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낭떠러지 (3)
눈 앞에 펼쳐진 상황들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어떤 감정으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은 그냥 두 귀가 먹먹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심장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파.
디안.
물에 잠긴 듯한 내 귀에 대고,
디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디안!!”
이윽고 먹먹한 귀를 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디안, 정신 차려!”
맥레인, 그가 경직된 표정과 눈빛으로 날 흔들어 깨웠다.
“맥레인.”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경황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금 벌어진 상황을 직시한 그는 내게 계속해서 소리쳐 말했다.
“일어나, 어서!”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나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맥레인의 뒤를 따랐다.
시몬과 재키 역시 맥레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런 그들과 눈 마주치기가 무서워, 차마 고개를 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맥레인, 이제 어떻게 하지?!”
“재키, 넌 뒷문이나 찾아! 시몬! 빨리 움직여야 해!”
“저 새끼들이… 매튜를 죽였어, 맥레인! 매튜를!”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기대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당황스러웠을까.
아니면 진정 매튜의 죽음에 통감하고 있는 걸까.
시몬, 당신에게 묻고 싶다.
곧바로 묘한 반발심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지금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눈에 묻은 햇살 자국처럼, 아직도 창가 너머로 날 보며 웃던 매튜 아저씨의 얼굴이 선명해.
하지만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매튜 아저씨의 미소는 금세 옅어져 사라졌다.
“여기, 뒷문이 있어!”
재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레인은 바닥에 균열이 일어날 정도로 땅을 박차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모두 이쪽으로!”
맥레인의 말에 우리는 허겁지겁 뒤따라 뒷문을 향해 빠져나갔다.
그렇게 내가 마지막으로 뒷문을 통과했을 때,
이제 막 은행을 비집고 들어온 순례자들이 보였다.
대낮.
밤 조각에 쫓기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고 기묘한 것이었으리라.
뒷문에 곧바로 연결된 골목길로 몸을 던져 미친 듯이 달려나간 우리는 곧 큰길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탕!
우렁찬 화약 소리가 큰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런… 씨…!”
이에 놀란 재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우릴 향해 머스킷을 조준한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쏜 탄환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맞추지 못했다.
곧이어,
그는 갑자기 힘없이 다리를 절뚝거리곤 상체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등에는.
화살 하나가 깊이 박혀있다.
포키스.
“어서 빨리!”
맥레인의 재촉에 다시 시작된 사력을 다한 도주.
별안간 일어난 소란에 마차와 행인들이 쏟아내는 혼란 사이를 우격다짐하듯 비집고 거슬러 올라간다.
고삐 대신 혼란을 머금고 광분하는 말과,
그에 딸려 매섭게 들이닥치는 마차 바퀴 사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지나치고,
아이의 울음과 두 발 걷는 자들에게 짓밟혀 나뒹구는 난쟁이의 아우성을 헤쳐.
앞으로, 또 앞으로 뛰었다.
그렇게 교차로에 다다르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광란의 질주에 한 차례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제동은 결코 우리에게 좋은 게 아니었다.
“맥레인, 이제 어디로 가지?!”
당황한 재키의 말에 맥레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찌르듯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가 눈빛으로 뭘 말하는지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길이 없다.
맥레인은 분명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어.
곧이어 내 감각이 맥레인의 감각을 뒤따라 사방에 모든 것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온다.
골목길에서, 각 교차로에서.
뒤편 난간에, 옥상에.
순례자들이다.
* * *
귀 뒤에 이식한 작은 산에 두 손가락을 댄 채 바쁘게 움직이는 두 순례자.
그들의 귀에만 들려오는 메아리는 깨나 심각한 상황처럼 보였다.
[저격수다!]
[외곽조는 저격수를 찾아.]
[무법자 놈들을 거의 몰았어.]
[이제 그만 끝내지.]
일이 예상한 대로 순탄하게 흐르고 있지 않음을 파악한 그들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착수하기 위해 짧고 간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격수부터.”
“준에게 새를 좀 떼어 달라고 해야겠어.”
다시, 그들은 검은 후드를 휘날리며 미끄러지듯 꺾여진 골목을 향했다.
그러나 꺾인 골목길에 진입하기도 전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었고.
“어찌 태양을 피해 숨은 그림자가 노골적인 살의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나와라. 벌레 새끼야.”
순례자 중 하나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벌레는 네가 아닐까? 더듬이 놀리는 솜씨를 보아하니 흡사 집 나간 바퀴 새끼 같구나.”
좀먹힌 어둠 속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기에 탑의 일을 막는 거지?”
“이해관계에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보다 병신같은 짓은 없어.”
성큼성큼.
골목에서 걸어 나와 완벽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주키 바튼.
그가 푸른 기운이 너울거리는 단검을 한 손으로 유려하게 놀리며 두 순례자에게 적나라한 살의를 드러냈다.
“시몬 바스티유에 제법 쓸만한 저격수가 있나 봐? 해서 말인데, 난 그 저격수에게 너희들이 좀 더 시달리기를 바래.”
그의 말에 두 순례자는 별다른 신호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한 몸처럼 동시에 움직여 주키의 좌우로 쇄도했다.
신체적 한계에 가까운, 극단적인 좌우를 통해 들이닥치는 그들의 품에선 곧.
날카로운 쇼트 소드와, 스틸레토가 동시에 번뜩였다.
하지만 주키 바튼은 헤죽거리는 섬찟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자기가 가진 힘이 곧 발휘될 테니까.
[91년, 템브리스.]
[한순간 닫힌 태양의 눈꺼풀.]
