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급류 (4)
“했던 얘기완 너무 다르잖아, 깃발 양반.”
멀끔한 민머리,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그리고 전체적으로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중년의 남자가 맞은편 상대에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새겨진 흉터와는 어울리지 않게 둥글둥글한 눈매를 가진 남자는 누가 봐도 선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가진 인상과는 달리 꺼벙한 모습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채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끼어 있는 일이라면 돈을 곱절로 받아야겠어. 그게 아니라면 난 여기서 손 뗄 거야.”
그런 남자의 행동에 맞은편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 하나가 허벅다리에 매고 있던 검 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이미 받은 돈은 그대로 꿀꺽하겠다는 거냐? 베이르 가문이 물로 보여?!”
하지만 사내의 반응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민머리 남자가 아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리스, 뭐 하자는 거야?”
“영주님…!”
“어딜 기사 나부랭이 새끼가 테이블 위를 넘보고 있어?”
열 손가락 가운데 반 이상에 채워진 금가락지를 번뜩이며 손을 흔든 남자는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사를 뒤로 물렸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곧이어 민머리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니, 그 사과를 받은 남자는 괜찮다는 듯 귀찮은 표정으로 턱을 까딱였다.
“당신이 끌고 다니는 기사들은 다 저렇게 수준 미달인가?”
“신출내기라 어쩔 수가 없네, 깃발을 향한 충성이 과할 시기니 이해를 부탁하지.”
“음, 그런가.”
민머리 사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 기사 놈의 출신은?”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재차 건너편 남자에게 물었다.
“평민 출신이나 아비가 물려준 갑옷 덕분에 기사가 됐는데, 가진 실력도 출중해 내 요긴하게 쓰고 있네.”
이어지는 그의 답변에 민머리 사내는 알겠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버렸지 뭐야.”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기사, 리즈에게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맞은편 남자는 그저 눈썹만을 살짝 일그러트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가온 기사에게 민머리 사내가 말했다.
“애새끼야, 여긴 중립지역이거든. 제아무리 깃발을 두른 놈들이라고 해도 이곳에 발 딛고 서 있는 이상 뒤지기 싫으면 사려야 할 줄 알아야 해.”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물고서 거칠게 기사를 밀어붙인 남자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팍에 채워져 있던 단검을 기사의 턱에 꽂아 넣었다.
그 동작은 기민한 짐승의 눈으로도 한 번에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재빨랐다.
그르럭, 그르륵.
한 줄기 바람결이 스쳐 지나가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
기사는 흰자를 드러내며 꺽꺽거리다가 이내 바닥에 힘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잠깐 사이에 거나한 흥분을 느꼈을까, 어느새 송골송골 땀 맺힌 이마를 번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민머리 사내는.
피 묻은 단검을 쥐고 있던 손등으로 한껏 이마를 휩쓸며 태연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그런 그의 도 넘는 무례함에 맞은편 남자는 한참을 심사숙고하다가.
“부디 실수로라도 내 영지엔 발 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주키. 그땐 아주 정성 들여 꼬치에 꿰어 줄 테니까.”
비장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그러자 주키라 불린 민머리 사내는 깔깔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 보였다.
“킥킥… 칵칵칵!! 글쎄 내가 그놈들을 못 잡아주면 네게 영지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할까? 아, 아마 그 영지 위에 네 가족 전부가 꼬챙이에 꿰어 뒈져있겠지, 깃발을 뒤집어쓰고 왕관을 등진 채 처먹었을 비리 덩어리들을 다 토해낸 채로!”
“…그만 입 닥쳐, 주키! 엔트로피인 네가 더 잘 알 거야!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적으로 두는 순간 나중이 고단해진다는 걸…!”
“그러니까 씨발 좀 주제를 알고 먼저 조심하라니까? 알겠지?”
둥그스름한 눈매를 뚫고 나오는 날카로운 주키의 안광에,
맞은편 남자는 아랫입술을 피나도록 깨물다가.
“계약금은 그쪽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지.”
겨우 울분을 토하듯 말한 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키.
주키 바튼.
일찍이 단신으로 엔트로피를 달성한 사냥꾼인 그는 암살 의뢰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살인광이었다.
그가 엔트로피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냥했다고 알려진 것은 셉템(7) 트로피에 해당하는 ‘기울어진 자’
본디 기울어진 자는 학살이 자행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정체가 넋 잃은 강력한 사념을 먹은 시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살인광인 주키 바튼이 기울어진 자만을 사냥하고 다니면서 엔트로피를 달성해냈다?
당연히 그러한 정황은 주키 바튼에 대한 소문을 무성하게 만들어 주는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소문이 뭐냐면, 기울어진 자의 탄생 배경에 그가 개입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신빙성 있는 이야기 말이다.
해서 같은 엔트로피는 물론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그 어떤 원정대 길드조차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했다.
물론 주키 바튼은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는 광인이었지만.
* * *
“눈동자에 새겨진 세 사람 중 하나를 발견했다 들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장신의 남자가 동굴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묻자,
“앤서니 트라이던트를 털었던 시몬 바스티유의 핵심 인물 가운데 가장 늙은 남자를 찾아냈습니다.”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보고했다.
“그래서?”
그러나 그 보고가 흡족하지 않은 듯,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강압적인 투로 되묻는다.
“그들의 본거지는?”
슬슬 심기가 불편한지 드러난 팔뚝에 잠들어 있던 근육을 꿈틀거리던 남자의 모습에,
주위에 잠자코 있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들을 계속해서 추적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지 못했다?”
“우리와 같이 시몬 바스티유를 노리는 무리로부터 미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에게 미행을 붙였다?”
