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92화 (92/365)

92화. 급류

“언제까지 우리는 잔악한 무법자들이 판치는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첨탑과 방책 뒤에 숨어 살아야 하는 겁니까!”

포드 동쪽 광장.

그곳에 간이로 마련된 단상 위, 한 남자가 우뚝 서 있다.

기름을 잔뜩 먹여 말끔히 넘긴 검은 머리카락, 풍만하게 솟아오른 광대.

후덕한 턱과 비례하는 거대한 풍채와 그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박력.

“벤조르의 대화재가 일어나고 40일 후 그 주모자들인 리벤션 갱단 전원이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우린 그걸 중립지역에서 만든 정의라고 부릅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귀를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에 광장은 순식간에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여러분, 라티아가 쑥대밭이 된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그럼에도 주동자인 무법자 집단, 시몬 바스티유는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립지역의 정의가 더 빨리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그의 말에 슬슬 좌중에서 기꺼이 동조한 몇몇이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맞소!”

“보여줍시다! 별에게 보여주자고요!”

“정의는 살아있다!”

“앤서니 트라이던트를 보십시오! 그들은 항간에 떠도는 사실 같지도 않은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목숨을 걸고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쫓고 있습니다. 악명 높은 순례자들이나 남부 지역 남작들과는 다른,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

저 입 앞에 마른 장작을 가져다 놓으면 금방 불이 붙지 않을까.

열성을 토해낸 그의 말에 좌중 대다수는 이제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곧 내 뒤로 접근해 온 포키스의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막스 테이건,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명한 자입니까?”

“그는 라이튼 제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발언가야.”

“발언가라…,”

말로만 들어봤지 실물은 처음 본다.

“저 작자의 똥구멍을 헤집어보면 앤서니의 금화가 얼마나 쏟아져 내릴까.”

이런 데까지 와서 앤서니 트라이던트를 비호하는 발언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다발로 쏟아질 것 같은데요.”

내 맞장구에 포키스가 피식 웃는다.

“그만 가자, 우리 가족들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포키스.”

그렇게 나와 포키스는 조용히 광장을 빠져나가 복잡한 포드의 혈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동하는 내내, 저 멀리 광장에서부터 발언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우리 뒤를 쫓아다녔다.

* * *

우리가 가져온 설렘은 모여 있던 가족들 모두가 나눠 먹고 기뻐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를 지경이다.

“드디어 시몬 바스티유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가.”

매튜 아저씨는 붉어진 눈시울로 담담한 안도를 내비치셨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굉장히 호전된 맥레인도 우리가 가져온 소식에 유감없는 기쁨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포키스의 말에 우리는 들고 있던 설렘을 얼른 내려놓아야 했다.

“오다가 막스 테이건을 봤습니다. 그가 이곳까지 와서 연설하고 있더군요.”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맥레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역겨운 것을 입에 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어 매튜 아저씨는 말없이 다 무너져가는 선반 위에서 허름한 신문 뭉치를 꺼내 들어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게 뭐죠?”

포키스의 질문에 매튜는 품에서 낡은 단 안경을 끼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어두운 혈관에까지도 소식통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자들이 있더군. 대부분이 부랑아였는데 그들은 고객이 누구든 돈만 주면 기꺼이 성실을 내놓더라고.”

“음지에 유통되는 신문 같은 건가?”

맥레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매튜가 내놓은 신문 하나를 집어 펴들자,

갈겨쓴 듯한 조악한 글씨가 우리 시선을 빼앗았다.

‘시몬 바스티유가 목매달려야 하는 이유’

순간 찾아온 묘한 침묵.

그러나 매튜 아저씨가 곧장 그 침묵을 깨트렸다.

“이미 그들은 일찍이 이곳에 시몬 바스티유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었어.”

매튜 아저씨의 말에 맥레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명분 만들기입니까?”

“그래, 시몬 바스티유에 대한 적개심을 쌓아놓고 대중이 이에 갈증을 느낄 때쯤 막스 테이건이라는 거물 발언가가 그것을 해갈시켜 주면서 앤서니 트라이던트라는 존재에 정당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거야.”

