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봉합 (6)
“디안, 월 엣지에 대해 아십니까?”
테이블 위, 수많은 장비 가운데 거친 라운드 실드를 집어 든 이리즈가 내게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은 한 조로 움직일 테니 조금은 숙지하셔야 할 겁니다.”
이리즈는 덤덤한 표정으로 금발을 휘날리며 내 곁에 서슴없이 붙어왔다.
이어 라운드 실드를 쳐들어 사선으로 튼 상체 전반을 가린 그녀가 턱짓으로 날 불렀다.
“월 엣지는 두 명이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유용한 진형입니다. 제 뒤에 바짝 서보십시오.”
그녀의 말을 따라 뒤에 바짝 붙어 셀레어의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다음 말을 기다리자,
이에 대답하듯 이리즈는 상체만을 틀어 기민한 움직임으로 라운드 실드를 여러 방향으로 꺾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제가 상대의 원거리 무기에 대항해 방어 방향을 전환할 겁니다. 이때 제 발은 일반적인 걸음에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보폭으로 전진을 병행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이리즈, 난 그런 그녀를 따라 바짝 붙어 마치 실전인 양 검집에서 셀레어를 슬쩍 뽑아 들었다.
“이때 적들이 원거리 무기의 진행 방향 외 사선으로 근접전을 유도할 겁니다. 그때 제 등 뒤에서 자신의 어깨 하나만큼의 가동 범위를 상정하고 대처하시면 됩니다.”
간단하지만 내게 생각의 여지를 주는, 깊은 이해도를 내포한 훌륭한 설명이다.
“본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다면 월 엣지의 가동 범위는 전방위에 가까울 정도로 유연해지지만 비교적 취약점이 드러나는 브리간딘을 입었다면 항시 가동 범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곧 자세를 푼 그녀가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베즈나르님께 들었습니다, 단 한 합 만에 결착을 지으셨다고요. 당신 같은 실력자에게 제 뒤를 맡길 수 있다는 건 큰 영광입니다.”
이리즈의 그 말은 내 심장을 금세 뜨겁게 만들었다.
“자, 그럼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은데.”
곧 장비를 갖춰 입은 베즈나르가 같이 움직일 타만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났다.
타만 역시 이리즈처럼 허리춤에 아밍 소드와 등에 라운드 실드를 짊어지고 있구나.
“복색 자체만으로도 여러 길목의 통행권이 보장될 테니 이동엔 문제가 없겠지만…,”
베즈나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날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디안, 당신은 아무래도 임무 수행에 지장이 갈 정도로 눈에 띄는 용모라 후드 착용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다들 동의하나?”
이에 타만과,
“애초에 모두가 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필요는 없지요.”
이리즈가,
“동의합니다. 임시기사라곤 하나 임무가 끝나면 그는 다시 이곳의 삶을 살아야 하니 노출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수긍했다.
“좋아, 그럼 이제 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겠다. 2개 조로 나눠 유리님이 말씀하신 물건을 입수한 뒤 갈림 광장이란 데서 합류한다. 합류 시간은 포드 중앙 탑의 종소리가 세 번 울리고 난 뒤 10분 이내로 잡고 그 이상 지체될 시엔 먼저 도착한 팀은 곧장 복귀해서 유리님을 데리고 피신할 수 있도록.”
마치 큰 건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묘한 긴장감이 내 어깨를 훑는 느낌.
“그럼, 잠시 후 다시 만납시다. 기사들이여.”
묵묵히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선다.
그렇게 서로 흩어지려는 찰나에 베즈나르는 뭔가 할 말이 생각났는지 직전에 날 불러 세웠다.
“디안, 첩보에 따르면 터쉬 제이스의 뒷배에 이곳 국경의 영주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일로 당신이 살아가는 중립지역을 최소한 생화학 무기로부터 지켜내는 셈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베즈나르. 건투를 빕니다.”
과연,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정보다.
일찍이 두 제국의 국경 지역은 라티아의 곡식을 이용해 환장에 가까운 돈 지랄 파티를 했었잖아?
그렇게 해서 그동안 제국으로부터 축적한 막대한 부를 생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제국에 대항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거다.
