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낭떠러지 (4)
깃발 없이 힘을 가진 자,
평생 순례자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탑은 날씨로 세상을 새로이 바꾸길 원하고, 순례자는 그런 새로운 세상을 바라니까.
이 세상에 밤처럼 군림하는 그들은 오늘도 탑이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늘 그랬듯이.
갖고자 하는 걸 쟁취해낼 것이다.
당사자인 순례자는 물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두 발 걷는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잡아야만 했다.
순례자들은 다른 광신자들의 유명한 실패담을 되새겨야만 했으며, 두 발 걷는 자들은 불현듯 나타난 은빛 섬광에 따돌려진 의식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어리둥절함을 일삼아야만 했다.
첫 시작은 만들어진 폭설 한 움큼을 머금은 메이스를 쳐들고 휘두른 순례자로부터였다.
휘두르기 무섭게 주위에 성에를 몰고 다니던 그 차가운 일격은 마주 오는 시몬 바스티유의 일당에게 그대로 들이닥쳤는데,
그 휘두름과 동시에 일순간 그의 상체를 가로지르는 은빛 섬광이 번뜩인 것이다.
뒤이어 은빛 섬광이 스친 곳에서부터 피 분수가 일었고, 그렇게 무너져 내린 순례자 뒤편으로.
한 남자가 떨어지는 유성처럼 튀어나와 다음 순례자를 향해 쇄도했다.
“막아!”
중간 위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 샬럿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지만.
그 순간에도 밤은 한 꺼풀씩 치워지고 있었다.
이에 옆에 있던 일라이가 창백한 얼굴로 팔을 뻗어 나서려는 샬럿을 가로막는다.
“너, 저런 검술을 본 적이 있어? 저건 ‘비전’이다. 세대를 거치지 못하는, 망각으로 버무려진 살인기란 말이야.”
“제아무리 대단한 비전이라고 해도…!”
일라이의 침착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샬럿이 발을 앞으로 들이기 무섭게,
둘은,
지금 막 열이 넘는 순례자가 앞에서 스러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사실 일라이는 놈의 검술을 보는 순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시작부터 가진 인챈트의 힘을 쏟는구나!
근데 아니었어, 단지 힘의 상성을 무시하는 속도로 우릴 짓누르고 있었을 뿐.
“흩어진다.”
일라이는 서둘러 주위에 있던 순례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에 모인 밤 무리가 사방으로 점점이 흩어졌다.
곧이어 일라이는 샬럿을 흘겨보며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눈빛을 기다렸다는 듯.
“와라, 셀레어의 주인이여!”
갈라진 혀끝을 내밀며 매섭게 달려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허리에 둘려 있던 채찍을 꺼냈는데, 곳곳에 날붙이가 붙은 모양새였다.
대략 성인 남자 두 명의 키를 압도할 만큼 긴 채찍은 이윽고 마주 오는 남자의 몸통에 들이닥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듯.
날렵한 채찍을 피해 상체를 뒤로 꺾은 남자는 다시 자세를 회복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샬럿은 늘어진 자신의 채찍을 보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가진 무기는 단순히 날이 붙은 채찍이 아닌,
‘사복검’이었으니까.
잡은 손잡이를 살짝 틀기 무섭게,
채찍이 살아 움직이듯 요동치며 줄어들기 시작한다.
위대한 괴물, 미뤼돈의 발목 힘줄을 그대로 박제해놓은 듯 재현시킨 이 무기는 무려 검은 모루에서 만들어진 명품.
흔히 말하는 명검에 속하는 물건이란 거다.
그 탄성만으로 바위를 깨버릴 수 있는 막강한 무기가 이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사내의 뒤를 꿰었다.
하지만 다가오던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샬럿의 감각으로도 포착하지 못할 만큼, 철 늦은 계절처럼 불현듯 등장한 또 다른 남자.
그가 앞서 비전을 뽐내던 남자 뒤에서 다가오는 사복검을 가볍게 쳐냈다.
“가볍게 쳐내?”
그것도 낡아빠진 아밍소드로?
