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96화 (96/365)

96화. 낭떠러지

비질라는 안나와 함께 새벽을 거닐며 보았던 거리의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큰길 한가운데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맞춰, 마주 앉아 있던 매튜 아저씨가 묵묵히 누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또 길의 폭은 굉장히 넓었는데, 이른 새벽에도 마차들이 많이 다녀 시끄러웠어요.”

종이 위에 잉크 먹은 촉을 거침없이 놀리던 매튜 아저씨는 이내 쓰고 있던 단 안경을 고쳐 잡곤 질문했다.

“그 거리엔 어떤 가게들이 있었니?”

“대부분이 환전소와 집 같았어요.”

“그 길엔 말이 통과할 만큼 큰 골목길이 있었니?”

“있긴 했지만 대부분 쇠창살로 막혀 있는 상태였어요.”

쓱쓱.

어느새 매튜 아저씨의 손에 들린 종이엔 생생한 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해서, 환전소와 집들이 있는 거리 한가운데에 반 빌레니어가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비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그러나 직후 비질라의 덧붙임에 매튜 아저씨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게 뭐지?”

“어느 마차도 그곳엔 멈추려 하지 않았거든요.”

이 말에 멀리서 잠자코 듣고 있던 재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야 귀쟁이 새끼들이 운영하는 곳이니까.”

이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매튜 아저씨는 완성된 그림을 비질라에게 내밀었다.

“제법 비슷하니?”

“네, 틀린 부분이 있지만요.”

“그럼, 부탁하마 비질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질라는 머릿속에 각인되다시피 한 기억들을 꺼내 거침없이 그림을 수정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림에 열중하는 비질라를 뒤로 한 채,

매튜 아저씨의 신호에 따라 시몬이 우리 모두를 따로 불러 모았다.

“어때, 매튜?”

이어 팔짱을 낀 시몬의 물음에 매튜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번 건은 너무나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감당해야 할 위험도 크다는 거야.”

그 말에 시몬이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시몬 바스티유가 어디 계획대로만 움직였을까!”

그리곤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을 잇는다.

“만스타인 세공소를 생각해봐, 고작 지도 하나 갖고 무모하게 움직였으나 결국엔 디안이라는 대단한 결실을 얻었잖아?”

이에 질세라, 재키가 시몬의 말에 맞장구쳤다.

“반대로 앤서니 트와드를 생각해보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짜서 움직였음에도 막판에 지랄 맞게 수틀려버렸잖아?”

그래, 맞는 말이다.

모든 일은 결국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맥레인도 그 말만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시몬이 특유의 쇳소리가 가득한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늘여놓았다.

“반 빌레니어는 무에르 반시의 세탁소야, 심지어 운영의 주체는 귀쟁이 놈들이지. 그럼 바꿔 생각해보자고. 우리가 잠깐의 조사를 통해 반 빌레니어가 범죄 조직의 세탁소라는 걸 알아낼 정도면 포드의 거대한 상단들은 진즉에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거다.”

그 말에 가족 모두가 순식간에 집중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걸까? 단순하다, 이유가 없기 때문이야.”

시몬은 회심의 미소와 함께 테이블 위를 양손으로 내려쳤다.

“이곳은 중립지역이야. 공동체는 있으나 그를 위해 개인이 일말의 희생을 지불할 용의는 없는 곳이지. 상인들은 괜히 나서 손해를 볼 생각이 없는 거야. 애초에 손해를 감수하고 움직였다면 그것을 더는 상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

“따라서 반 빌레니어 건에 한해서는 포드의 상인들이 개입하지 않을 거다?”

포키스의 질문에 이번엔 맥레인이 감색 연기와 함께 대답했다.

“맞는 말이야.”

맥레인의 지지가 더해지자 시몬은 더욱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게다가 반 빌레니어를 관리하는 주체는 귀쟁이들이다. 중립지역에서 그들은 항상 소수이며 또 고립되어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기피되는 존재들이지.”

“해서 그놈들이 털리건 말건,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조차 없을 거고. 그렇지 보스?”

재키의 맞장구에 시몬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연스럽게 재키가 시몬의 뒤를 이어 테이블에 다가와 우리 모두를 집중시켰다.

