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낭떠러지 (6)
촙과 안드레는 아직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포드 인근의 숲 초입에 들어섰다.
“정말 이곳에 모이기로 한 거 맞아?!”
안드레의 물음에 촙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런 그를 대신해 한참 뒤에서 말을 끌고 오던 케니가 입을 열었다.
“각자 맡은 역할을 마치는 즉시 이곳에 모이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거지?”
안드레가 눈썹을 치켜뜨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기 무섭게.
숲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야, 왜 이렇게 늦어?!”
이윽고 숲 안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사내.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잔뜩 경계하고 있는 세 사람을 맞이했다.
“넌 누구지…?!”
“난 보우다, 재키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야.”
젖은 듯이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그 가운데 한 뭉치가 이마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온 미형의 사내는 촙의 날 선 물음에도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답했다.
이에 촙과 안드레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디안이 시몬 바스티유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그를 데리고 인근 마을로 내려갔던 적이 있었지.
그때 재키의 동료들도 그 마을에 있었다는 얘기만 들었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 둘은 짧은 끄덕임 속에 여러 의문과 이해를 나누었고.
이내, 촙이 먼저 나섰다.
“좋아,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어?”
“그래, 어린아이 하나랑 여자 하나.”
“안나 아주머니랑 비질라도 무사히 탈출했군!”
“따라와라, 이미 그들은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우호적인 남자의 태도에 세 사람은 무거웠던 마음을 아주 살짝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무성한 숲 사이를 헤집고 나아가길 한참.
바닥에 그 작은 햇살 조각 하나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곳에 다다라서야,
바위 사이에 임시로 쳐놓은 움막들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오빠!”
기다렸다는 듯, 움막 안에서 뛰쳐나오는 한 소녀.
“비질라!”
안드레가 대번에 달려나가 그녀를 껴안고 들어 올렸다.
케니 역시 뒤따라 나온 안나를 발견하곤 말없이 그녀와 짧은 포옹을 나눴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다 무사한 거니?!”
금방이라도 걱정이라는 게 뚝뚝 방울져 떨어질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안나 아주머니에게.
케니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촙은 평정심을 유지한 채 덤덤히 대답했다.
“남은 가족들 모두 각자 맡은 일을 끝내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그래,
이번 일은 시작부터 뭔가가 잘 맞춰 들어간 느낌이었어.
애초에 안나와 비질라를 먼저 인솔해 빼내기로 했던 케니가 되려 돌아와 뒤늦게 포드 밖을 나서는 우리를 인도했을 정도로.
상황은 제법 여유로움이 느껴졌었다.
그러니 분명 남은 가족들도 속속들이 포드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거야.
그래야만 해.
뒤늦게 다가온 안나 아주머니가 덤덤한 촙의 어깨를 붙잡자.
결국엔 그도 감추고 있던 불안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젠 되려 촙이 안나 아주머니에게 아무 일 없을 거란 위로를 들어야만 했다.
* * *
지금 몸 상태로는 빨리 걷는 것 정도가 한계다.
화살을 허용했으면 안 됐었는데.
마음만 먹었다면 두 화살 중 하나만큼은 틀림없이 쳐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이것도 결국 겪고 난 이후의 감상일 뿐이다.
상대가 가진 인챈트를 헤아리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공격이었어.
다친 몸 때문인지 더욱 예민해진 감각을 사방에 흩뿌리며 골목에서 골목으로 옮겨 다니길 몇 분.
일어난 소란에 모두가 도망쳤는지 그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집요하던 순례자들도 언제부터인지 증발하듯 사라졌고 말이야.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허…억…!”
순간,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극심한 통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슴 통증.
처음 느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잠했던 그 통증이 불현듯 내 가슴을 억누르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인챈트의 힘을 사용해서?
아니면, 상처 입은 내 몸 때문에?
어쩌면 이 고통은 그 경이로운 회복력에 수반되어 있는걸 지도.
