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급류 (2)
보이지 않는 천장으로부터 주렁주렁 매달린 소라가 각기 다른 파도를 노래하면,
그 아래 특별한 환경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이 한데 모여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다.
그렇게 무성하게 피어오른 한 폭의 그림 같은 숲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보다는 자연의 위배를 위시한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숲 가운데에는 가진 열기를 과시하듯 뿌연 수증기를 거나하게 내뿜는 열탕이 있었는데,
곧, 열탕의 잠잠한 수면을 깨고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검은색에 가까운 감색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나타난 그 존재는 잠시 후,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두 손으로 쥐어짜며 어떤 인기척에 반응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차갑게 식어 정형이 마무리된 유리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인상, 결코 보통의 두 발 걷는 자라곤 보기 힘든 핏기 하나 없는 육신.
하지만 결과적으로 망상에 가까운 유려한 곡선들로 점철된 여인의 그 모습은,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물리적으로 결정화한 모습이라 칭송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제 그 여인은 표정 하나 일변하지 않은 채 탐스럽게 부푼 입술을 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더 누추한 분이 찾아오셨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로부터 스르르 나타나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이 경직된 표정으로 답했다.
“그 취향은 참 한결같네.”
흰 백발, 청금석 같은 눈.
그리고 그 눈을 감싸는 날카로운 잿빛 눈매.
감색 머리의 여인이 극한으로 정형된 아름다움이라면,
이쪽은 신비로움이 발린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백발 여인의 비아냥에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은 감색 머리 여인은 느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미적인 부분에 대해 고심해보는 게 어때? 아니지, 너라면 숲 그림자를 집어먹고 덩치를 불린 괴물로 변해 살아도 잘 어울리겠네.”
여유가 느껴지는 말투 속 냉소에는 분명 맺힌 고드름의 끝과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백발의 여인 역시 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태연히 열탕 인근에 걸터앉을 뿐이다.
“언제나 팔자가 좋아 보이네, 니제르.”
그러자 이번엔 감색 머리 여인이 발끈했다.
“팔자가 좋아? 제아무리 휘황찬란해봤자 이 모든 건 결국 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속박된 자의 궁상일 뿐이야, 플라움.”
이에 백발의 여인, 플라움은 기가 막힌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럼 이참에 나처럼 점성술사가 되어보는 건 어때? 그럼 이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
그러다 감색 머리 여인을 흘겨보며 잔뜩 빈정거린다.
“참, 속박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근 땅 전체에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만큼은 포기할 수는 없겠지?”
“닥쳐, 플라움. 밤중의 어둠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그래, 나도 반가워 니제르.”
플라움의 말에 곧 열탕 밖으로 거리낌 없이 걸어 나온 니제르는 바닥에 놓인 실크를 몸에 둘렀다.
물기를 머금고 신체에 바짝 들러붙은 실크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 니제르의 굴곡에 플라움은 잠시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너, 셀레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니?”
그러자 니제르는 긴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정돈하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완벽한 모습으로 라티아에 나타났었지.”
곧이어 머리 손질을 멈춘 니제르의 두 검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왜, 그 인챈트로 구름 몇 개 점거해서 탑 하나 장만해 보려고?”
“내가 잘도 그런 짓을 하겠네.”
“그런데 어찌 그 인챈트에 관심을 가지는 건데?”
경계하는 니제르에게 플라움은 가느다란 어깨를 살짝 떨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엄청난 운명을 가진 자가 셀레어와 엮여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래, 알아. 그래서 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니제르에게 플라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백하듯 담담히 말했다.
“실은 내가 그 운명에 휩쓸렸거든.”
“…너 미쳤구나?”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만큼 각오한 일이기도 하고.”
니제르는 팔짱을 낀 채 콧방귀 꼈다.
“벌써 냄새를 맡은 해무의 탑 주인이 그의 추종자를 풀었을걸?”
“그 탑의 주인도 참 과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과감하고 무모한 건 너야, 플라움.”
니제르가 천천히 플라움 앞에 무릎 꿇은 채 그녀의 턱을 매만졌다.
