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00화 (100/365)

100화. 낭떠러지 (5)

똑똑히 기억한다.

매튜 아저씨를 처형한 놈의 모습을.

그놈은 이후에 다시 우리 앞을 막아선 채 활을 쏘도록 지시했었지.

처음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갈망해본 적은.

그리고 두렵다.

그 갈망이 어쩌면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모조리 없애기로 했다.

“찾았다, 셀레어의 주인.”

골목길, 어스름을 뒤집어쓴 내 앞에 나타난 세 명의 순례자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친다.

“절대로 놈에게 접근하지 마.”

그중 한 명이 곧 손목에 걸린 작은 쇠뇌로 날 조준했다.

동시에 양옆에 있던 장정들은 후드 속에 파묻힌 자신의 귀 뒤에 손을 얹기 바빠 보였다.

일찍이,

어스름이 가진 방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픽!

당겨진 시위가 풀림과 동시에 작은 화살이 사납게 뛰쳐나온다.

그것은 곧장 내 심장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노려와 박혔으나, 예상한 대로 어스름을 뚫진 못했다.

다만 그로 인한 충격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타는 듯 아려오는 고통에 어금니를 씹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의 지척까지 도달하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후드 속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머리가 검은 철로 벼려진 도끼, 가드가 손등을 뒤덮는 형태를 띤 브로드 소드.

나머지 하나는, 하늘에서 건져온 것 같은 초승달 모양의 소텔.

찰나의 순간,

그들이 가진 무기로부터 어떤 궤적이 그려질지.

상정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눈으로 헤아린 나는 즉시 쇼텔 쪽으로 셀레어를 찌르듯 내질렀다.

카각!

그러자 특유의 굽이진 날로 쇄도하는 내 셀레어를 감아 쳐내는구나.

예상했던 바다.

그 일말의 부딪침으로 인한 반동에 나는 전신을 가감 없이 맡겨, 그대로 쥐고 있던 셀레어를 크게 휘둘렀다.

놈의 쇼텔로 인해 새로운 궤적을 그릴 기회를 얻은 셀레어는 그렇게 은빛 실선을 뿜어내며.

경로상에 걸쳐진 세 명을 한 번에 베어버렸다.

이게 바로,

맥레인이 목숨을 걸고 완성 시킨 내 검술의 첫 장.

팟!

은빛 실선을 따라 뒤늦게 세 순례자로부터 핏방울이 튀겼다.

그렇게 스르르 쓰러진 그들의 뒤로, 이제 막 내게 달려드는 수많은 순례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로서는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야만 승산이 있었기에,

곧바로 들이닥치는 순례자를 향해 나아갔지만.

그들 역시 내가 엿보는 가능성을 모두 간파한 듯 활과 쇠뇌를 이용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쌔액쌔액.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머금은 채 날아드는 십 수발의 화살.

그러나 포키스가 가진 활에 버금가는 장력은 아니었기에 어스름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엔 생각을 바꿨는지,

활을 쏘던 무리 중 두어 명이 치기를 참지 못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건 기회다.

저들이 나와 싸울 동안 활이 날아올 걱정은 없을 테니, 최대한 저들과 검을 섞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해.

판단을 마치기 무섭게 더욱 빨리 바닥을 치달아 거침없이 셀레어를 휘두른다.

하지만,

달려든 그들은 내 검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셀레어는 늘어진 은빛을 흘리며 그대로 달려든 순례자 가운데 하나를 베었다.

그렇게 베어진 순례자는 마치,

낮게 가라앉은 운무를 헤집어 놓은 것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러한 내 움직임을 통해 휘날린 어스름으로부터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쏴라!”

그놈이다.

매튜 아저씨를 죽인 그놈.

쏘아진 수많은 화살.

그리고 그중 하나가 순식간에 어스름으로부터 드러난 내 허벅지에 박힌다.

“크윽…!”

이에 맞춰 반대편 골목길에서 두 순례자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너희들도 한낱 운무인 것이냐,

아니면 때를 노리고 달려드는 실체인 것이냐.

알아내는 방법은 검을 휘두르는 것일 뿐.

아,

셀레어는 그렇게 두 장정을 동시에 꿰는 궤적으로 휘둘려졌지만, 그 무엇 하나 베지 못했다.

