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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102화 (102/365)

102화. 낭떠러지 (7)

별안간 포드에 날아들었던 새 떼가 약속이라도 한 듯 부랴부랴 한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새 떼 아래,

밤 조각을 두른 한 무리가 말을 타고 급히 줄행랑을 치듯 떠난다.

그 선두,

새 떼의 주인인 준은 아직도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고삐를 치댔다.

보았다.

그 수많은 눈으로 정확히 보았어.

해무의 탑을 추종하는 순례자 가운데 무려 10년을 넘게 최강자로 군림하던 갈레아가 단칼에 죽어버리다니!

준은 이날 처음으로 피식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밤을 두르고 재해를 사냥하는, 명실상부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순례자였던 그였기에 그 느낌은 더욱 극명했으리라.

저 말도 안 되는 포식자는 누구인가.

그 한 줄기 의문이 준의 마음을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헤쳐야만 했다.

단지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애초에 갈레아를 단칼에 베어버린 직후,

그 남자는 일찍이 준의 존재를 인지한 듯 근처에서 염탐하고 있던 새를 노려보았다.

마치 더 달려들어봤자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듯이.

셀레어가 문제가 아니었어,

지금 중립지역엔.

순례자 따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맹수가 있다.

“준님! 아직 샬럿님이 포드 안쪽에…!”

뒤따라 고삐를 치대며 따라오던 순례자 하나가 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 미친년이…!”

남아있는 인챈트라도 갈무리해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지금.

샬럿의 행동은 준이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두려움마저 날려버릴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순례자들 가운데 인챈트를 가진 이가 둘 이상이나 죽은 걸 알면, 다른 탑의 추종자가 우릴 가만히 두질 않을 거다…!”

사태의 심각성을 설파하던 준은 순간 고삐를 다잡고 말머리를 다시 포드 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 씨발…!”

어느 피식자가 포식자가 있는 곳을 재차 들어간단 말이냐.

그놈의 명예를 운운하는 기사들이 아닌 이상 말이다.

“죽던지, 죽여서 나오던지. 그건 그녀의 몫이다. 우린 일단 해무의 탑으로 돌아간다!”

준은 혀를 차며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준의 결정에,

몇몇 순례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극한의 대치상황.

그 가운데 상황 중재에 나선 마브가 이마 위로 식은땀 한 방울을 흘려보냈다.

인챈트를 가진 두 사람을 가로막았으니 그 중압감을 생각하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모두 포드에서 나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개입하겠다.”

애써 담담하게 그들에게 말했지만,

“지랄, 이깟 장사치들의 둥지 따위는 내 안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다친 손을 가슴에 댄 채 으르렁거리는 여인의 살기는 더욱 짙어져 갈 뿐이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지금 꺼지지 않으면, 해무의 탑을 추종하는 밤이 포드를 뒤덮을 거다. 최소 몇 년 동안은 아침을 못 보게 되겠지.”

이어지는 여인의 협박에 마브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밤이 찾아오건 말건,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이곳에서 넌 확실하게 죽는다.”

“그리고 너도 얼마 안 가 확실히 죽겠지.”

여인의 으름장에,

마브는 태연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뭐?!”

“난 장사치거든. 포드가 마음만 먹으면 인챈트 하나를 못 구할까?”

“이 새끼…!”

여인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채 마브를 노려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듯 느긋한 자세로 설명을 이었다.

“네가 모시는 그 탑이 세상의 유일한 것도 아니고, 만약 우리가 구한 인챈트로 기꺼이 수고를 감수할 탑이 있다면 너희야말로 곤란해지지 않겠어?!”

여인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다.

동시에 검 자루를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는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뭐 인챈트를 포드에 반입하는 순간 이 상인 연합은 금세 분열되겠지만 파멸보단 확실히 낫겠지. 아, 그리고 말이야.”

마브는 곧 고개를 돌려 사복검에 묶여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밤, 그 밤 중에서도 별빛조차 묻지 않은 듯한 어스름을 두르고 있던 그를 바라보던 마브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저 여인보다,

어째 저놈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

짧은 감상을 남긴 그는 제 몸 가누기도 벅차 보이는 그의 상태를 보곤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야. 중립지역 전체를 요동치게 만든 명분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바로 이후 이 땅에 벌어질 모든 일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게 된다는 뜻이야.”

이걸로 상황은 정리됐다.

제아무리 미친놈이라 해도 이 이상 선을 넘는 행위는…,

“시끄럽게 중얼거리기나 하기는, 역시 장사치 새끼들은 일단 혀부터 잘라놓고 봐야 한다니까.”

아니,

그녀는 마브의 예상 그 이상으로 미친 사람이었다.

