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97화 (97/365)

97화. 낭떠러지 (2)

준.

샬럿.

일라이.

검은 후드 자락을 휘날리며 움직이는 그들 셋의 모습은 아침 가운데 만들어진 밤 조각과 같았다.

좁고 습한 골목길을 가로지르던 그들 셋이 나란히 다음 골목 진입로에 발을 들이자,

셋은 어느새 여섯으로 불어나 있었고.

그런 그들이 다음 골목길에 진입하였을 땐,

이미 열이 넘은 상태였다.

마주치는 갈림길에서 쏟아져 자연스럽게 합류한 그 거대한 그림자 덩어리는.

해무의 탑을 추종하는 순례자들.

외로운 재해를 사냥하는 사냥꾼이자 대적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최악의 상대.

개개인이 하나 이상의 재해를 휘두를 수 있을뿐더러.

그것이 설령 열화된 인챈트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그 숙련도가 가히 절정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은 야수의 심장을 거머쥔 채 사냥감 물색에 나섰다.

“우릴 미행하는 놈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놈들의 위치를 다 파악했을 텐데.”

그중 끝이 갈라진 혀를 드러내며 탄식하는 여인의 말에 퀭한 눈을 부라리던 준이 건초 같은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러나 여인은 사나운 말투로 신경질을 부릴 뿐이다.

“그놈들이 언제 다시 양지로 기어 나올지 모르는 일이잖아.”

그때, 그 둘을 바짝 뒤따르던 민머리 사내가 얇은 입술을 놀리며 비아냥거렸다.

“샬럿, 성질 좀 죽여. 그러다 될 일도 그르친다.”

이에 질세라.

“일라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살기를 드러내는 샬럿이 주홍빛 눈동자를 번뜩인다.

하지만 그런 둘의 실랑이에 준은 되려 침착을 쏟아냈다.

“명심해라, 시몬 바스티유 일당 가운데 완벽한 셀레어를 재현시킨 실력자가 있다는 것을.”

샬럿과 일라이는 준이 쏟아낸 침착에 곧 뜨거워지려 했던 호승심을 누그러트려야만 했다.

이제 그들은 그림자가 좀먹은 골목길을 벗어나 북적거리는 양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무리의 선두를 자처했던 준은 곧장 밝음이 넘치는 광장으로 향했다.

자세히 보면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온듯한 음침함에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행색을 한 그였지만.

글쎄,

활기로 뒤덮인 거리에서 그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그와 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돌아다니는 자들이 한둘도 아니었으니.

준은 이제 아침으로부터 숨은 그림자와 같이,

광장 한쪽에 그림자 진 쪽을 골라 들어가 거침없이 왼쪽 팔을 꺼냈다.

그의 왼쪽 팔은 잿빛의 고급스러운 천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천 안쪽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준이 왼쪽 팔에 감긴 천을 풀자, 기다렸다는 듯 팔에 박힌 근육들이 요란하기 꿈틀거리며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균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눈.

다채로운 색을 가진 동공을 드러내며 괴이한 움직임으로 사방을 살피던 수십 개의 눈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눈의 움직임에 맞추어.

“엄마야!”

“와, 저기 좀 봐!”

광장 일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새들이 일거에 날아올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준의 왼팔에 박힌 눈은 곧,

방금 날아오른 새들의 시야였고.

그렇게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정보량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과연 피곤함에 찌든 그 눈두덩이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은 의외라는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남은 오른팔로 자신의 귀 뒤를 지그시 압박한 뒤 입을 열었다.

[그들이 움직인다.]

입을 열어 말했으나,

준의 목을 통해 나온 소리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방금 자신의 귀 뒤에 숨겨진 ‘작은 산’을 통해 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작은 산은 귀 큰 장인들의 절묘한 작품으로,

그걸 이식한 두 발 걷는 자를 말 그대로 작은 산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담 그 작은 산이 과연 무슨 역할을 하느냐면.

[위치는?]

[확인했다.]

[출발하지.]

같은 작은 산과의 소통.

그러니까,

산들의 속삭임에 속하는 특별한 ‘메아리’를 발산시키게 해주었다.