어차피 라티아의 증발로 그들의 부정이 드러난 이상, 제국의 땅에 그들의 깃발이 세워져 있는 걸 황가 쪽에서 용인하지 않을 테니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황가에 대항할 카드를 마련하려고 아주 혈안이 되어있을 거야.
그중 하나가 바로 시몬 바스티유의 검거인 것이고.
생각해 보면 저 생화학 무기를 빌미로 제국에게 독점한 치료제마저 팔아먹으려는 계획까지 구상했을 것 같은데.
물론 이 모든 건 내 망상일 뿐이지만, 지금껏 봐왔던 중립지역 속 권력가들의 광기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풀지 못할 매듭이 끝없이 생기는 기분이다.
서둘러 차분함을 쏟아 생각을 정돈한 나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장선 이리즈를 따라, 처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이 아닌 양지로 향하는 길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차츰 진정시켰던 심장이 벌컥벌컥 내 목구멍을 넘보기 시작한다.
이윽고,
이리즈를 따라 햇볕에 빈틈없이 물든 거대한 길목에 접어든 나는 잠시 어스름 속에서 넋을 놓고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난생처음 본 것들이었으니까.
서로 다른 상징이 수놓아진 깃발이 휘날린다.
하늘 위 체류하고 있는 거대한 구름으로부터.
하나같이 앤서니 트와드의 큰 구름과 견줄만한 엄청난 크기의 배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방금 막 내 눈앞에서 엄청난 덩치의 소 떼가 뒤에 매달린 성채를 질질 끌며 지나갔다.
어느 건물에선 숫자가 적힌 패를 목에 건 새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여러 사람에게 날아갔고,
이어 새로운 숫자가 적힌 패를 목에 건 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더니, 곧 난쟁이 하나가 거대한 소라를 입에 끼고 거나하게 소리쳤다.
“브라스 금화 840개요! 이제 마지막 입찰 기회니 놓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신세계.
방금 내가 품었던 모든 생각이 증발, 아니 휘발되어 버릴 정도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 세상의 한 장면은 어떤 감정의 벅참으로도 소화가 불가한 것이었다.
“기사님?”
잠시 걸음을 멈춰 주변을 돌아보던 내게 경종을 울리듯 말을 거는 이리즈.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다가가니, 이리즈는 금방 피식 웃으며 다시 앞길을 자처해 나섰다.
“저도 처음에 이곳이 왔을 때 세상에 이런 데가 있구나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틀째 되니까 발굽 소리만 들어도 체할 것만 같더군요.”
“아마 저도 시간이 지나면 당신과 같은 감상을 남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리즈. 당신은 어떻게 기사가 되었습니까?”
쏟아지는 세상의 장면을 뒤로한 채 나는 흥미로운 책을 고르듯 눈앞에 인물에 집중했다.
“어쩌면 정말 무난한 인생이지요, 딸마저 강인한 전사로 키워내고 싶어 하시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4살이 되었을 때 겔리르 가문의 시동으로 들어가 기사들의 신발 끈 매는 법부터 배웠거든요.”
“굉장히 험난했을 것 같은데.”
“저희 집안이 워낙 강골이라 그 모든 게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만, 가끔 귀족의 자제가 여급들과 코르셋을 가지고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리즈는 털털한 미소와 함께 털어내듯 말을 이었다.
“후회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한들 저는 똑같이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멋지네요.”
“그러는 임시기사님은 그런 괴물 같은 실력을 어디서 쌓으신 겁니까? 설마 전설로만 전해지던 반디벡스나 단테의 비전이라도 얻어 깨달으시기라도 한 겁니까?”
기회가 된다면,
이리즈가 말한 것에 대한 정보를 쫓고 싶기도 하네.
세상은 아직 내게 깨달음을 줄 책과 세계가 넘쳐 흐른다.
그러한 급류 속에 몸을 던져 힘껏 헤엄치고 싶은 기분이 부쩍 드는 지금이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해선 후회 없이 말할 순 있지.
“처음은 꽤 거칠었지만,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다듬어주신 검술입니다.”
이리즈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별이 떨어지는 듯한 반짝이는 눈망울로 격한 호기심을 내뿜으며 말했다.
