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94화 (94/365)

94화. 급류 (3)

이른 아침,

시몬은 가족 모두를 깨워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렇게 낡은 테이블에 둘러 모인 우리 앞에,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시몬은 늘 그렇듯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운을 뗐다.

“밤새도록 재회의 기분을 만끽했는데도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 같군그래.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만 모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 말에 어제 밤새도록 털어냈음에도 남아 있던 안도감에 나와 내 또래 가족들은 모두 은연중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매튜 아저씨와 맥레인 만큼은 굳은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아직 지독한 숙취 때문에 몇몇은 고생을 좀 했겠지만 말이야, 그렇지 매튜?”

시몬은 그런 매튜에게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고, 그제야 매튜는 식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모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모두에게 벅찬 것이었으니까.

시몬은 이제 가족 모두와 시선을 맞춰가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쉽지만 지금부터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집중해야 할 거야.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거든…, 매튜?”

이어 매튜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정리한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 보였다.

“중립지역 전체가 우릴 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앤서니 트라이던트, 라티아 남쪽의 귀족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순례자들까지.”

매튜가 설명을 채 잇기도 전에 재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슬슬 그들끼리도 충돌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지.”

이번엔 맥레인이 재키의 말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공통된 목표가 변하는 건 아니야, 어찌 되었든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라는 걸 명심해.”

순간 테이블 위로 올라온 묘한 긴장감.

잠자코 있던 시몬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매튜가 내게 이러한 정보들을 일러주면서 기회라는 단어를 썼었지. 그래, 확실히 이러한 상황은 되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어.”

매튜 아저씨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우린 그 기회를 도망의 발판으로만 삼아야 해.”

시몬 역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조건 멀어지는 것만이 답이 아니야, 멀어진 그 이후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배는 어떻게 구하고? 민가를 대상으로 약탈이라도 할까?”

맥레인은 고개를 까딱이며 난색을 보였다.

“일단은 안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야, 시몬.”

“맥레인, 우리에게 안전이란 단어는 이제 없어. 적어도 중립지역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맥레인에게 대꾸한 시몬의 말을 이어 재키가 냉소를 쏟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린 확실한 것이 필요해. 안전을 확보하고 싶다면 그 안전을 확실하게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그러자 곧 묵묵히 이야기들을 듣고 있던 포키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포드에서 큰 건을 어떻게 무슨 식으로 진행할 건데 보스? 우선 뭐가 되었든 그것부터 들어봐야겠어.”

이제 시몬은 양손을 테이블에 얹은 채 상체를 숙여 은밀한 목소리로 가족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이번엔 라티아처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없게끔 치밀하고 빈틈없는 동선을 짜야겠지.”

이에 재키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시몬의 말에 바짝 따라붙었다.

“또 라티아 때처럼 목표물이 되려 우리 발목을 잡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테니, 그것을 상정해서 훔칠 목표물을 정해야겠고 말이야.”

재키의 말에 매튜 아저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난쟁이 조합의 채권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허나 그런 매튜 아저씨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재키는 두 눈을 번쩍이며 대꾸했다.

“역시, 우리 조직의 참모답다니까.”

두 번째로 보는 건가,

매튜 아저씨의 이마에 굵직한 핏대가 솟은 건.

“굶주린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꼴이군.”

이를 꽉 문 채 작게 중얼거리던 매튜 아저씨의 매서운 표정에 재키는 얼른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맥레인은 버릇처럼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는 곧 감색 연기와 함께 단호를 뱉었다.

“너무 위험해, 다 죽을 거야.”

“이봐 맥레인, 난쟁이 조합이라고 해봤자 상대도 결국 지하세계에 처박혀있는 범죄자들이야. 포드의 혈관을 주름잡는 깡패 새끼들의 채권을 훔치는 거라고.”

재키가 바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을 붙여보지만,

맥레인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감색 연기를 연거푸 낼 뿐이었다.