곧 잠자코 듣고 있던 안나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래서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경고하는 거지.”

매튜 아저씨는 냉철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몬 바스티유를 처단하는 건 오롯이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몫이라고 말이야, 바꿔 말하면 시몬 바스티유를 쫓고 있는 다른 세력에게 노골적으로 경고를 보낸 거나 다름없지.”

이어 매튜의 말에 맥레인이 살을 덧붙였다.

“근데 그 다른 세력들에게도 엄연히 자기들만의 명분이란 게 존재하거든. 골 때리게도 우리가 저지른 건으로 인해 소위 좆 되신 양반들이 어디 한둘이냐.”

해서 명분이라는 이름의 파이 싸움이라는 건가.

매튜 아저씨는 이제 이지적인 표정을 지으며 단숨에 우리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앤서니 트라이던트가 포문을 엶으로써 우리에겐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를 마주친 거야.”

“그런데, 앤서니 트라이던트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릴 잡으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안나 아주머니가 재차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맥레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단하지, 우리 때문에 현재 가장 나락에 빠진 게 그쪽이잖아. 만약 중립지역이 우릴 놓치면 이 땅에 흐르던 세태는 당연히 ‘다른 범인 잡기’로 넘어가게 될 테고 그 다음 범인에 가장 부합하는 건 누가 봐도 앤서니 트라이던트거든.”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서 조심스럽게 첨언해본다.

“그렇게 말하자면 라티아에 빌어먹은 남작들도 만만찮은 나락을 겪게 될 거에요. 어쨌든 그 다른 범인 잡기를 하는 이유 자체가 중립지역에 벌어질 전쟁을 어떻게든 막기 위함일 텐데 그 전쟁의 교두보를 마련한 게 바로 남작들이잖아요.”

그러자 매튜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그래, 디안의 말이 맞아.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거야.”

우리 모두를 환기시켰다.

“앤서니 트라이던트를 시작으로 이미 그들끼리의 충돌은 확정된 거나 다름이 없어. 잘 생각해 봐, 지금 우리는 곧 있으면 다시 하나의 시몬 바스티유가 돼.”

줄곧 침묵하던 포키스가 드러난 한쪽 눈을 번뜩인다.

“시기가 딱 절묘하군요.”

“맞아, 포키스. 우릴 가지고 그들이 명분 싸움을 시작할 때가 바로 시몬 바스티유가 움직일 때라는 거다.”

매튜 아저씨가 말한 그 기회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다시 한번 나와 우리 가족들은 매튜 아저씨가 뿜어낸 통찰을 곱씹었다.

그리고 거기서 진하게 배어 나온 희망이라는 이름의 기회를 엿본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 * *

늦저녁.

포키스의 지시에 따라 나는 서둘러 포드의 혈관을 거닐었다.

휘영청 꺾이고 엉킨 골목을 가로지르며 능숙하게 양지의 거리로 빠져나온 나는 이제 한껏 부푼 마음을 간신히 억제하며 한 낡은 간판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괸 바위]

간판은 여느 장식 하나 없이 굵직한 글귀만 덜렁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투박함에 자연스레 폭포 끝자락에 아슬아슬 매달린 바위가 연상되었다.

조용히 그 간판 아래 안으로부터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찌든 누룩 냄새가 확 달려들어 내 코를 덮쳤다.

그러나 나는 그 찌든 내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치켜뜬 눈으로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바에 걸터앉아 있는 이에게 접근했다.

이제 인기척을 느낀 그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본다.

진짜,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지.

“이 씨발, 촙. 무사했구나…!”

격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 역시 내 얼굴을 살피기 무섭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내 등을 두들겨댔다.

“디안!!”

솔직히 투박한 사내 둘이서 맞이한 간만의 재회에 이야기가 끼어들긴 힘든 터라.

우린 그렇게 말없이 서로 등가죽을 타악기 삼아 두들기다가 어색함을 느끼고 떨어져.

“와…이씨..”

“씨이…벌..”