말 그대로 작은 산을 신체에 이식한 자들만이 허락받은.

음어.

이제 준의 귀 뒤로부터 다른 작은 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의 새를 찾았다.]

[따라가는 중.]

이내.

준의 입꼬리가,

[큰길에서 사고가 난 것 같은데.]

[늙은이 놈을 찾았다!]

[놈들이 은행 하나를 점거했어.]

소름 끼칠 정도로 솟구쳤다.

* * *

거대한 시계를 낀 포드의 마천루.

그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던 주키의 눈이 일순간 사냥감을 발견한 매의 그것과 같이 번뜩였다.

“이 새끼들 봐라.”

비죽,

누렇게 뜬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짓던 그가 이내 확 트인 시야 가운데 소란이 일어난 큰길에 시선을 집중했다.

작위적으로 날아든 새들이 큰길 쪽 난간에 모두 앉아 있는 걸 보면.

“순례자 놈들이 사냥을 시작한 건 확실한 데.”

사냥에 있어 주체가 본인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던 주키는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우선,

목표물인 시몬 바스티유엔 라티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괴물 하나가 섞여 있다.

고로 순례자들과 맞부딪친다 해도 바로 결착이 나는 일은 없겠지.

그렇다고 해도 순례자가 그들을 잡는 건 순리에 가까운 일이니 그 전에,

“광신도 새끼들부터 천천히 줄이자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광기 묻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곧 튀어나올 것 같은 눈알을 굴리며 큰길에 아직 합류하지 못한 순례자들을 살폈다.

* * *

“확실해?”

“네, 환전소 거리에 동시다발적으로 마차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입에 사탕을 문 채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은 상단 오리반의 집행자.

마브는 곧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고를 올린 자를 물렸다.

순례자가 이곳을 들쑤셨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어.

중립지역 화제의 중심인 시몬 바스티유가 포드에 있었다는 것쯤은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빠르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가만있어보자.”

마브는 주섬주섬 어지럽혀진 테이블 위를 뒤적거리다가 얼룩지고 구겨진 종이 하나를 집어 펼쳤다.

그것은 포드의 전체적인 거리가 기록된 지도.

마브가 그 지도를 통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라티아에 일어났던 그 재해가 포드에 일어나게 된다면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하지만 얼마 안 가 마브는 더벅머리를 양손으로 벅벅 헤집어야만 했다.

“계산 자체가 무의미하잖아.”

라티아의 그 소용돌이가 포드에 발현된다면,

포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마브는 다시 어지러운 테이블을 뒤져 구석에 숨겨진 작은 종을 울렸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다른 상단의 집행자들을 모두 다 호출시켜. 어떻게든 놈들을 포드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이어진 마브의 명령에,

그들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밖으로 나갔다.

* * *

재키는 막 따버린 금고 안에서 범상치 않은 반질거림이 덧씌워진 종이 뭉치를 꺼내 밖으로 나왔다.

“이것 봐 보스! 금광에서 피땀 흘려 백번 천번 곡괭이질 할 필요가 없다니까?!”

요란한 그의 쾌재에 시몬은 잠시 눈을 반짝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반대로 성가신 감각들이 이마와 귀 끝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디안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주를 욱여넣은 듯한 그의 검은 눈엔 날카로운 이채가 서려 있었다.

“맥레인.”

“그래,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서둘러 아직도 채권 다발을 세고 있는 재키에게 소리쳤다.

“감탄은 나중에 해, 재키! 이젠 빠져나갈 시간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시간도 잠시,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시몬 바스티유, 이제 그만하고 나와라.”

그 말에 나와 디안은 쏜살같이 창가에 달려들어 밖에 일어난 상황을 살폈다.

아,

이런 씨발.

큰길은 어느새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무리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무리 가운데,

매튜가.

무릎 꿇은 채로 잡혀 있다.

“시몬!”

서둘러 경직된 표정을 한 시몬을 부르자 그 역시 대번에 달려와 창가 밖 상황을 주시했다.

“젠장, 매튜!”

