혀있는 그 도구들을 구해 이곳에 반입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리님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될 것이고 우린 그런 유리님을 지키면 되는 거지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베즈나르는 탁자 위에 준비해 놓았던 옷가지와 투박한 브리간딘을 내게 건넸다.
그런 브리간딘의 어깨 부분엔 그가 걸친 갑옷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중립지역에서의 당신이 이 일로 인해 다른 누군가와 척을 지게 된다면 곤란해질 테니, 이걸 입으십시오. 가문의 견장을 차고 다니면 어느 곳에 가든지 당신을 제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좀 의외인데.
내가 상상하던 기사와 가장 똑같은 베즈나르가 내게 신분 위장을 종용하는 꼴이잖아.
“당신의 깃발이잖습니까? 이는 분명히 그것을 욕보이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나 베즈나르는,
역시나 기사다운 대답을 내놓는다.
“이미 검을 가지고 계시니 갑주만 입으면 기사가 못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예로부터 기사의 근본은 걸칠 갑주와 들 무기로부터 비롯된 겁니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명예와 영광은? 난 그런 게 없습니다.”
내 질문에 베즈나르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명예와 영광은 기사여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사이기에 쫓아야 하는 거지요.”
열정적인 그의 대답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내 그가 건넨 갑주를 받아들였다.
* * *
“소개하지, 우리와 같이 임시로 동행하게 된 마찬가지로 임시기사다.”
잘 맞지 않는 브리간딘을 걸치고 나온 나를 소개하는 베즈나르의 말에,
두 기사는 어제 내게 보여줬던 살벌한 표정과는 달리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먼저 잿빛의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첼르의 기사 타만이라고 합니다.”
뒤이어 무표정한 얼굴의 긴 금발 여자가.
“겔리르의 기사 이리즈입니다.”
자신의 가슴팍에 달린 견장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들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베즈나르의 등 두들김을 받고 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얀츠의 임시기사, 디안입니다.”
“첼르의 이름을 빌려, 당신의 합류는 우리에게 진정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겔리르의 깃발을 달고서 두 발로 땅을 딛는 한, 당신이 해준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모르겠어.
지금까지 해봤던 거라곤 막연한 사칭 같은 것뿐이었는데.
곧, 베즈나르가 각오를 다짐한 듯한 비장한 말투로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기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