“쏴!”

다시 날아든 화살, 하지만 보다 더 기민하게 움직인 나는 어스름으로부터 철저히 숨어 간신히 방어했다.

느껴진다.

이건 분명 인챈트의 힘.

이어서 순례자 무리가 또 쉴 틈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허상?

실체?

허상이라기엔 너무나 실체 같고.

실체라기엔 허상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렇게 지척에 다가온 순례자 하나가 자신의 몸만 한 워해머를 번쩍 들어 내려찍었다.

쾅!

바닥에 들이박힌 워해머가 진득한 불똥을 토해낸다.

놈은 실체다.

간신히 그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피한 나는 망설임 없이 셀레어를 휘둘렀다.

그의 목을 꿰기 무섭게, 뒤에 바짝 들러붙어 있던 다른 순례자 하나가 연이어 아밍소드를 휘둘러 오자,

곧바로 그마저 처리하기 위해 셀레어를 크게 휘둘렀지만.

그것은 허상.

꽤 큰 동작이었기에 드러난 빈틈도 컸던 걸까.

동시에 빗발치듯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내 옆구리에 들이닥쳤다.

퍽!

대부분을 막았으나 또 하나를 옆구리에 허용시켰다.

“헉…헉…!”

짙은 고통이 거친 숨에 섞여 내 코와 입 주위에 걸쭉히 묻어 나온다.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인챈트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저들에게도 그 무서운 것을 보여주기로.

* * *

[91년, 아페루네스]

[세상에 전염된 신기루]

일라이,

그가 큰길로 들어서는 골목길 끝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일찍이 그가 가진 인챈트, 아페루네스라 불리는 세상의 거짓된 단편이 저 골목길을 뒤덮은 지가 벌써 몇 분이 지났을까.

슬슬 그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로 지독한 기만전술을 이렇게나 오랜 시간 버틴 자가 있었던가.

뭐,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셀레어의 주인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냥해왔던 사냥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완벽한 재해를 구현해낸 이력이 있었으니 해무의 탑을 모시는 순례자로선 과감한 도전이 아닐 수가 없었어.

중립지역에 저런 엄청난 사냥감이 나타난 적도 없었고 말이야.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대단했던 녀석도 여기서 끝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가 패배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후유증.

완벽한 재해를 구현해낸 이력이 있었다는 건 틀림없이 엄청난 기량을 가진 거라 말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로 인하여 얻게 될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거란 소리가 되지.

두 번째는.

그가 어떻게든 저 골목길에 펼쳐진 신기루를 파훼한다고 해도,

인챈트를 가진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샬럿, 준.

그리고 해무의 탑 최고의 순례자라 불리는 갈레아님까지.

애초에 셀레어의 주인에겐 승산이 없다.

일라이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일라이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아리송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어서 그가 귀 뒤에 심어둔 작은 산에 손가락을 얹어 골목길에 있을 순례자들에게 메아리친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과연 ‘비전’인가.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조우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실로 치가 떨릴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구나.

인챈트를 배제한 순수한 육체로 빚은 기술이 이렇게나 찬란할 줄이야…,

일라이는 담담히 듣고 있을 다른 순례자에게 메아리쳤다.

[다음 진입 조, 골목길로.]

1차로 투입한 순례자들이 비전 하나에 도륙을 당해버렸나 본데.

살짝 아쉽긴 하다.

바로 눈앞에서 한 번 보고 싶었…,

─────!

느꼈다.

같은 인챈트를 지닌 자로서.

지금 막,

엄청난 힘을 담은 무형의 파장이 저 깊은 골목길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는 것을.

일순간 일라이는 그 파장에 예리했던 사고를 증발 당했으나,

겨우 발휘한 침착함으로 겨우 온 힘을 다해 메아리쳤다.

[모두 흩…!]

파아악!

깊은 골목길, 그 한가운데에 나타난 풍압.

그것은 아이의 숨결조차 들어갈 길 없는, 한계치까지 압축되어 더 이상의 용적이 불가능한 바람.

그게,

일순간 날붙이의 모습으로 성형되어 바닥으로 내리쳐진다.

굉음이 고막을 잡아먹고,

위력이 미치지 않은 주위 모든 창이 깨져 반짝이고 날카로운 비를 쏟는다.