“크…윽…”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친 신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내 발 근처에 피어오른 무언가를 발견해,
상체를 숙여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틀림없다.
그것은 검은 잉걸불.
왜?
어떤 의지도 상관없이 또 이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아니야, 이 상황은 내게 있어 결코 불가항력 적인 것이 아니야.
충분히,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다고!
통증에 반발하듯 가슴을 몇 대 두들긴 나는 억척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다시 내 몸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휘둘리게 할 순 없다.
무엇보다,
맥레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어.
마음을 다잡고 겨우 자리에 우뚝 서기 무섭게.
느껴진다.
흩뿌린 내 감각을 헤집고 달려드는 무수한 무리의 기척들이.
검은 잉걸불은,
바로 이것 때문에 피어올랐나?
지금이라면 저들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서?
천만에.
오히려 증명해주마.
가진 운명을 주도하고 휘두르는 건 바로 나라는 것을.
굳세게 잡은 셀레어를 뽑아 든다.
이에 반응하듯 셀레어는 검집으로부터 뛰쳐나와 마주한 바람을 가르며 서슬 퍼런 소리를 내뿜었다.
* * *
“샬럿! 준의 새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 우린 지금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라고!”
“닥쳐!”
검은 밤 조각 무리 사이에 오가는 날카로운 고성.
선두에서 가장 빠르게 달려나가던 여인은 갈라진 혀끝을 드러낸 채 가진 분노를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일라이가 죽었다.
지금 샬럿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동료애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해무의 탑을 추종하는 순례자들 가운데 기만전술에 있어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일라이가 당했다는 건.
어쨌든 셀레어의 주인이 그의 기만을 뚫고 나왔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
그만한 힘을 소비한 셀레어의 주인은 분명 지쳐있을 거다.
“근처에 놈이 있다!”
샬럿은 자신의 감각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안광을 번뜩이며 더욱 빨리 땅을 박차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놈과 대치할 테니 너희들은 가진 화약을 놈에게 모두 소비하도록 해, 알겠어?!”
격앙된 샬럿의 지시에 뒤따르던 순례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여러 골목으로 나뉘어 진입했고,
뒤이어 샬럿이 목표물이 있는 골목에 홀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들어선 골목 한가운데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샬럿은 천천히 자신의 사복검을 뽑아 땅에 흩뿌려놓듯 질질 끌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살펴,
골목에 흩뿌려진 혈흔을 발견하곤 비아냥거렸다.
“그리 오래 끌진 않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샬럿의 몸으로부터 쏜살처럼 튀어 나가는 검.
그것은 굶주린 뱀과 같이 요란하면서도 치명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남자의 가슴을 꿰었다.
아니, 상대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냈다.
이어지는 샬럿의 신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경이로운 탄력.
이에 사복검은 그녀 주위를 춤추듯 출렁이며 목표물을 향해 몇 번이고 들이닥쳤다.
퍽!
쾅!
그때마다 검이라는 병기가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우악스러운 파괴력을 내놓는 공격에 골목길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샬럿은 얼굴을 구겨야만 했는데,
셀레어의 주인에게 이렇다 할 직격타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복검은 이 땅에서 보기 힘든 무기일뿐더러, 심지어 명품에 해당하는 물건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일 텐데.
그러한 미지의 무기를 이미 간파한 듯 움직이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마저도,
그 잘난 ‘비전’에 속한 능력이란 말인가!
개소리!
샬럿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좀 더 본격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제 사복검은 그녀의 신체와 한 몸이 된 듯 움직여 목표물이 아닌 주위 모든 것들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 잘난 비전이라고 해도 그에 비견될만한 갑주를 입은 기사 같은 게 아닌 이상.
사복검에 기인한 압도적인 사거리를 극복해낼 수는 없는 일.
그뿐만 아니라 지금 주위엔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은 채 샬럿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순례자가 수십이 넘는다.