“정말 멋집니다, 기사가 아닐지언정 중립지역에 당신 같은 검이라는 보석을 만나게 됐다니, 제겐 행운입니다.”
이리즈는 자신의 아밍 소드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질문한다.
“혹, 검술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기사의 길을 걸을 때 이름만이라도 상기할 수 있다면 제겐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난 기꺼이 그녀를 향해 미소와 함께 말해주었다.
“운명의 노래.”
“운명의…, 노래입니까.”
이리즈는,
처음으로 두 뺨과 귀 끝을 붉게 물들이며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그리곤 가슴에 수놓아진 가문의 인장을 부여잡곤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하겠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페이지 위를 걷던 우리 둘은 그렇게 목적지에 도달해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나왔다.
뭔가를 끓여 특정한 물질을 분리해 추출할 것만 같은 그것은 분명 장인의 솜씨가 들어가야 완성되는 예술품에 가까웠다.
하여 유리로 된 그것들이 설령 깨질까 봐 나와 이리즈는 정말 조심스럽게 그것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약속한 장소에 도달해 베즈나르와 타만을 기다리던 우리는,
댕-
댕-
댕-
슬슬 지나간 시간을 느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과 함께.
서둘러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갑작스레 엄습한 긴박함에 나와 이리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어두운 길목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베즈나르와 타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유리 벳즈는 무사한가? 적어도 그녀를 노리는 자들이 지금 시점에서 움직일 리는 없지 않은가?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은 분명 치료제를 만들 도구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가 가장 시기적절할 텐데.
근본적인 목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모든 신경이 쏠리고야 말았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느껴진다.
둘, 아니 넷.
여덟, 열둘.
스물하나.
놈들의 숫자는 모두 다 해서 스물하나다.
때를 기다리던 맹수처럼 사방에서 끈적하게 들러붙는 시선들의 개수가 차근차근 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 심장은,
극도로 절제된 침착함에 절여져 차가워져 있었다.
이어 뒤늦게 주위에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이리즈가 잔뜩 흥분하여 내게도 그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즈, 진정하십시오.”
“적어도 여덟 이상은 되 보입니다. 혹 저들이 베즈나르님과 타만을…,”
“이리즈, 진정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고서 뜨거워 끓기 시작하는 심장에 일부러 냉담하게 대했다.
그러자 그녀는 용케 침착함을 되찾았다.
잘했어, 이리즈.
이제 문 앞에 도달하기 직전,
드디어 먹이를 노리던 맹수들이 차근차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그 어떤 말도, 할 말이 있다 한들 구태여 할 필요 없다는 듯 몇몇은 쇠뇌와 활 시위를 당겨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리즈.”
“뒤를 부탁합니다.”
다시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잔뜩 긴장하고 흥분했어.
그러나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련된 자세로 방패를 고쳐 잡았다.
“날 믿고 움직이세요.”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는 온 정신을 적들의 화살 끝에 집중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이렇게 많은 숫자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야.
무섭고 두려워,
하지만.
나는 켈리르의 기사다.
나는 내가 힘닿는 데까지 영광스럽게 싸울 것이다.
적어도 날 믿고 뒤를 지키려 마음먹은 전사를 위해서라도.
첫 번째 시위가 출렁거린다.
쉬익-
날아드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해 상체를 튼다.
팍!
첫 화살이 라운드 실드에 박혔다.
슬쩍 동요된 내 마음이 그 첫발의 피격으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 급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파박!
네발 째 화살까지 성공적으로 막아냈는데,
안 돼…,
사방으로 열 이상의 장정이 무기를 들고 동시에 달려든다.
제아무리 대단한 검술을 가지고 있다 한들, 개인이 다수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한계로 작용할 터.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뭔지 모를 확신을 느낀 채 발을 앞으로 내밀 뿐이다.
그런데,
점점 내 눈앞에 보이는 적들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에…에인츠 가문에서 나온 녀석인가!?”
“씨발 저게 뭐야!”
“도망쳐, 이런 건 계약에 없던 내용이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윽고,
뒤에서 흐트러짐 없는 호흡으로 말미암아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이리즈, 계속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