“나, 샬롯 디그엠이 말한다. 탑의 광신자들이여 이 썩어빠진 곳을 모조리 불태워라. 오늘 우리는 인챈트를 쟁취해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녀의 선포가 떨어지기 무섭게.

* * *

탕! 탕탕!

사방에서 화약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가 봄꽃 만개하듯 피어올랐고.

동시에 수많은 단말마와 고성이 골목길을 중심으로 빗발치듯 교차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그러나 샬럿은 해죽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 웃을 뿐이다.

날카로운 눈을 두어 번 굴리는 것만으로도 순례자가 몇이나 남았는지 파악한 그녀는 이내.

[89년, 쟌 쿨투스.]

가지고 있던.

[땅을 침범한 바다의 군세.]

인챈트의 힘을 마음껏 개방시켰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

그 파도가 담고 있던 무지막지한 파장의 힘이 들고 있던 사복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 !

파장에 밀려나 허옇게 질린 바람결이 사복검을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 나가고.

파바박!

그 파장에 스치는 모든 것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픽!

동시에 샬럿의 코에서 핏줄기가 우악스럽게 뛰쳐나왔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멈출 줄 모르고.

“쳐라, 파도여.”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살벌하게 움직이며 작게 읊조렸다.

다시 한번 시작된 무지막지한 파장.

그것이 골목길을 끼고 있는 건물들을 모조리 무너트리기 시작한다.

“셀레어의 주인이여, 어떤가. 고통스러운가!”

코피를 흩뿌리며 외치던 그녀의 눈엔,

사복검에 속박된 채 막중한 충격을 애써 참고 있는 보석 같은 남자가 보였다.

“톡톡히 느끼고 뒈져라, 사냥감이 사냥꾼을 물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이미 마브는 첫 번째 충격을 정면으로 들이받고 벽에 처박힌 상태.

생존한 순례자들도 이제 막 상인 놈들을 처리하고 무리를 갈무리해 진형을 갖추려 하고 있다.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야.

그때,

벽에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사내가 덤덤하게 기어 나왔다.

그는 이내 끼고 있던 장갑을 매만지더니,

곧장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자 길게 뻗는 샬럿의 사복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강렬한 불꽃.

“이깟 열화된 인챈트 따위…!”

하지만 샬럿은 기세 좋게 다시 한번 충격파를 분출했다.

그러나 그 막대한 충격파에도 불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복검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째서 열화된 인챈트가…!”

당황한 샬럿에게,

벽에 박힌 탓에 막 부러진 이빨 하나를 뱉으며 다가오던 마브는 처음으로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일갈했다.

“이건 그냥 열화된 인챈트가 아니야, 무려 마이스터의 작품이지.”

“그래봤자 가짜는 가짜다!”

샬럿은 결국 마브를 상대하기 위해 사복검을 본 모습으로 복구시켜야만 했다.

“그 이상 힘을 쓰게 되면 너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이어지는 마브의 이죽거림에,

샬럿은 기차다는 듯 피식 웃으며 보란 듯이.

가진 검의 푸른 기운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샬럿과 마브는,

숨 막히는 대치 속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듯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이성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그들의 감각을 빼앗았으니까.

* * *

속박이 풀렸다.

전신을 저릿하게 울리던 충격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육체는 끈 잃은 인형처럼 힘없이 휘청였지만, 반대로 의식은 이상하게도 끔찍하리만큼 또렷하다.

벌어진 현 상황을 정확히 직시한 나는,

이제 판단을 내렸다.

내 눈앞에 있는,

모든 두 발 걷는 자는 적이다.

그리고 내겐 아직,

품고 있는 바람결이 두 개나 남아 있으니.

“흐읍…”

호흡을 크게 들이마셔 휘청이는 육체를 다잡은 나는 양손으로 굳게 잡은 셀레어를 위로 치켜세웠다.

그러한 동작에 묘한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일거에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겼지만.

이미,

늦었어.

[87년, 셀레어]

[두 개의 산을 깎은 세상의 소용돌이]

세상 일부를 깎아낸 소용돌이,

그 일부에 속하는 한 줄기 바람이 내 검 끝에 실려.

운명의 노래를 부르는 두 손에 의해 휘둘려진다.

────── !

고막을 잡아먹는 굉음.

그리고 특유의 은빛 재질인 이터누티와 터져나가는 바람결에 맞물려 뿜어져 나오는 섬광.

그로부터 뛰쳐나간 극악의 검기가 골목길을 관통하고.

파생된 충격파는 마주한 모든 것을 밀어낸다.

이윽고 검기가 스친 자리,

장갑 낀 사내는 잘린 자신의 어깨를 보다 허망한 표정으로 쓰러졌고,

마찬가지로 상체 전반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인 역시 입에서 기다란 피를 토해내며 휘청거린다.