그저 치기 어린 욕지거리와 서로의 어깨를 몇 대 쥐어박으면서 또래 사이에 만연한 재회의 감정들을 교류했다.

그렇게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에게 물어보면,

“할 이야기가 진짜 많아, 그보다 다른 가족들은…?”

그 역시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첫 마디를 내뱉는다.

그래, 일단은 가족에게 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야.

* * *

후드를 눌러 쓴 채 말을 몰고 붐비는 거리를 활보하던 포키스는 잠깐 어느 좌판에 시선이 팔려 멈춰 섰다.

그 좌판 위로는 수많은 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 안엔 형형색색의 깃을 가진 새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세상에, 폴리라스잖아?

이건 대체 어디서 잡아 온 녀석이야?

속으로 여러 흥미로운 질문들을 곱씹으며 드러난 한쪽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그는 이내 아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새를 통해 언질 받았던 장소로 향했다.

곧이어 목적지에 도달한 그는,

골목길 안쪽,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경계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내 잔뜩 경계하던 사내가 기웃거리며 그림자로부터 슬슬 나오더니만.

“케니…! 포키스야!”

골목 안쪽을 향해 소리치며 밖으로 나와 포키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 뒤로,

샛노란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케니 역시 포키스의 품에 안긴다.

“이 녀석들아, 반갑다. 디안과 비질라가 너희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엉엉,

울기 바쁜 케니와 뜨거운 벅참을 겨우 지르밟은 채 어깨만을 부들부들 떠는 안드레를 꼭 껴안은 포키스는.

조금은 긴,

여운 묻은 침묵을 지켰다.

* * *

포드의 은밀한 혈관으로 통하는 수많은 관문 중 하나에 속하는 골목길 맡에서.

두 남자가 양 벽에 기댄 채 마주 보고 있다.

그중 나이가 들었으나 노신사처럼 시원스럽고 잘생긴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장대하고 거친 사내에게 말을 건다.

“정말 다행이야, 맥레인. 치료가 잘 돼서.”

“뭐, 디안이 애써준 덕분이지요. 그놈 고집도 참.”

매튜의 말에 맥레인은 슬쩍 눈길을 피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매튜는 더욱이 웃으며 그에게 말한다.

“꼭 네 똥고집을 닮았어. 가만 보면 완전 아들 같다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끌끌, 그건 디안이 할 소리 아니냐?”

“…매튜!”

“하하하!”

맥레인은 결국 매튜의 말재간에 무너지듯 피식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 말이 그렇게까지 기분 나쁜 것도 아니기도 했고.

잠시 후, 맥레인은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치료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또 입에 대나?”

“요놈은 저 못 죽입니다.”

“지랄, 없으면 죽는 소리 할 거면서.”

“큭큭큭, 왜 이렇게 쓴맛이 되셨을까.”

막 연초에 불을 붙이며 웃음을 내뱉던 맥레인에게 매튜는 그제야 서운했던 것들이 떠올랐는지 토로하듯 입을 열었다.

“네게 부탁받아 디안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얼마나 내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미안합니다, 매튜.”

“젠장, 그 말은 나보다 디안에게 먼저 했어야지!”

“언젠가는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는 말을 할 것 같수다.’

대답하는 와중에 맥레인은 매튜의 번뜩이는 눈빛에 살짝 움츠러들어야만 했다.

마치 자기 속마음을 엿듣고 있는 듯한 눈초리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매튜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아니, 결국 짧은 침묵 뒤를 돌고 돌아 나온 이야기는 역시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맥레인, 궁금한 게 있는데. 시몬과 함께 다니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나?”

그 말에 맥레인은,

한참 동안 말없이 연초를 태우다가 끝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매튜도 잘 알잖습니까? 시몬이 나를 위해 해준 일들을 생각하면 적어도 저는 그를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 그랬지…,”

씁쓸한 건지,

깊은 동감을 느낀 건지.

매튜는 오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저 멀리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천천히 이곳을 향해 접근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로써,

시몬 바스티유가 다시 하나가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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