“추가로 이번 건엔 내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여러모로 계획을 짜기가 수월할 거야, 그놈들은 어느 변칙적인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한 베테랑들이니까.”

그런 재키의 모습에 매튜 아저씨는 불편함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갑자기 네 가족의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이건 시몬 바스티유의 일이야.”

그러나 그 대답은 재키가 아닌 시몬의 입에서 나왔다.

“재키도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야, 매튜.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고. 때가 때이니만큼 일의 성공과 가족의 안전이 제일 우선시 되어야 하잖아.”

“시몬, 꼬리가 길면 잡힐 수 있어.”

“괜찮아, 그 꼬리를 노리는 사냥꾼이 하나가 아니니까. 심지어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길 마다하지 않는 놈들이기도 하고.”

매튜의 불안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시몬은 이제 결정이라도 된 듯 우렁찬 목소리로 선포했다.

“해가 가장 드세게 떠 있는 시간에 실행한다. 매튜, 각자에게 걸맞은 역할을 부여해주도록 해, 나는 재키와 함께 마저 상의할 것이 있으니까, 참.”

시몬은 퍼뜩 떠오른 표정으로 맥레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맥레인은 디안과 함께 다니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시몬은 재키와 함께 건물 밖을 나섰다.

* * *

“어쨌든 일이 시작된 이상, 최대한 철저하게 움직여보도록 해보자고.”

매튜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옮겨 그린 여러 장의 그림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그런 그에게 맥레인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해봤지만,

“매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시몬에게 말합시다. 우리 둘이라면 충분히 그를 말릴 수 있을 거예요.”

매튜 아저씨는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맥빠진 미소를 지으실 뿐이다.

“솔직히 말할까, 맥레인? 나도 욕심이 나.”

“어떤 욕심 말입니까?”

“이번 일을 정말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때, 우리가 거머쥐게 될 그 평온 말이야.”

“정말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성공할 거라고 믿어야지. 늘 그랬듯이.”

이어 매튜 아저씨는 맥레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어떤 말을 속삭이셨다.

그 말에,

맥레인은 잠시 굳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평상시 모습으로 대번에 돌아왔다.

이제 지도를 모두 받아든 우리에게 매튜 아저씨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큰길에 들어서면 재키의 동료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마차가 주차되어 있을 거다.”

그려진 지도의 특정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설명하던 매튜 아저씨는 이내 촙과 안드레를 지목했다.

“촙과 안드레는 준비된 마차를 타고 큰길 양 끝으로 이동해 사고를 위장해 길을 틀어막도록 해. 마차의 이동량이 많은 길이니만큼 한 번 마비됐을 때의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할 거다.”

안드레는 그 설명에 손을 번쩍 들어 질문했다.

“그다음은요?”

“사고를 낸 직후 마차에서 말을 따로 빼내 반 빌레니어로 합류해. 그때쯤이면 투입 조도 일을 끝마치고 나와 있을 테니.”

“알겠어요.”

뒤이어 매튜 아저씨는 날 바라보았다.

“디안 너는 맥레인을 따라 반 빌레니어로 들어가 시몬과 재키가 채권을 얻을 때까지 밖을 살펴야 해.”

“네, 매튜.”

“케니는 안나와 비질라를 데리고 포드의 북쪽 문을 통해 나가서 미리 약속한 합류 지점에서 대기하렴. 만약 하루가 다 지나도 우리가 오지 않는다면…,”

케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릴게요.”

이에 매튜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답한다.

“그래.”

매튜 아저씨는 이제 우리 모두를 애정 섞인 눈빛으로 한 번 더 훑으며 말했다.

“우린 언제나 성공하리라 믿지만, 그 믿음이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법은 없기에…,”

그것은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이었고.

“실패를 맛볼 수도 있겠지만, 다치지 말고 죽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라. 나는 적어도 그걸 성공이라 말하고 싶다.”

또 그의 바람이었다.

* * *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안나 아주머니는 그 짧은 사이에 우리의 얼굴을 가려줄 검은 천을 만들어 나눠 주었다.

케니는 우리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안드레와 포옹하곤 고삐를 잡아 들었고.

비질라는 내게 내일 읽을 책을 준비해 놓을 테니 얼른 오라 말하고는 촙과 안드레에겐 한껏 앙탈을 부렸다.