이윽고 단검 자루를 쥔 손을 가슴팍에 가져다 댄 주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어둠.
그 어둠이 번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두 순례자가 들이닥치는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골목을 집어삼켰다.
일식.
그것은 용의 시대에 나타난 잠깐의 어둠.
그 어둠이 지금 주키의 의지대로 볼품없는 골목길 위에 재현되었다.
“놈에게 인챈트가 있다…!”
“이런…!”
두 순례자는 경악을 집어먹었으나,
이미 늦은 듯.
그들의 눈동자는 검게 그을려 모든 시력을 빼앗겼다.
비록 한시적인 증상에 지나지 않을 현상이었지만,
그 한시적인 증상이 벌어지는 동안 누군가를 상대해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다른 이들에게 메아리를…,”
“아악!”
한 순례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 어디선가 다른 순례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어,
어둠 속에 은은히 퍼지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
[아쉽게 됐어! 방금 작은 산을 오를 등산객 둘이 죽어버렸거든.]
그것이 일순간 두 순례자의 정신을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주어진 상황에 순응한 두 순례자는 감각을 발휘해 서로를 등진 채 섰다.
발휘된 인챈트로 인해 그들이 가진 열화된 재해의 파편조차 써먹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최선의 최선을 찾아 승부 걸 생각으로 마음을 다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어둠 속 어딘가에서 살펴보던 주키는 환희에 가까운 떨림 가득한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이제, 제대로 노올자아…]
등을 맞댄 두 순례자 주위로 곧,
불길한 인기척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각!
팍!
찌익!
“컥…!”
“으아아!”
처절하고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 * *
처절했던 순간을 증명하듯.
골목길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피 웅덩이 위로 두 남자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단검에 전신 곳곳이 찢기고 베여 넝마가 된 그들은, 아직 온기를 잃지 않았는지 전신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러한 시체들의 옆,
골목길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한 남자는.
입은 상처를 압박하며 혼절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뒤집힌 눈을 겨우 붙잡은 채 신음했다.
사용한 인챈트의 힘으로 인한 신체 반동은 물론,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음에도 분투한 두 순례자의 살인적인 실력에.
그 역시 불가피한 피해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주키 바튼은 신음하는 와중에도 광대를 올리며 낄낄 웃었다.
“이…히히 히, 씨발…, 다음은 어디로 가지?”
좀 더,
순례자들의 발목을 붙잡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그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 *
이름 모를 건물, 작은 창 하나가 나 있는 방 안에 있던 포키스는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 손안에 있던 새는 줄곧 포키스의 한쪽 눈이 되어주었던 보라색 골다스 종.
다른 새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부리를 새초롬하게 닫은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마도 주인을 위해 지저귐을 참으려 하는 거겠지.
그래, 애썼다.
그래서인지 포키스도 덩달아 목구멍에 들어찬 슬픔을 억지로 삼켰다.
“매튜…, 이런 제길…!”
하지만 분한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어서.
덜덜 떨리는 입술로 분노를 내뱉은 포키스의 눈가는 금세 젖어 들었지만,
정신을 가다듬듯 눈물을 훔치곤 벗었던 안대를 다시 착용한 그는 침착하게 다음 장소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순례자 가운데 ‘떠 있는 눈’이 있다고.
포키스는 그것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떠 있는 눈이란,
상당한 규모의 새 떼를 운용하는 개인을 말한다.
새 떼가 날아가며 본 모든 시야적 정보를 얻어내는 그들은 인챈트가 배제된 야전에서만큼은 신에 가까운 위상을 자랑한다.
더욱이 포키스는 전쟁터를 겪어봤던 군인이었기에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비교를 해봐도,
세브리의 저택에서 날아들었던 새 떼와는 차원이 달라.
그것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두서없이 날아가 퍼졌지만,
포드에 나타난 새 떼는 목표를 포착한 뒤부터 원점 주위의 시야만을 노골적으로 파악하려는 듯 날아다녔어.
하나의 의지로 단결된 듯이 말이야.
이렇게 되면,
시몬 바스티유가 그들을 피해 포드를 빠져나갈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 말인즉.
순례자라 불리는 것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 * *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시몬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린 길 하나를 골라 돌파할 거야.”
이에 맥레인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키는 후방을 맡고 맥레인이 선두를 맡는다. 나는 중간에서 빠질 길을 물색하는 데에 집중하겠어.”
마지막으로 날 바라본 시몬은,
“디안, 너는 우리 사이에서 재량껏 움직이도록 해라.”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내게 말했다.
이제 시몬이 한 줄 떨림이 섞인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들아! 가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차의 틈바구니인 교차로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적잖은 비명과 소란이 우리가 지나치는 곳마다 일어나고, 아슬하고 아찔한 순간이 사방에서 피어나는 와중에도.
선두에 선 맥레인의 걸음에 멈춤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뒤를 계속해서 살피던 후미의 재키가,
“놈들이 몰려온다! 미…친 대체 몇 명인 거야?!”
현 상황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지르는 순간, 다음 길에 진입한 맥레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헉, 헉.”
“흐윽, 흐윽.”
네 사람 모두가 일거에 멈추고, 그사이에 거친 숨소리만이 오가는 우리 앞으론.
이미 검은 후드의 무리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맥레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디안.”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정말 기다려왔던.
“돌파한다.”
말이었다.
스릉.
검집에 뽑힌 셀레어가 바람을 울렸다.
맹세하는데,
이곳까지 꾹 참고 머금고 왔던 내 분노를 받고도…,
살아남을 순례자는 없으리라.
“매튜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