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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91화 (91/365)

91화. 봉합 (8)

“유리 벳즈라고 해요, 반가워요.”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인이 내 맞은편에 앉아 씩씩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얘기는 얼추 들었는데, 맥레인이요.”

“디안님이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갑자기 두 뺨을 붉게 적신 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게 질문하는 그녀를 보니,

이상하네, 괜히 내가 다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로 약속했다고, 그리고 지금은 그쪽이 도움을 줄 차례라고 했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어여쁜 분이라고도 했고, 근데 이렇게 마주하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군.”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는 다시 바람 얻은 불씨처럼 두 눈을 이글거렸다.

그런데 당신, 디펠리스의 간호사라며.

말이 간호사지 디펠리스면 거의 수도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

아, 그랬지.

아직은 수습이라고 했었나?

디안이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이번 일로 그녀는 디펠리스로 돌아가기 무섭게 그들의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겠지.

얼마 남지 않은 그 짧은 시간이라도 감정의 자유를 만끽하겠다, 이건가.

이윽고 나는 가슴 통증을 이기지 못해 마른기침을 연거푸 내뱉었다.

요즘 들어 기침할 때마다 갈비뼈를 통째로 뱉는 느낌이야.

그런 내 기침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다가와 진찰을 시작했다.

디펠리스는 기업도, 그렇다고 영리적인 목적을 완전히 배제한 집단도 아닌 굉장히 모호한 조직이다.

하지만 그런 모호한 정체성과는 달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의학 지식이다.

깃발을 휘날렸던 그 옛날, 야전에 파견된 디펠리스 간호사들의 저력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녀는 잿빛으로 물든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 탓도 아닌데 뭐 그리 심각하나.”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네, 내가 정확히 뭣 때문에 죽어가는지.

“패혈증이에요, 일반인이라면 이미 숨을 거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한.”

그녀는 그러면서도 철저한 의학인 시점으로 경이로움을 표했다.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육체가 생명을 강제로 붙들고 있는 상태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네요…,”

“아가씨, 부탁 좀 들어주겠나?”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무엇을…?”

“디안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면 해.”

“어째서…,”

“그냥, 그게 좋을 것 같아.”

아직 그녀가 수습 단계에 머물러 있어 다행이야.

남을 위한 거짓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

“내 진심으로 부탁하지. 나는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만 말해주면 좋겠어.”

이어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주렁주렁 주머니를 매달고 있던 가죽 띠를 벗어 딱 보아도 값비싼 약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적어도 기침만큼은 확실히 처방해 드릴게요. 하지만 이 약으로 인해 당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 그 예정의 감각이 무뎌질 수도 있어요.”

“고맙군.”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는 와중에도 마른기침이 내 가슴을 찔렀다.

이내 그녀는 묵묵히 약재를 갈아 보름 정도를 복용할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솔직히 그녀의 진찰을 거절할 생각도 했었는데.

어제부터 포키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게 있어.

그러니까…, 음,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또 그 녀석의 마음을 이해해주겠나.

이렇게 따지고 보니 간호사 양반이나, 나나 똑같이 지나갈 찰나에 맞물려 있는 신세네.

* * *

얼마 남지 않은 심지를 태우는 초처럼, 언제 끝이 날까 하는 초조함을 태우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곧 벌컥 열린 문 너머로 걸어 나오는 유리를 발견하곤 대번에 다가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런 내 물음에,

유리는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연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리.”

그러자 그녀는 반대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당당히 말한다.

“저야말로, 아니 오늘 만든 치료제로 웃게 될 사람들을 대신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습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매튜 아저씨와 안나 아주머니도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무거운 체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끝내 미소 지으셨다.

“그럼, 떠나는 길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유리와 함께 밖을 나서기 직전,

나는 좁은 방 안에서 막 약을 들이켜고 있던 맥레인과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언제나 그랬듯 내게 냉정하고 무딘 모습만 보여줄 줄 알았던 그는 이제 내게 미소를 아끼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 씩 웃어 보였다.

그건 여러 의미로 내겐 아주 뜻 깊은 것이었으리라.

곧 퀴퀴한 어둠에 밤까지 덮은 골목길로 나선 나와 유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참을 걸었다.

이내 음습한 어둠이 물러나는 길목에 다다랐을 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저 멀리 서 있던 세 기사가 우릴 보고 반겼다.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가기 직전, 돌연 유리는 내 앞을 막아서곤 봄 냄새 가득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잘 있어요, 디안.”

“부디 조심히 가서 꿈꿨던 목표를 원대하게 마무리 지으시길.”

뭔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안부를 나누고,

유리가 보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내 눈으로 머금고 있던 그때.

그녀는 애써 치켜든 까치발로 고개 내밀어 내 볼에 입 맞췄다.

싱그러운 과실이 내 볼에 맺혔구나.

“안녕.”

가시지 않은 쑥스러움을 얼굴에 한 바가지 묻히고,

위태롭게 들렸던 까치발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풋풋한 본연의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다.

해서 나도 어렴풋이 잊고 있었던 어리고 여린 마음으로.

“안녕.”

손 흔들어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인사한다.

그렇게 세 기사의 인도를 받아 마차에 그녀가 탑승하고, 기다렸다는 듯 베즈나르가 내게 급히 달려왔다.

난 그런 그에게 아차 싶어 손에 쥐고 있던 가문의 표식을 그에게 건넸다.