기가 찰 수밖에.
“건방진 새끼들.”
기세를 멈추지 않으려는 듯, 샬럿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번엔 사복검의 자루 끝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에,
“엎드려라!”
뒤에 물러나 있던 일라이가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샬럿이 곧바로 몸을 숙이자, 곧이어 그녀의 몸 위로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꺄아악!”
“도망쳐, 빨리!”
“우와악!!”
광범위하게 날아든 화살에 인근에 있던 두 발 걷는 자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바빴고,
그 표적이던 두 남자는 날아든 화살을 가까스로 쳐내며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결국엔 인챈트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무기의 근원적인 한계를 극복해낼 수는 없을 테지.
심지어 저들은 산처럼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 망토를 호령하는 기사가 아니었으니.
눈먼 화살로도 죽음을 각오해야 할 판이잖는가!
일라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쏴라!”
다시 이어진 그의 호령에 대열을 갖춘 순례자들의 손으로부터 떠난 시위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휙!
팍!
그때마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화살을 쳐내며 뒤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슬슬,
일이 끝날 조짐이 보이는구나.
일라이는 자신의 귀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메아리를 통해 확신했다.
[모든 길목을 통해 진입 중이다.]
[놈들의 저격수로 추정되는 자를 셋이 추적 중.]
[일행은 이미 다 내뺀 것 같은데.]
[저 무리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야 해, 상상 이상의 실력자들이야.]
그런데,
마지막에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들이.
[배후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무차별적으로 우릴 공격하고 있다.]
[살려…]
그 확신이란 것에 균열을 만들어내었다.
* * *
고통이 더해지면 나는 허리를 더욱 숙일 것이오,
고통이 배가 되면 나는 무르익을 것이외다.
이윽고 한계를 넘어선 고통이 주어지게 된다면.
나는 찬란한 모습으로 당신의 수확을 받아들일지니.
성한 곳 하나 없는 피투성이 몸.
찢긴 가죽 갑옷 사이로 드러난 신체 곳곳엔 문신과는 사뭇 다른, 신체에 뭔가를 박아 넣어 만든 각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금방이라도 마지막 한숨을 내뱉고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아 보이던 이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끈질기게 버티고 서서 막 숨을 거둔 순례자 셋을 짓밟고 지나갔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키 바튼.
그가 피로 얼룩진 면상에 한껏 주름을 먹인다.
“나는 자유야.”
그 역시 광신도였다.
다만 믿는 대상이 하늘에 박힌 별이었을 뿐.
용의 시대 이후, 이 세상을 통해 보는 하늘의 법칙도 바뀌었다.
그래서 난쟁이들은 별빛을 받아 쇠를 녹였고,
귀 큰 자들은 별의 말을 빌려 정령과 소통했지.
인간은,
여러모로 다양하게 하늘을 읽어냈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바라는 별들은 그 대가로 새로운 공식을 익힌 연금술사조차 꿈꿀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을 등가 교환해주었다.
주키 바튼이 이에 속했다.
자신이 고통을 받으면, 별은 힘을 속삭인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
하지만 발 딛는 땅 대부분은 그런 별과 사적으로 거래하는 자들을 ‘이교도’라 불렀다.
“나는 자유다, 이 씨발 새끼들아!”
별과 거래한 자들은 이렇듯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이교도들의 천적이라 불리는,
앙 실러 데우스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별과 거래를 하는 이 순간에도, 그 잘난 놈들의 종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웃기고 통쾌했으니까.
“다음은…, 어디냐!”
주키 바튼은 살가죽이 엉겨 붙은 단검으로 벽을 긁으며 성큼성큼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의뢰도 의뢰지만, 우선 자신이 얻은 이 고통이 힘으로 치환되는 쾌감을 더욱 느끼고 싶었을까.
이 엉뚱하고 악랄한 자는 다른 순례자들을 찾기 위해 다시 거리를 방황한다.