“매튜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도망뿐이야.”

“맥레인, 이 답답아! 어차피 놈들은 서로 우릴 노리려고 달려들다가 끼리끼리 부딪치게 될 거라고! 그리고 뭐가 걱정이야?! 네가 있잖아?!”

이어 재키가 흘깃거리며 날 보며 말한다.

“그리고…, 디안…”

“그 주둥이 싸물어.”

맥레인이 적나라한 살기를 드러내며 재키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보다 못한 매튜가 그 둘을 중재해야만 했다.

“둘 다 그만해.”

나도 나서서 재키에게 몇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매튜 아저씨의 말을 따르기로 한 나는 구태여 입을 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상황을 주시할 뿐.

하지만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

보스가 하는 이야기도, 매튜 아저씨와 맥레인이 하는 이야기도 저마다 타당한 이유가 들어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채권이란 걸 가짐으로써 진정 우리가 중립지역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채권을 포기하고 그대로 포드를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중립지역을 벗어날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져버리는 기분이다.

다시 좌중을 압도하듯 시몬은 낮고 근엄한, 그러면서도 특유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우린 포드 혈관을 주름잡는 난쟁이 조합을 턴다.”

그가 결정을 내리자 맥레인도 별수 없다는 듯.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다만 이번 건은 전적으로 매튜의 지시를 따라줬으면 해.”

다 핀 연초를 테이블 위에 비비며 씁쓸함을 뱉었다.

* * *

전체를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난쟁이 조합이 주는 인상이 무엇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탄크레빌에서 만난 그 열성적인 난쟁이에게 들었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말이야.

확실히 난쟁이 조합은 이름 그대로 단일 종족으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그 폐쇄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짙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조합의 구성원들이 포드의 혈관을 주름잡는 대단한 범죄자들이라면.

그 조직도에서 우러나올 뿌리가 얼마나 엉켜있을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시몬 바스티유라는 가족의 유대만큼 끈끈하지는 않겠지만, 그들 역시 어쨌든 한 울타리 개념으로 만만찮은 결속을 보여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우리는 그 뿌리 속을 헤집어 맺혀있을 굵직한 열매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니,

이렇듯 다시 뿔뿔이 흩어져 탐문을 해야만 했다.

역시나 시몬의 지시에 따라 나는 맥레인과 같이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시몬은 항상 나와 맥레인을 한 조로 편성했던 것 같아.

“맥레인.”

“왜.”

“어떨 것 같아요, 이번 큰 건 말이에요.”

“시몬이 결정을 내렸으니 무조건 탈 없이 마무리 지어야겠지.”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로서가 아닌, 맥레인 개인의 생각을 물어본 거예요.”

내 말에 맥레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젠 나도 모르겠어.”

“…뭘요?”

“시몬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아, 라티아에서의 일로 재키와 붙어 다니면서 자연스레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맥레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그는 한 번도 시몬을 의심하지 않고 따랐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의 두 눈엔 뭔지 모를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이미 도출된 결과를 쥐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이젠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맥레인의 모습을 보니,

그래, 그 말대로 참 많은 것이 변한 것 같다.

해서 맥레인이 내비친 불안감에도 공감이 갔다.

그래서일까, 지금 느낀 이 감정을 기회 삼아 아침에 테이블 사이에서 느꼈었던 기묘한 불안감을 맥레인에게 털어놓았다.

“맥레인, 재키가 제 이름을 거론했을 때…,”

“명심해, 디안.”

그러자 맥레인은 내가 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멈춰 나와 마주 섰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건 핀잔이나 경고 같은 것이 아닌,

믿음.

맥레인은 순전히 나를 향한 믿음을 내비치며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말을 이었다.

“고작 화약 따위에 반응해 불타오를 만큼 너는 이제 나약하지 않으니까.”

난 그런 그의 믿음에 부응하듯,

당신이 아비베오에서 나라는 놈을 벼려냈듯.

