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봉합 (7)
지금까지 겨뤘던 무리 가운데 이들의 숙련도가 가장 높다.
거창한 화력을 가진 무기가 아닌, 실전적이고도 효율적인 움직임만으로 동시에 쇄도하는 그들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다만 내 앞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이리즈 덕분에 적들은 초반에 원거리 교전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정면이 봉쇄당해 내게 달려드는 무리의 진입로는 측면과 후방으로 한정되었다.
내가 가진 셀레어는 중간 길이에 해당하는 롱소드이고 이 정도 길이라면 전방에 이리즈를 충분히 지켜가면서 싸우는 게 가능해.
그녀와 등을 맞댄 채 서 있던 나는 막 처음으로 달려드는 작자의 검을 맞대어 흘려보냈다.
이건, 맥레인이 보여주었던 수많은 검술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내가 파훼한 검술 중 하나이기도 하지.
더해서 맥레인의 완성에 가까운, 경이로운 수준의 검술에 비하면 그가 펼치는 검술의 완성도는 처참한 수준.
본능적으로 호흡을 반으로 쪼개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첫 공격을 흘림과 동시에 그 반동으로 이리즈의 옆구리를 노려오는 남자의 턱을 꿰었다.
그 뒤로 검의 휘두름을 그대로 유지해 첫 공격을 감행했던 적의 배를 갈랐고,
후.
이내 들이켰던 숨을 내뱉었다.
운명의 노래,
그 첫 장에 들어갈 제목은.
‘역전’
적들이 감행한 공격 그 자체가 내 공격의 기반이 되는, 모순을 노래하는 역전일변도의 검술.
이제 막 두 번째 호흡을 머금은 나는 미리 수놓을 검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쇄도하는 적들을 한 궤적 내에 모두 꿰어 베어버렸다.
그러다 처음으로,
적들 가운데 하나가 내 검을 받아쳤다.
그런 그의 양팔엔 미약하게나마 실 같은 벼락이 흐르고 있었는데,
저게 바로 열화된 인챈트의 힘이로구나.
하지만 내 기본적인 검술을 쳐내기 위해 열화된 인챈트를 발휘해야 했을 정도라면 상대에겐 승산이 없다.
왼발을 뒤로 물리고 순간적으로 오른발로 땅을 박차 상체를 비튼 나는 그를 향해 맹렬하게 검을 휘둘러 쳤다.
별이 달과 같은 빛을 내뿜는다고 해서 밤하늘 아래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듯.
열화된 인챈트로 나와 같은 선상을 꾀했다면,
오히려 나는 검을 이루는 소재의 차이로 짓누르면 될 뿐.
이터누티로 벼려진 명검, 셀레어는 은색을 토해내며 내 바람대로 적을 무기째로 베어버렸다.
후.
두 번째 호흡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 싸움은 세 호흡 안에 마무리가 될 거다.
세 번째 호흡을 거나하게 들이키고, 은빛 사선을 퍼트려 주위에 붉은 핏방울을 튀길 때 즈음.
전방에 대치하고 있던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에인츠 가문에서 나온 녀석인가!?”
“씨발 저게 뭐야!”
“도망쳐, 이런 건 계약에 없던 내용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명이 딱 끝나는 시점에서, 나는 마지막 적을 베고 고개 숙여 이리즈에게 말했다.
“이리즈, 계속 앞으로.”
이리즈는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며 언제든 들이닥칠지 모를 화살을 경계하며 라운드 실드를 고쳐잡았다.
강인한 허리로 상체 전반을 숙여 단단하고 무결한 자세를 쭉 유지하는 이리즈의 모습은 말 그대로 벽.
이제 적들은 빠른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우리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화살을 쏘아냈다.
이렇게 되면 더는 그들을 쫓는 건 무리다.
이 진형으로 저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어.
“이리즈, 이쯤이면 된 것 같습니다.”
멀리 달아난 적들을 확인한 내 말에 그녀는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곤 라운드 실드에 박힌 수많은 화살을 검집으로 쳐내 모조리 부러트리곤 그제야 몸을 돌려 뒤에 벌어진 상황을 확인한 그녀가,
내게 경외를 표한다.