그 뒤로 재키 역시 허겁지겁 채권을 챙겨온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촙과 안드레는 어떻게 됐지? 포키스는?!”

헐레벌떡 디안 뒤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다시, 밖에 있던 무리 가운데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이 대치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어, 그러니 생각을 잘해야 할 거다.”

그 말에 곧바로 재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맥레인, 어떻게 좀 해 봐!”

“뭐?!”

“넌 시몬 바스티유의 집행자잖아!”

“저놈들은 순례자야 이 등신 새끼야! 우리에겐 승산이 없다고!”

한창 재키와 실랑이를 이어가던 와중,

시몬이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도 최악의 상황을 바라진 않는다! 그러니 일단 대화로 이 경직된 상황을 풀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 보자고!”

하지만 들려오는 건,

“시몬 바스티유,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

검은 후드 쓴 자의 냉소 뿐.

그러나 시몬은 위축되긴커녕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게 뭐지?!”

“우린 인챈트를 원한다, 라티아를 날려버린 그 소용돌이의 근원 말이다.”

“어디서 헛소문을 들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우린 일개 무법자에 불과해!”

“계속 말장난할 거면 끝내자고.”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어보려는 시몬의 말에,

무정한 순례자 놈은 그대로 허리춤에 있던 머스킷을 뽑아 무릎 꿇은 매튜의 뒤통수를 겨냥했다.

“잠깐!”

“기다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와 시몬이 동시에 소리치자,

우리의 절박함에 만족한 그는 손에 든 머스킷을 매튜에게서 슬쩍 치웠다.

이제 시몬은 좀 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인챈트를 넘기면 그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있는 건가?”

“그야 물론이지. 우리가 탑의 광신도라 불리긴 하나 결정적인 약속을 어길 만큼 무지하진 않아.”

나는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은,

묵묵히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집어 금방이라도 밖에 던지려 하고 있었다.

“디안…”

“어차피 우리가 꿈꾸는 미래엔 이런 병기를 휘두를 일은 없잖아요.”

그러나 디안이 결심을 굳히고 움직이려는 그 순간,

시몬이 나서서 그것을 제지했다.

“시몬?!”

“아니, 아니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시몬!”

“우릴 쫓는 조직은 저놈들 하나뿐만이 아니야, 가족 전체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최후의 보루쯤은 남겨놔야지.”

“이런 씨발, 시몬. 디안은 ‘수단’이 아니야!!”

내 반발에 재키가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맥레인, 보스한테 무슨 짓이야! 언제는 내게 존중이란 걸 발휘하라 해놓고 지금은 네가 그 존중을 밥 말아 먹고 있구나!”

“재키, 너 이 씨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시몬?!

당황한 나머지 재키와 실랑이조차 못 하던 그때.

* * *

“끝이다, 너희의 고민을 위해 쏟아줄 시간이 말이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시 머스킷을 집어 매튜 아저씨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뿜어져 나와 내 전신을 진동시켰다.

그런데,

그 순간.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나와 눈을 마주친…,

매튜 아저씨가.

웃으셨다.

처음 내게 상냥한 말투로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때의 따듯한 햇살 같은 미소로.

그리곤,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아저…,”

탕!

머스킷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

매튜 아저씨의 머리로부터 무언가가 쏟아져 바닥에 흩뿌려지고.

끝내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다.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그 충격적인 장면은,

내 뇌리에 박혀있어.

지금도 그 장면이 반복된다.

“아…”

이어 맥레인이 이를 악 문 채.

“이 개새끼들…! 매튜!!!”

악을 지르며 소리치고, 시몬과 재키 역시.

“맙소사… 매튜…”

“저놈들이 매튜를 처형했어..! 이런 개…!”

혼돈에 젖은 채 목놓아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말미에 찾아온 침묵 속에서.

나는 보았다.

시몬과 재키의 눈에서.

이제 내게서 무슨 일이든 벌어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그러나 동시에,

맥레인은 간신히 억누른 감정을 입에 머금은 채.

굳센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더는 이런 일로 인해 네가 망가질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의 찬 눈빛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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