기가 막힌다는 듯, 후드 속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드러낸 남자의 반응에 여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즉답했다.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저희는 적어도 그를 엔트로피급 사냥꾼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방금까지 보였던 위압적인 모습과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좋은 판단이었다, 제아무리 맹금의 둥지라 해도 갈까마귀의 부리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의 누그러진 반응에,
주위에 우뚝 서 있던 이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바닥에서 무릎을 뗄 수 있었던 남자는 우두머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갈레아 님.”
“기다린다. 어차피 때는 찾아올 테니 맹금이 될 바에야 차라리 갈까마귀가 되는 게 유리해.”
그러면서 갈레아는 엄청난 크기의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고심했다.
이거, 잘못하다간.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난장에 들어온 것 같군.
하지만 상관없다.
난장에 판을 결정짓는 것은 어차피 순례자인 우리일 테니.
* * *
포드의 중심부.
막강한 세력을 가진 상인들이나 포드를 주름잡고 있는 4대 상인이 아니고서는 접근조차 불가한 그곳은,
음지인 혈관은 물론이고 당장 인근에 있는 양지의 거리조차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 청결함과 고고함이 빈틈없이 격리되어 있었다.
그러한 길 한가운데.
일찍이 어느 골목길에서 일어났던 싸움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 나왔었던 거상 오리반의 집행자.
마브가 특유의 퀭한 눈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며칠 동안 방치된 갈색 더벅머리,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
누가 봐도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행색을 한 그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막대 사탕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한참 빨아먹어 반쯤 녹아버린.
이윽고 다섯 개의 별이 그려진 간판이 있는 건물 입구에 그가 도착하기 무섭게,
그 문을 지키고 있던 중무장한 사병들이 깍듯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고생해라.”
상단의 병사들에게 심심찮은 인사를 전한 그는 이제 아까와는 달리 빠릿빠릿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건물의 가장 은밀한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달한 겹겹이 쌓인 문마저 모두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너, 실내에선 장갑 벗으라고 했잖아.”
방 안쪽에서 노파의 따끔한 잔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번에 떨어진 막대 사탕을 잡아채려다가 복도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놨으면서 말이야.”
“그건 정말 뼈아픈 실수였답니다, 대모님.”
“사실 복도는 몇 개가 잿더미로 변해도 상관없어, 너랑 네가 낀 그 장갑이 상할까 봐 그게 싫은 거지.”
“높은 숲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어디 그렇게 쉽게 상하겠습니까?”
“그래도 조심하라는 거야, ‘마이스터’가 만든 열화된 인챈트는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노파의 끈질긴 잔소리에 결국 마브는 장갑을 얼른 벗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살피던 노파가 사무적인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탑에서 온 자들이 포드에 들어왔습니다.”
마브의 대답에 노파는 들고 있던 서류를 얼른 내려놓았다.
“다른 상단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정보는 말끔히 통제해놨습니다. 운이 좋게도 그들이 저희 상단의 소관인 남쪽 문을 통해 들어왔거든요.”
노파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콧대를 연신 주무르며 말했다.
“그냥 신경 끊는 게 낫겠어, 저들의 소란으로 우리 상단이 피해받지 않는 이상은 가만히 있자고. 곧 중립지역에 불가피한 전쟁이 벌어져. 우린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두 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박아놓는 데에만 집중해야 해.”
과연, 대 상단의 주인다운 통찰이십니다요.
마브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선 그대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밑에 애들을 단속하겠습니다.”
하지만 노파는 그러면서도 씁쓸함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드는 이미 앤서니 트라이던트가 무작정 들이붓는 정치로 인해 질척한 선동이 발목까지 쌓여 있는 상태에다, 남쪽 깃발들은 여러 상단에 접촉해 협박 아닌 협박으로 정보를 거래하려 들고 있었으며.
방금 마브의 보고로 순례자들의 유입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낀 거다.
지금 중립지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포드가 쥐고 있구나라는 걸.
그리고 그로 인해 균열이 난 포드는 곧 무너지게 될 거라는 걸.
* * *
큰 건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포키스의 시야를 위시해 진행한 탐문은 수월을 넘어서 마치 입을 뗀 아이의 말 붙는 속도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우리는 이미 큰 건에 대한 모든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낡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시 한자리에 모인 우리 앞에, 곧 시몬이 설명을 이었다.
“반 빌레니어, 귀 큰 자가 운영하는 은행으로 무에르 반시의 채권이 보관된 곳이야.”
그 말에 재키가 작게 이죽거렸다.
“난쟁이 놈들, 암만 생각해봐도 주도면밀하단 말이야. 난쟁이 조합이 귀 큰 자의 은행을 이용해 돈세탁하고 있을 줄 누가 예상했겠냐고?!”
이어서 매튜 아저씨가 그런 재키의 이죽거림을 무시한 채 차분한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반 빌레니어의 위치는 포드 중심지 인근이야. 일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이곳에 집중되겠지.”
시몬은 매튜의 설명에 덧붙여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니 번뜩이는 벼락 마냥 모든 일을 빠르게 끝마쳐야 해.”
이제, 시몬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이용해 우리 모두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강요받아왔던 상실의 시대는, 내일 우리의 손에 의해 그 막을 내리게 될 거다.”
그 연설엔 점점 힘이 실려서,
시몬의 격해지는 감정이 생생히 전달될 정도였다.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들아, 우리의 마지막 계획이다.”
시몬과 재키의 기대,
안드레와 촙의 흥분.
케니와 안나의 초조.
매튜와 포키스의 불안.
맥레인의 걱정.
개개인의 묘한 감정들이 테이블 위에 섞여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 가운데 나는,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아마도 희망이지 않을까.
그래, 희망으로 결정했다.
적어도 테이블에 섞인 소용돌이 가운데, 희망 정도는 섞여 있어야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