승패는 이미 가려졌다!
그녀 역시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오기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샬럿은 기어코 상대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깨부수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 했다.
해서 샬럿은 서서히 앞으로 향했다.
이내,
상대의 특이할 만큼 영롱한 두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마도 해볼 만한 거리라고 생각했겠지.
샬럿은 자기도 모르게 갈라진 혀끝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다.
사복검은 보기와 달리 숙련도에 따라 까다로움의 깊이가 다르지, 너는 그 깊이에 빠져 헤엄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샬럿이 허리를 튕겨내며 결정적인 위치에 사복검을 휘둘렀다.
이내 검 끝이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
처음이다.
샬럿은 순간 잡은 사복검의 자루로부터 느껴지는 반발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카각!
놈의 검과 처음으로 맞부딪친 그녀의 감상은.
“이런…!”
경악.
어느새 결을 타고 두 번, 세 번.
사복검을 내려쳐 탄성을 모두 죽인 그가 그녀의 코앞에 다가왔다.
이윽고,
“아악!!”
뒤로 재빠르게 물러난 샬럿은 날 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손가락 세 개가 뭉텅이로 잘려버린 왼손을 붙잡은 채.
* * *
요란하고 화려하지만, 그 움직임의 결은 단순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맥레인이 휘두르는 검에 비하면 저것은 한없이 더디어 보여.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상대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어, 지금 내 신체로는 상대의 탄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크아악, 이 개새끼…!”
욕지거리를 내뱉던 여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 살기가 지나치던 바람마저 가라앉게 할 정도로 흉흉하다.
이윽고 그녀가 자루 끝, 폼멜에 손바닥을 부딪치곤 자세를 달리한다.
이건,
인챈트다.
“큭…!”
서둘러 방어 자세를 잡았지만,
이미 살아 움직이듯 요동친 사복검이 내 신체를 결박한 뒤였다.
물론 이에 그치지 않고 사복검의 그 움직임으로부터 뛰쳐나온 파동만으로 일대 외벽과 창문을 모조리 박살 내버렸다.
과연…, 엄청난 힘이다…!
“쏴! 저놈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려!”
끝이다.
결박된 이 상태에서 어스름으로부터 드러난 곳에 총격을 받는다면, 제아무리 날 쥐고 흔들려는 미지의 것도 극복해내기 힘들 거야.
일말의 순간.
나도 결국 죽음이 두려운 한낱 인간에 불과해서.
검은 잉걸불이 다시 한번 날 휘둘러주길 바랐지만,
이내 차분해진 나는 담담하게 눈을 감고 마주 오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날 옥죄는 사복검의 압력만이 느껴졌을 뿐.
다시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나와 그녀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매서운 표정으로 모두에게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선포했다.
“이 이상.”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 드러난 순례자들의 뒤로 총을 겨누고 서 있는 자들의 모습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포드를 망가트리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손에 들고 있던 막대 사탕을 다시 입에 문 채 뭉개진 발음으로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전부 다 꺼져라.”
* * *
두 장정이 급하게 말을 몰아 숲 안쪽까지 단박에 도달했다.
이에 맞춰 움막에서 튀어나온 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제일 먼저 극렬한 반응을 보인 건 촙이었다.
“보스!”
그의 부름에,
시몬은 어두운 낯빛으로 말에서 내려 촙의 어깨를 감쌌다.
“촙, 안드레…, 케니와 안나 비질라까지 모두 무사했구나.”
그의 표정과 힘 잃은 말투를 듣기 무섭게,
저 뒤에 있던 케니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럼에도 촙은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들 무사한 겁니까? 나머지 가족들 말이에요!”
그러자,
시몬은 잠시 재키와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나누다가, 이내 일그러진 얼굴을 땅에 처박듯 숙였다.
“미안하다, 상황이 벌어졌을 땐 이미…, 모두를 잃은 뒤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