이에 플라움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어 니제르의 손을 뿌리쳤다.
“어쩌자고 그 운명에 널 휩쓸리게 한 거야?”
묘하고 능글맞은 니제르의 속삭임에,
플라움은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말했다.
“그 운명을 가진 자가 주어진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궁금하잖아?”
“미친년.”
“위로 고맙네.”
“결국엔 너도 탈출구가 절실했던 거야. 하지만 조심해, 너와 계약한 세 개의 별이 언제까지고 널 위해 눈을 뜨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니제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라움을 지나쳐 홀연히 어둠 속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그렇게 홀로 남은 플라움은,
아주 잠깐 그 자리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세 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과거에 목격했던 일들을 일러주었어.”
쓸쓸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이내 어디론가 걸어가며 그 모습을 감추었다.
* * *
[탑은 하늘을 직조하는 베틀이라지]
[오 마법사여, 그렇다면 그 베틀을 가지고 날 위해 이별의 빗물을 직조해주시오.]
[오, 냉소적인 직조공이여 차라리 날 위해 차가운 장대비를 직조해주시오.]
[그래야 그녀와 헤어진 내 상실감을 쓸어내릴 수 있겠지.]
[그래야만 나는 다시 빈 마음을 가질 수 있겠지.]
여러 개로 땋은 머리카락이 유독 인상적인, 방랑의 냄새가 짙게 묻은 바드 하나가 낡은 주점 한편에 서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세련된 리듬과 재치 넘치는 가사를 보아하니 스스로 작곡한 곡인 것 같은데,
묻은 방랑의 짙은 냄새만큼이나 눈꺼풀로 씹었을 세상의 크기 또한 어마어마하겠지,
그의 노래는 그런 방랑에 걸맞은 아름답고 멋진 노래였다.
물론 저런 훌륭한 노래가 아니었더라도, 지금 순간만큼은 그 어떤 노래라 한들 즐거이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지만 말이야.
재키가 발품을 팔아 알아낸 이 조용하고 은밀한 술집엔 시몬 바스티유가 한자리에 모여 묵고 묵은 회포를 풀고 있었다.
여독을 풀기 위한 술잔보다는 서로의 이야기로 웃음과 슬픔을 들이켰고,
안주를 대신 한 안부로 안도와 행복을 머금었다.
나와 안드레, 케니.
그리고 촙과 비질라 사이에서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단연 촙이었다.
그의 주저앉은 한쪽 광대 아래엔 검붉은 피멍울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지만, 그런 걸로는 촙 특유의 미소를 퇴색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이전에 날렵했던 그의 인상이 조금은 험상궂게 변해버렸지만…,
글쎄, 그것 가지고 우울해할 사람은 아니지.
참으로 그리웠어.
너의 그 확신에 찬 웃음소리로 가득한 말투가.
쉴새 없이 쏟아지는 촙의 무용담에 듣고 있던 모두는 연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일찍이 마차에서 가장 먼저 몸을 굴려 떨어진 그는 나와 맥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불어난 물살에 휩쓸렸다고 했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강 하류에서 눈을 떴다고 했지.
물론 왼쪽 갈빗대가 진창이 나버려서 저주받은 관 속 구울과 같은 몰골로 바닥을 기어 인근 마을까지 갔다는데,
참으로 운이 따랐던 건지, 재난민인 줄 안 인심 좋은 마을 사람이 그를 거두어 정성껏 치료해주었다고 했다.
해서 촙은 며칠 요양을 하면서 허드렛일을 도왔는데, 그러고 며칠이 지나니 갑자기 그 마을에 탈영병이 들이닥쳤단다.
말을 들어보면 얼추 내가 탈영병을 맞닥트렸을 때와 비슷한 시기 같은데,
그쯤에 대대적으로 양 진영에서 많은 탈영병이 발생한 듯싶네.
그렇게 마을을 덮쳤던 탈영병은 무기도 변변치 않았고 오랜 도망으로 지쳐 보였기에 촙이 사람들을 데리고 주먹과 몽둥이로 그들을 쫓아냈다는 거다.