이윽고 선두에서 고삐를 당긴 케니를 따라 안나 아주머니와 비질라가 떠나자, 시몬과 재키를 필두로 우리는 큰 건을 치르기 위해 움직였다.

촙과 안드레는 미리 언질 된 장소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고, 매튜는 그런 그들을 지휘하기 위해 따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포키스가 매튜의 뒤를 따라 사라지고 나서야,

반 빌레니어의 침투조인 네 사람만이 남았다.

시몬, 재키.

맥레인, 그리고 나.

그렇게 거침없는 걸음으로 양지에 발을 들인 우리는 즉시 목표가 있는 큰길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큰길은 말들의 뜨거운 입김에 잔뜩 열 올라 있었다.

마차 바퀴는 있는 힘껏 바닥을 긁으며 소란을 일으켰고, 그러한 소란 가운데 그 누구도 우리 네 사람에게 시선을 두는 이는 없었다.

슬슬, 시간이 임박했는지 시몬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재키의 눈에도 초조함이 묻어 반짝인다.

맥레인은 담담히 허리춤에 매여 있는 낡은 아밍 소드 자루에 손을 얹었고,

나도 그를 따라 셀레어의 자루를 손에 집은 채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큰길 양 끝에서 동시에 일어난 소란.

그 소란에 시끄러움이 집중되기 시작하기 무섭게.

우리 네 사람은 안나 아주머니가 준 검은 천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반 빌레니어로 향했다.

벽 위로 덩굴 식물이 올라탄 거대한 건물.

반 빌레니어.

그곳 정문에 도달한 재키와 맥레인은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귀 큰 자 둘의 목을 두들겨 그대로 기절시켰다.

이어 시몬이 정문을 거침없이 발로 차버렸고,

뒤이어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달려들었다.

“움직이지 마! 뒤지고 싶지 않으면!”

재키는 금세 안에 있던 귀 큰 여인 하나를 붙잡은 채 윽박질렀다.

맥레인은 은행원으로 보이는 귀 큰 자를 향해 뽑아 든 검을 겨눈 상태.

나는 그런 그 상황을 모두 눈에 담고 있다가,

구석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허리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자를 발견하곤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화약을 머금은 머스킷 한 자루.

그러나 그 행동들이 너무나 느리고 뻔한 것이어서 나는 검집째로 셀레어를 휘둘러 손쉽게 그의 손에 들린 머스킷을 박살 내 버렸다.

“끝인가?”

삽시간에 정돈된 상황.

시몬은 재차 우리 셋을 살피며 묻고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맥레인이 위협하고 있던 은행원에게 다가갔다.

“채권은 어디 있지?”

“그…그그그…”

“걱정하지 마, 우린 원하는 것을 얻는 즉시 사라질 거니까. 너희들의 목숨도 보장하지.”

“금고 안에…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럼 안내를 부탁하지, 어이! 그를 따라가서 금고를 열도록 해.”

시몬이 턱짓으로 재키를 가리키자 재키는 곧장 묶은 여인을 바닥에 눕히곤 성큼성큼 은행원에게 다가왔다.

“히…익! 살려주세요!!”

“닥쳐, 누가 널 죽인다고 했어?! 넌 그저 채권이 담긴 금고에 안내만 해주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재키는 바로 은행원의 목 뒤를 붙잡아 마치 짐승의 새끼를 다루듯 질질 끌었다.

그렇게 재키가 은행원과 함께 뒤쪽 거대한 문으로 향하기 무섭게 이번엔 맥레인이 날 불렀다.

“인질들을 묶어서 한곳에 모아 놔.”

“네.”

그 말에 따라 귀 큰 여인 하나와 사내를 한곳에 모아 바닥에 엎드리게 해놓고서야.

후.

잠깐의 여유를 느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강 큰 줄기에 속하는 일 하나가 끝났구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울림 가득한 목소리가 건물 밖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시몬 바스티유, 이제 그만하고 나와라.”

구름에 비벼져 내리친 벼락처럼,

어마어마한 목소리에 일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나와 맥레인은 창가에 다가가 밖에서 벌어진 상황을 엿보았다.

그 밖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무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매튜 아저씨가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인질로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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