“이젠 더는 임시기사가 아니니 가져가십시오.”

베즈나르는 내 말에 묵묵히 인장을 건네받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지금 하늘에 눈 떠 있는 별들에게 호언장담 한 번 하겠습니다.”

이윽고 그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날 보며 말한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됐을 때 당신도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고 있을 것 같으니까.”

가슴이 벌컥 뛴다.

뜨겁고 근질근질한 것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야.

처음 무법자의 로망을 접했을 때와 같은 느낌.

그래, 다시 만납시다.

묵묵히 가죽 건틀릿을 낀 그의 손을 꽉 붙잡아 흔들었다.

* * *

쌀쌀함이 부쩍 기세등등해진 아침이다.

오늘은 왜인지 모르게 쉽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싶지 않네.

어젯밤, 붕 떠올랐던 마음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그 여운이 진하게 감돌았다.

해서 잠시나마 여유를 부려 여운에 취해 본다.

괜히 한쪽 뺨이 간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구나.

잠시 후 내 머리맡으로 분주한 안나 아주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디안이 많이 피곤했나 보네, 아직도 안 깬 것을 보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나지막이 속삭이는 아주머니의 혼잣말에 괜히 깜짝 놀라 더욱 힘주어 눈을 감아본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이번엔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거침없는 발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이내 내 앞에서 멈췄고,

곧.

“디안?”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이는 포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다.

베리 준의 아침이라는 노래 가사엔,

밤중에 내려간 눈꺼풀엔 맞이할 내일 만큼의 무게가 실린다고 그랬었지.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 길래.

왜 이렇게 눈꺼풀이 무거울까?

천천히,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잔뜩 들뜬 표정을 한 포키스의 얼굴이 보였다.

“포키스, 무슨 일이죠?”

“디안, 같이 나가지 않을래? 곧 새가 돌아올 시간이거든.”

그 말에 나는 군말 없이 벌떡 일어섰다.

그런 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매튜 아저씨는 씩 웃으며 못 본 척 고개 돌리신다.

그새 포키스는 이곳저곳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안전한 길을 발견한 것인지,

오늘은 골목길이 아닌 큰길로 빠져나와 광장을 거쳐 다른 샛길을 통해 포드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그림자 밖에서 제대로 된 아침의 청취를 느낄 수 있었다.

“디안, 그거 알아?”

“어떤 거요?”

“맥레인이 밤새도록 기침 한번 안 한 거 말이야.”

“정말이에요?”

“그래, 과연 디펠리스의 간호사는 다른가 봐. 정말 고생 많았어, 디안.”

뭔가 몸속에 깊숙이 박혀있던 모난 돌이 쑥 빠진 기분이다.

아비베오에서부터 짊어지고 왔던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야.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에,

어느새 포키스보다 내가 더 앞장서 거닐고 있어, 숲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내 뒤를 바쁘게 쫓아와야만 했다.

* * *

말을 탄 수십의 장정들이 포드의 남쪽 정문에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치 오늘 떠오른 태양이 놓친 어제의 밤 조각처럼 새카만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참으로 대단했다.

그렇게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용병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자,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 건조한 말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탑에서 왔다. 막지 마라.”

이에 용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얼른 굳게 닫힌 관문을 열어야 했다.

이제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거리를 지나쳐 처음으로 마주친 광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멈춰 말에서 내렸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뱀처럼 갈라진 혀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놈들이 미쳤다고 이곳에 숨어들었을까?”

그런 여인의 목소리에 가장 선두에 있었던 퀭한 눈의 남자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중립지역은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지, 샬럿. 의심은 순례자의 미덕이야.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가 갈레아님의 지시에 의문을 품을 수 있었지?”

이에 여인은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살기등등한 말투로 대꾸했다.

“단지 우리에게 지정된 방향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다른 놈들이 먼저 인챈트를 맞닥트리는 게 싫다고.”

“됐고, 일라이. 이제 우리에게 놈들의 얼굴을 공유해라.”

여인의 투정을 일축한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누군가를 부르자, 곧 무리 중 한 사람이 후드를 벗고 고개를 내밀었다.

민머리, 눈 아래 길게 새겨진 상형문자가 인상적인 그 남자는 곧장 두 눈으로 하늘에 뜬 해를 거리낌 없이 품었고.

이어서 고개를 떨군 남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보인다, 대략 넷 정도의 얼굴이 그려져 있군.”

작게 중얼거리고는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단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푸른 빛.

그것은,

[91년, 아페루네스]

[세상에 전염된 신기루]

강력한 재해, 인챈트.

발현된 그 힘은 곧 그의 의지로 빚어져 같은 순례자들의 두 눈에 자신이 본 것을 똑같이 투영시켰다.

* * *

찌르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름다운 꽁지깃을 가진 새가 요란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왔다.

익숙한 모습으로 포키스의 팔에 안착한 그 새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부리를 움찔거리며,

찌르르 찟, 찌르르.

소리를 씹어 내는 듯 웅얼거렸고 그런 그 소리를 경청하던 포키스는 한참 뒤에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드디어 흩어진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겠군.”

“포키스? 무슨 일이에요?”

“보스와 재키를 찾았다는군, 그리고…,”

“그리고..?”

“오리무중이던 ‘세 사람’까지도.”

이어지는 포키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하나였던 것들이 다시 하나가 되기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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