물론 그의 말이 빈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라티아에서 매튜 아저씨께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무슨 의심을 하겠는가.
나와 비질라는 그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화려하게 주먹을 내뿜는 촙을 떠올리며 입 벌리고 감탄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안드레와 케니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심각했으나 그만큼 그 상황에서 둘이 발휘했던 기지가 빛을 발했던 내용이었다.
케니의 기막힌 승마술과 안드레의 천연스러운 발상이 어우러져 결국 도주에 성공했다곤 하는데,
그 외에 별다른 말들을 구태여 아끼려는 걸 보면.
차마 설명 못 할 둘만의 비밀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숨기려고 해도 그 둘 사이에서 피어나는 애틋함을 우리로부터 감출 순 없어서.
촙과 나는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은 눈치챌 수 있었다.
잘 됐어.
처음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무엇보다 안드레와 같은 천막을 써봐서, 그가 항상 마음을 졸이며 끙끙 앓아왔던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언젠가 안드레와 따로 만나 크게 축하해주고 싶다.
이윽고,
이번엔 내가 그들에게 이야기를 제공해 줄 차례가 다가왔다.
이에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주 자세하고 세밀하게, 잔잔히 들려오는 한구석의 노랫소리처럼 말해주었다.
숲에서 있었던 일.
귀 큰 자, 베빌리와의 만남.
숲에서 벌어진 괴상한 생물과의 혈투.
다만 맥레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들에게서 괜히 걱정이나 사게 하는 것 같아 쏙 빼먹어버렸다.
마침내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그들은 모두 벙벙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겪은 이야기에 시기나 폄훼로 깎아내리려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나 그들은 내 가족들이어서.
곧장 순전한 자랑스러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연달아 내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 * *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제 이곳을 나갔는지, 한참을 노래 부르던 바드도 더는 보이질 않는다.
촙은 막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잠든 비질라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고,
안드레와 케니는 창가에 나란히 기대어 아직 여운이 진하게 남은 안도를 나누었다.
시몬 바스티유의 어른들은 아직 열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간간이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오는 단어들을 귀담아보니 제법 중대한 사안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향후 계획에 대한 거겠지.
지금 당장은 재회를 만끽하고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우리 발등엔 뜨거운 불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오늘 느꼈던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팍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엔 우린 언제나 걱정을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길 강요받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지만 또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아서.
언젠가는 그러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가 다가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가슴은 또 두근거린다.
이어 슬슬 촙과 함께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어른들의 테이블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리를 지른 것은 다름 아닌 매튜 아저씨였다.
“시몬, 잘 생각해!”
그러나 시몬은 단호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즉답했다.
“생각에 생각을 덧붙여 내린 결론이야.”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비록 뜨고 있는 눈은 하나뿐이지만 누구보다 시야가 넓었던 포키스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바깥 공기나 쐴까, 디안?”
나긋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하늘의 별들도 대부분 눈을 감은 야심한 밤 아래로 나온 나는,
서늘하면서도 시원한 공기를 흠뻑 들이켜 오만가지 생각들로 어지러워진 머리를 환기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포키스도,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흠뻑 숨을 들이켜곤 거나하게 내뱉었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건데.
슬슬 허연 입김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차가워졌네.
“포키스, 무슨 일이에요?”
내 물음에 포키스는 술집 바깥에 세워진 난간에 기댄 채 답했다.
“디안, 아무래도 포드에서 ‘큰 건’을 치를 것 같아.”
“그게 무슨…?”
“본격적인 도망의 성사도 결국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결정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입에 담은 말이 포키스에게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그의 입에선 아까와는 달리 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가는 도중에 죄 없는 민가를 털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결국엔 우리도 악인이라 더러운 돈을 만져야 떳떳할 수 있어. 결정적으로 이건 시몬 바스티유의 정체성 같은 거기도 하니까.”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포키스는 곧이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계획이 있어 보스가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인 이상 우린 그저 믿을 수밖에.”
어느새 밤하늘은 푸르게 식기 시작했다.
덩달아 눈 뜨고 있던 별들도 하나둘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