“확실히 당신은 비전의 소유자였군요, 다수를 상대로 이런 압도적인 검술은 정말 처음 봤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진 못했지만…,”
“이리즈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쉬이 적들을 상대하진 못했을 겁니다.”
원거리 무기는 변칙 덩어리다.
나도 아직 제대로 겪어본 바가 없으니 화살의 궤적을 읽는 방법은 고사하고, 그저 반사신경을 발휘해 쳐내는 방법밖엔 모른다.
이리즈는 그런 변칙을 내게서 완전히 제거해줬으니 이번 승리의 주역은 마땅히 그녀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러다 순간,
치기를 버리지 못한 적 중 하나가 저 멀리서 우릴 노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간파한 나는,
본능적으로 이리즈의 어깨를 휘감아 감쌌다.
쒸익-
그렇게 쇠뇌로부터 발사된 화살의 날카로운 소리가 내 등에 틀어박혔지만,
“괜찮으십니까?!”
멍이 들 정도의 욱신거림만 느껴졌을 뿐, 화살은 어스름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대체…,”
연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날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이리즈, 정신 바짝 차리고 제 말 잘 들어요. 제가 잔당을 소탕할 동안 당신은 유리를 지켜야 합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우리에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잖습니까.”
내 말에 이리즈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시길.”
이윽고 자신의 견장을 두들긴 그녀는 챙겨온 물건을 들고 서둘러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이제,
흩어진 쥐를 사냥할 때다.
그저 밤엔 따듯하고 아침엔 서늘해지는 그런 특수한 재질의 가죽인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어스름이 가진 방어력이 상당한 것을 확인한 이상.
활은 이제 더는 위협이 되질 않는다.
서둘러 한쪽 팔로 어스름을 들춰 정면을 가린 채 달려나간 나는 흩어진 잔당들의 흔적을 쫓아 굽이진 골목으로 빠져들듯 들어섰다.
* * *
도망친 잔당 가운데 셋을 추가로 제거한 나는 셀레어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부분은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어 멀리 도망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아직 도처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몰라.
질린다.
볼스피티의 딱딱한 도감에서 보았던 글귀가 자연스레 머릿속을 스쳤다.
발강퍼의 진흙은 최고의 거푸집 재료로 그 점성이 메렌제의 반군이 펼치는 게릴라 전술처럼 질긴 게 일품이다.
지금 상황에 딱 걸맞은 비유 같은데…,
마치 단편적인 전쟁의 한 페이지를 엿본 기분이 들 정도네.
이런 쪽으로 좀 더 감각을 길러냈으면, 그러면서 내가 가진 힘을 적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초기에 모든 걸 바로잡았을지도.
순간, 내 귀 끝이 찌르르 울렸다.
골목 두어 개 정도 건너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다시 묵묵히 어스름을 휘날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에서,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베즈나르와 타만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끈덕지게 따라붙은 적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과연 전투를 업으로 삼는 기사들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당장 이리즈가 내 벽이 되어줬던 것처럼, 베즈나르와 타만은 서로 뒤엉켜 마치 한몸에 달린 오른손과 왼손처럼 휘둘려 적들을 깎았다.
그런 그들에게 합세해 끼어든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만든 소용돌이 일부가 되었다.
“무사했군요!”
한창 열이 오른 베즈나르가 반가운 얼굴로 날 반겼다.
뒤이어 방금 막 적의 가슴을 꿰뚫은 타만이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중간에 물건을 낚아채고 유리님을 납치할 생각이었나 본데, 누가 계획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아둔한 작전이 아닐 수가 없군요.”
베즈나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전투에 열중했다.
나와 이리즈 쪽에 붙은 자들과는 달리, 베즈나르와 타만에게 붙은 적들은 본대에 가까운 질과 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얼추 전투가 마무리될 무렵.
우리는 서로 거친 호흡을 정돈하며 막 자리를 뜨려 했었지만.
채 의식하지 못한 곳에서,
쒸익-
날카롭게 바람을 째는 소리와 함께.
“커…헉…?”
베즈나르의 목에 정확히 화살 하나가 박혔다.
“베즈나르!”
서둘러 무너져 내리는 그를 부축한 나는 타만에게 소리쳤다.
“그를 부축해, 어서!”