유감없이 굳건하게,

반짝이며 답했다.

“네, 맥레인.”

* * *

혈관 탐문을 끝마치고 가족이 다시 한곳에 모였을 때.

우린 제법 많은 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다.

첫째, 무에르 반시

일찍이 맥레인과 함께 혈관을 통해 포드에 들어왔을 때, 길잡이가 거론하기도 했던 그 조직은 데비 반시가 이끄는 난쟁이 조합 ‘무에르 반시’였고, 이 무에르 반시가 바로 우리가 할 큰 건의 핵심 목표물이었다.

둘째, 세탁.

매춘, 암시장, 길라잡이 등 무에르 반시가 소화해내는 사업들은 대부분 현금 장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포드의 4대 상단은 공식적으로 무에르 반시를 부정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그들이 벌어들인 돈엔 검은 칠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막대한 자금 중 일부는 양지로 흘러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기도 했지만, 그 유통의 매개는 대부분 무에르 반시를 통해 먹고 사는 휘하 업계 종사자들이었다.

따라서 무에르 반시는 결정적으로 자금을 세탁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다음으로 설명할 게 셋째, 채권이다.

채권이란 것은 난쟁이 사회에선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거래 방식이라고 한다.

본디 그것은 용의 시대.

세기를 주름잡던 기업들로부터 전해져 온 유물 같은 거래 방식이었지만,

그 방식에 있어 현대 난쟁이 조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자연스럽게 난쟁이 사회에 흘러들어 고착되었단다.

난쟁이들은 조합 그 자체가 하나의 상표와 같았는데, 그러한 상표의 가치를 올리는 것은 역시나 기상천외한 기술력이었다.

다만 그런 추상적인 기술력에 정확한 값을 매기는 데에 애로사항을 느낀 그들은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성을 접어두고,

기술력을 담보로 그냥 편한 숫자로 값 매긴 채권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채권은 한 조합의 기술력을 살 수 있는 신뢰의 보증수표였고.

동시에 같은 조합끼리는 물론 타 종족과의 거래에도 물꼬를 트게 만들어 주어 폐쇄적이던 난쟁이 사회의 빗장을 풀어버린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무에르 반시는 바로 이 채권을 통해 자금을 세탁했다.

난쟁이 조합의 특징인,

‘우리가 남이냐’를 이용해 벌어들인 현금으로 타 조합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으로 말아지.

우리는 바로 이 채권을 털어야 한다.

수많은 조합의 기술력을 살 수 있는 보증수표를.

단 열 장만 가로채도 운만 좋으면 라티아에서 가져왔던 그 거대한 마차 하나만큼의 금화를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시몬은 말했다.

이윽고 서로 간의 정보 교류를 마친 우리는,

슬슬 큰 건의 본격적인 착수를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배배 꼬인 혈관을 가로질러 가던 남자가 이내 미리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에 멈춰 섰다.

그러자 곧 사방에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여러 사람이 튀어나왔다.

이에 나타난 그들에게, 방금 도착한 남자는 후드 속 인위적으로 빛을 묻힌 눈동자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찾았다.”

그 말에 왼편에 서 있던 남자가 되묻는다.

“세 사람 모두?”

“아니, 늙은이 하나만.”

잠깐,

뭔가 이상하다.

중립지역의 순례자는 상위 포식자에 군림하는 존재들이건만, 그런 그들이 방금 막 생소한 감각을 느낀 것이다.

“누가 우릴 미행하고 있는데.”

곧장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들 가운데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 존재감은 볕이 들어온 그림자처럼 증발하듯 사라졌고, 그것을 느낀 순례자들 가운데 하나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립지역에서 이 정도 수준의 기척 차단을 익힌 자라면…, 누군가 엔트로피를 고용했나 보군.”

미약하나,

똑같은 목표물을 쫓는 자들 사이에서 방금 막 첫 충돌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