* * *
준은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라 불릴만한 일은 전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빗발치듯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어긋남으로 인해 느끼는 압박감은 그를 상당히 성가시게 만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친놈 하나는 분명 라티아와 연관된 작자들이 따로 고용한 해결사인 것 같은데,
그래봤자 샬럿이나 일라이 같은, 정예에 속하는 인원들을 붙이면 무리 없이 처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문제는,
셀레어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놈의 예상을 웃도는 능력.
물론 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다.
애초에 셀레어를 완벽하게 재현시켜냈었으니, 기본적으로 가진 재량이 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마치 멸문한 가문의 마지막 일원인 양,
서열에 밀려 방랑자 신세를 면치 못한 자인 양.
말도 안 되는 비전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또 일행으로 보이는 웬 남자 또한 샬럿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어한 걸 보면 예사 인물이 아닌 건 확실한데.
좀 더 그들을 파악해야 한다.
곧 포위망은 완벽히 좁혀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들은 불가피하게 가진 역량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되겠지.
그렇게 대강 파악이 완료되었을 때쯤은,
갈레아님이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럼 상황은 그걸로 끝.
우린 깨나 큰 재해에 속하는 소용돌이를 손에 넣을 것이고, 그것을 갈무리한 탑은 하늘의 조각을 보다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관건은,
광범위한 피해를 받게 될 포드의 움직임인가?
이미 목표물은 포위망에 들어왔기에, 준은 팔뚝에 가득 뜬 눈을 부라리며 새 떼를 포드 구석구석에 날려 보냈다.
* * *
“완전히 놈의 그물 한가운데에 들어와 버렸군.”
맥레인이 지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고작 이 정도로 치질 그가 아니었는데…,
아니지, 아직 매튜 아저씨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을 테니 맥레인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해.
재키는 계속해서 당황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아?!”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재키의 말에,
맥레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시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들의 목표는 이 검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재키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한다.
“내가 그 검을 들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어.”
그의 말에 난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흩어지는 건 맞되, 이 검은 제가 끝까지 휘두르겠습니다.”
“디안…!”
순간 욱했던 감정이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적어도…! 매튜 아저씨의 죽음과 맞바꾼 것이니 끝까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내 울분에 맥레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몬은 착잡하지만 침착한 얼굴로 우리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흩어져서 이동한다, 누구든 포드를 빠져나가는 즉시 포키스와 접촉해 다음 방안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그러나 맥레인은 시몬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먼저 떠난 가족들의 안전부터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와 디안이 최대한 시간을 끌테니…, 재키.”
재키는 크게 치켜뜬 눈으로 맥레인을 바라보았다.
“시몬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라, 저들의 이목을 끌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야 할 거다. 순례자들은 디안이 목표지만 다른 놈들은 시몬 바스티유가 목적이니까.”
“알겠어, 맥레인.”
이윽고 맥레인이,
노려보는 듯 묘한 눈빛으로 시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고, 알겠지? 시몬?”
그의 묘한 눈빛에 슬쩍,
불안함을 내비친 시몬은 이내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렇게 둘은 비좁은 골목을 통해 따로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맥레인과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맥레인…, 매튜 아저씨가 총에 맞았을 때…,”
맥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디안, 네가 보고 느낀 것. 나도 다 보고 느꼈다.”
뭔가를 부정당한 듯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맥레인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이젠 나도 뭐가 답인지 모르겠어.”
이어,
맥레인이 거친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는 작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 난…, 지금부터 끝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도 네 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걸.”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진 중립지역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받아보는, 타인의 순전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놓치기 싫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그럼…, 이따가 다시 만나자고. 대충 놈들을 따돌렸다 싶으면 우리가 있던 은신처로 모이자.”
“맥레인.”
“왜.”
“최대한 빨리 모입시다.”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몬과 재키가 지나쳤던 골목과는 다른 길로 달려나갔다.
그런 그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셀레어를 굳게 붙잡고 다시 큰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애초에 이렇게 서로 떨어질 수 있게 된 게 내겐 잘된 일이야.
꼭 죽여야 할 놈이 있거든.
활을 쏘도록 지시했던 그놈.
그놈만큼은 오늘 분명 내 손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