이에 타만이 능숙한 솜씨로 베즈나르를 업었고, 난 걸치고 있던 어스름을 벗어 그 둘을 감쌌다.
“그를 데리고 어서 빠져나가십시오.”
“그럼 당신은 어쩌고?!”
급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당황한 타만이 횡설수설하듯 말을 토해내지만,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부여잡고 단호하게 일갈했다.
“뒤는 제가 정리합니다, 첼르의 기사 타만.”
그러자 타만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채 베즈나르를 업고서 미친 듯이 뛰어 골목길을 주파한다.
이제 혼자 남은 나는,
남은 잔당 하나까지도 모조리 죽이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천천히 타만이 떠나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포드의 주축 중 하나인 거상 오리반의 조사단이 피투성이가 된 골목길에 도착했다.
그들의 목적은 진상을 파헤치는 것이 아닌,
그저 벌어진 일의 상황과 그 경과를 제대로 방관하기 위해서였다.
곧 조사단의 대장이자 오리반의 집행자인 마브가 격렬하게 벌어진 전투 현장 가운데 쭈그려 앉았다.
바닥에 쏟아진 핏자국의 특징을 살피던 그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삐뚤어진 장갑을 고쳐 끼며 동행한 조사단원들에게 말했다.
“싸움은 수가 많은 쪽에서 걸어왔다, 하지만 적은 수에 해당하는 무리에게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군. 포드의 법칙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결투였다.”
그들은 철저한 중립자.
포드가 정한 법칙 내에서 이뤄진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상인이기도 해서,
“어이.”
마브는 근처에 있던 조사단원 하나를 불렀다.
“적은 수 쪽에 굉장한 강자가 있다. 어쩌면 인력 시장에 일감을 구하러 올 수도 있으니 미확인자로 분류해서 명단에 포함 시켜 놔.”
“등급은 어떻게 할까요?”
그의 물음에 마브는 앞주머니에 있는 사탕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초신성.”
“초…신성 말입니까?!”
“간만에 포드에 굉장한 거물 고객님이 오셨다.”
초신성.
포드에서 분류한 인력 등급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등급이지만.
사실상 포드가 지정한 등급 가운데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마브는 고개를 슬쩍 까닥이며 머릿속 주판을 튕겼다.
그러니까, 초신성을 원정대 등급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정도일까…?
그래, 아마도 옥토진타(80) 트로피 급 정도는 될 거야.
그마저도 상대했던 다수가 폐급인 걸 상정하고 제대로 평가하면, 이보다 더 높아지겠지.
“자, 가서 면이나 먹자. 우리 할 일은 끝났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은 마브의 지시에 조사단원은 그렇게 우르르 사라졌다.
* * *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리즈가 튀어 나왔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베즈나르는…?”
내 물음에 그녀는,
묵묵히 몸을 돌려 따라오라는 듯 차가운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오셨습니까, 디안.”
이제 막 치료를 끝내고 안정을 되찾은 베즈나르가 씩 웃으며 날 반겼다.
“베즈나르…?!”
“왜 그러십니까? 꼭 죽은 사람 부르는 것처럼.”
살아있었구나.
하지만 목을 관통당했었는데…?
“흠.”
곧 그의 마리 맡에 앉아 있던 유리가 피 묻은 손을 젖은 헝겊으로 닦아내며 인기척을 과시했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목뼈를 비롯해 중요한 부위를 아슬하게 빗겨 관통했거든요. 다만 몇 달간은 먹는 걸 조심해야 해요. 큰 소리로 말해서도 안 되고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내게 다가와 해맑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치료제도 무사히 완성했어요, 모두 기사님들 덕분입니다. 먼저 떠나간 네 명의 기사님들은 평생 제 마음속에 지니며 살겠습니다.”
모두 다 무사히 끝났구나.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제아무리 디펠리스의 간호사라고 해도 죽음을 부정할 순 없어요. 베즈나르는…, 정말 운이 좋았네요.”
그래도 치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지, 그녀는 탄식하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일만 남았네요, 이 행운이 채 떠나가기 전에 그에게도 발휘되길 기도하겠어요.”
뭐랄까.
이런 부류의 성취감은 처음 느껴봐서,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그런 날 보고 해맑게 웃는 유리 벳즈를 보니 그렇게 이상한 표정은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