삐이이-

웬 발정 난 새가 고막에 부리를 박은 채 지저귀는 것 같다.

일라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좀처럼 이명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 두 귀를 양팔로 감쌌다.

그런데,

왜 왼쪽 귀는 가려지지 않는가.

“어…억…”

그제야 일라이는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자신의 왼팔이 잘린 것을 볼 수 있었다.

골목길로부터 뛰쳐나온 풍압이 그대로 자신의 팔까지 가른 것이다.

털썩.

넋을 잃은 일라이는 그 자리서 무릎 꿇었다.

그런 후유증을 겪었는데도, 셀레어의 바람결을 품고 있었단 말인가.

이내 침묵만이 감도는 골목길 안에서,

누군가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너무나 지쳐 보였지만, 덕분에 빚은듯한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였다.

일라이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그냥,

궁금했으니까.

경이로움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호기심을 내비치는 건 두 발 걷는 자들만의 축복이었으니까.

“디안이다.”

“디안…,”

그 말을 끝으로, 아름다운 사내는 힘든 몸을 겨우 움직여 일라이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렸다.

* * *

양팔에 가득 새겨진 문신을 드러낸 채, 묵묵히 포드로 들어선 덩치 큰 남자.

해무의 탑 순례자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칭송받는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붕 난간에 걸터앉아있던 새가 그를 빤히 내려다본다.

“…,준. 일이 상당히 엿같이 진행되고 있었나 보군.”

그 새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곧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아 포드 중심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깨나 강력한 기운이 두 군데서 느껴지는데.”

그러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는 대번에 포드에 자리 잡은 강대한 힘의 근원을 포착했다.

[80년, 실레시움]

[하늘 거울에 묻은 정적]

그가 가진 초인적인 인지력의 바탕은 바로.

인챈트, 실레시움.

그것은 거대한 바다를 정지시킨 무풍으로.

그 존재 그 자체로 거대한 무풍지대와 같아 일말의 변화쯤을 포착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두 기운 가운데,

더욱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쪽이 셀레어의 주인이겠군.

남자는 고삐를 돌려 곧바로 그 기운을 쫓아 움직였다.

이윽고 도달한 비릿한 어둠이 도사린 골목길.

말에서 내려 그곳에 진입한 그는,

이내 그 기운의 근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벌써 한바탕 전투를 치렀는지, 열에 가까운 순례자가 바닥에 그림자처럼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껄렁한 모습으로 계단에 걸터앉아있던 초로의 남자가 인기척을 드러냈다.

“아마도 네놈이 우두머리겠지.”

“뭐야, 일부러 날 이쪽으로 끌어들인 거였나?”

“딱 보면 모르겠냐, 병신아.”

거친 입담을 늘여놓던 초로의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바닥에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레어의 주인이 너였는가?”

“나겠냐?”

비아냥거리던 초로의 남자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와 마주 섰다.

그런 그의 손엔 낡아빠진 아밍소드가 들려 있다.

“중립지역에 너와 같은 녀석이 있었다면 내 모를 일이 없었을 텐데.”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군.”

“됐다, 말 섞는 것도 피곤하니 금방 끝내주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그리고 그 격돌만으로,

방금 어느 골목에 일어났던 엄청난 풍압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이어 그 한 번의 충돌 뒤로,

쭉 태연한 모습을 보여왔던 순례자들의 우두머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 ‘피 끓는 자’였구나…!”

그러자 초로의 남자가 히죽 웃는다.

“그래, 증발시켜야 할 것이 있었거든.”

“대체…, 정체가…!”

“그만 뒤져라.”

초로의 남자가 허리를 한껏 비튼다.

이어 들고 있던 아밍 소드를 휘둘렀을 때, 그의 상체는 일순간 수채와 같아 보일 정도로 흐릿해졌다.

팍!

그의 움직임에 뒤늦게 따라붙은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해무의 탑을 모시는 순례자,

그 우두머리인 갈레아는 그렇게 바람의 비명을 끝으로 머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초로의 남자는 그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콜록. 콜록.

갑자기 튀어나온 기침에 상체를 입 밖으로 뱉어내듯 격하게 꿈틀거렸고.

금세 지친 표정으로 자신의 기침에 묻어나온 피를 보며,

잠시 드러난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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