난 그런 그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 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셀레어를 들어 올렸다.

“단칼에 베어야…, 할 거다…, 안 그럼 끝까지 살아서…, 널 죽여버릴 테니까…!”

여인의 이죽거림에,

나는 담담함으로 화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 내겐 한 줄기의 바람이 남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바람결을 실은 검이 기울어져 떨어진다.

팍!

허옇게 질린 바람의 비명과 함께 일순간 주위에 몰아닥친 바람.

그 바람에 두둥실.

여인의 머리가 휘청였다.

* * *

현장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게 끝난 듯 보였다.

잘도,

두 인챈트를 상대로 이렇게나 싸웠구나.

단지 검 놀리는 법만을 가르쳤는데, 그저 다룰 수 있는 바람결 몇 개만 불어넣게끔 해주었을 뿐인데.

너는,

윤택하게 빛나는 기사처럼 장대하게 서 있네.

이제는 골목길이라 부를 수 없는, 재해가 난무했던 그 현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디안에게.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디안은 그런 내게 절뚝거리며 다가와,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 지척에서 쓰러져 혼절했다.

나는 쓰러진 그를 조심스럽게 업어 들었다.

그 어떤 요인에도 휘둘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휘두르며 개척을 달성한 그에게 어떤 찬사를 보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 가는 상처를 입은 그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날 눈떴을 때 느낄 그 괴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아, 그러니까.

“메리안…, 그대와 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었다면, 지금쯤 딱 디안의 나이였을 텐데. 분명 디안처럼 대단하고, 또 대범하고…, 그랬을 거야. 그렇지…?”

콜록콜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습해오는 기침.

그러나 업고 있던 디안에게서 손을 물리칠 수 없어 입 밖으로 방울진 피를 그대로 토해낸 그는.

묵묵히 빠른 걸음으로 포드를 빠져나갔다.

* * *

주키 바튼.

그는 언제 잃었는지 모를 의식을 차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사지가 묶여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인지하려 하는데, 웬 멀끔한 남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다.

“꽤…, 솜씨가 좋았어.”

그는 대뜸 주키에게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싸우는 방식이 꽤나 인상적이었거든.”

“넌 누구지?”

“하지만 넌 주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지 못했어.”

“누구냐고 물었다!”

은발을 말끔히 뒤로 넘긴 남자는 주키의 물음에도 계속 자기 할 말만을 늘여놓고 있었다.

“하나 알려줄까?”

남자는 조용히 주키에게 고개 숙여 머리를 들이밀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포드가 발칵 뒤집힌 지 사흘 지났거든. 고로 넌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다는 소리야.”

“그게 무슨…?!”

“네 하는 일이 너무나 시원찮아서, 위에서 결국 명령이 떨어졌어. 직접 중립지역에 개입하라고 말이야.”

남자는 말을 마치며 품에서 날카로운 끌을 꺼내 들었다.

“뭐 지금까지는 깃발 달린 자라곤 남작 정도밖에 마주친 적이 없었을 테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진 않겠지만…,”

“어서 풀어! 이 새끼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 기고만장에 빠져있는 원숭이 새끼는 도축하는 게 맞잖아, 그렇지?”

남자는 곧바로 들고 있던 끌을 주키의 갈빗대 사이에 찔러 넣었다.

“윽…으그으으윽…!”

“너의 인챈트는 우리 깃발로 흡수될 거야. 참, 그거 알아? 사실 널 기절시킨 건 바로 나야.”

“끄으으으…으윽!”

우직,

우지직.

갈빗대를 비집고 들어간 끌 끝에 무언가가 걸린 듯.

은발의 남자가 잡은 것을 움직일 때마다 몸 안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온다.

주키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숭아, 그래도 난 자비로운 사람이니 너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마.”

쩍!

몸 안을 헤집던 끌이 이내 남자의 손에서 크게 뒤틀렸고.

동시에 부서진 갈빗대가 비명을 지르자.

주키는 곧 뜬 눈으로 절명해버렸다.

그렇게 은발의 남자는 주키의 상체에 박아넣은 끌을 그대로 둔 채 밖을 나섰다.

그런 그가 스치듯 지나간 책상 위엔 한 종이가 놓여 있었는데.

그 내용이.

[이제 전쟁이 불가피해졌으니 그 전에 라티아와 가장 큰 관련이 있는 몽투르 백작이 직접 움직여야 할 거요.

북쪽 기업가인 앤서니 트와드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고, 해무의 탑에서 흘린 피 냄새를 맡은 다른 순례자들 역시 산발적으로 그들을 쫓고 있으니.

서두르시오.

이제 시몬 바스티유에게 남은 날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

그만큼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촉박하다는 걸 명심, 또 명심하기를. -남해의 파도, 배미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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