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 밑에서
디안을 업은 채 걷기를 한참.
가슴에 둔중한 버거움이 자리잡히기 시작하니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다.
마치 발등에 쇳덩이를 얹어놓은 것 같은 느낌.
가슴 속 버거움이 목구멍을 넘보고, 이내 욕지기에 가까운 기침을 내뱉는다.
콜록.
콜록.
이제는 울컥 솟은 피가 코에서도 뿜어져 나온다.
그렇게 지독하게 이어지던 기침이 끝날 즈음엔, 폐 뿌리에서부터 잘근잘근 씹고 올라오는 통증이 내 의식을 뒤덮었다.
“커…흑 흑.”
짧게 끊은 숨을 연신 들이마시며 겨우 몸에 공기를 쑤셔 박은 나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을 잃고 크게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디안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어.
그 순례자의 우두머리와 싸울 때,
순간 가진 힘을 드러내는 바람에 간신히 약으로 연명하고 있었던 실 하나가 끊겨버렸다.
애초에 가슴에 박힌 총알이 아니었더라도…,
피를 끓였던 나로서는 그와의 싸움으로 만만찮은 육신의 반동을 껴안고 살아가야 했을 테지.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쥐고 있는 것을 놓칠 만큼 약해져선 안 돼.
이를 악물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 시끄러웠던 포드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누구도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 거리엔 그저 디안이 흩뿌린 바람 파편만이 나부낄 뿐.
이제 포드의 상인들은,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포드에서 사라져주길 바라고 있겠지.
해서 서둘러 사라져주겠다.
얼룩처럼 전신에 묻어 있던 통증이 서서히 멎기 시작하자 덩달아 내 발걸음에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윽고 포드의 동쪽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벤투스를 숨겨놓았던 인근 작은 숲을 향해 반쯤 달리듯 이동했다.
이내 다다른 숲의 입구에서,
휙.
작게 휘파람 부니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다그닥 다그닥.
땅을 치대며 달려온다.
“벤투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잿빛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온 벤투스는 뜨거운 입김으로 내게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등에 업힌 디안을 보곤 놀랐는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어댔다.
내색하지 않더니만,
녀석, 디안에게도 꽤 애정을 둔 모양이로군.
그런데,
말은 벤투스 뿐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레 뒤이어 숲 밖으로 기어 나오는 또 한 마리의 말.
반질반질한 갈색 털과 흑색 갈기를 가진 그 말은 분명…,
매튜의 말이로구나.
혀 안쪽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어쩌면 셋이서 나란히 말을 타고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일말의 슬픔조차 느낄 겨를이 없어 서둘러 디안을 매튜의 말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안장 끈으로 그의 몸을 단단히 묶고서 벤투스 위에 올라타.
“불어라, 벤투스. 어느 방향이든 좋으니까.”
놈의 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니 곧 벤투스가 발을 치대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시몬 바스티유의 말들이 벤투스를 따랐던 것처럼.
디안을 실은 매튜의 말 역시 부랴부랴 벤투스의 뒤를 따라 맹렬히 발굽을 치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몸의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몸 안을 가득 채워 감돌던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바람 빠진 풍선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말 그대로.
머금고 있던 셀레어의 바람을 모두 다 써버린 탓이겠지.
나는,
방금 포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의 실질적인 투쟁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그런 싸움을 겪으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되려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내게 주어지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계단 하나를 오른 것 같은 기분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슬프다.
아마도 내가 운명의 노래를 부를 땐 이미 상실을 겪은 후일 테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밤.
그 속에 파묻혀 희미하게 빛나는 별자리를 보아하니.
얼추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
이곳은 포드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다.
다시 시선을 내려 주위를 살피니 작게 핀 모닥불 근처에 맥레인이 누워 있었다.
산처럼 거대해 보이기만 했던 그의 어깨가 언제 저렇게 초췌하게 줄어들었는지.
또 거친 중립지역에서 한 번도 경계를 내려놓지 않았던 그가 이토록 지쳐 쓰러져 있었는지.
나는 알 것 같아 고개 숙였다.
그리고 무슨 감정을 내놔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어짜듯 꼬집었다.
그렇게 딱딱거리며 모닥불을 갉아먹는 불꽃의 이빨 부딪치는 소리마저 멎었을 때쯤에야,
나는 난잡하게 어질러진 감정을 간신히 갈무리한 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단은 상실을 쫓아.
그리움을 느끼고 싶어 매튜 아저씨의 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잘 관리된 안장을 뒤져, 마찬가지로 아직도 그의 향취가 느껴지는 물건들을 꺼내 보았다.
정갈하게 위조된 수많은 위조 서류.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들을 영위하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치밀하고 꼼꼼하게 적혀진 계산식들.
온화한 성품을 대변하듯 둥글고 유려한 글씨가 가득 새겨진 수첩까지.
정작 자신만을 위한 물건은 보이지 않아,
당신의 치열했던 생각만을 붙든 채 나는 이를 악물고 끅끅거리며 오열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단단하고 두툼한 손이 얹어졌다.
언제 일어났는지, 애초에 눈꺼풀만 내려놓고 있었던 건지.
맥레인은 밤중에 없어진 내 그림자를 대신해 조용히 날 위로해주었다.
달이 기울어졌다.
기울어지면서 달빛에 숨어 있던 별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밤공기는 이제 잠자는 숲의 호흡과 뒤섞여 진득한 새벽 냄새가 풍겼다.
맥레인은 묵묵히 매튜가 애써 정리한 서류를 죽어가는 모닥불의 먹이로 던져 주었다.
내 의문을 표하고 싶었으나.
맥레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더는 필요 없어졌어.”
그리고 그 단호한 표정엔 어떤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튜의 수첩만큼은 모닥불의 먹이로 던져 줄 수 없어 품에 간직했다.
이제,
하늘에 있던 달이 완전히 숨어버렸다.
* * *
성에가 낀 이르고 차가운 아침.
작은 마을을 점거하다시피 군집해 있는 무리 가운데 눈 밑 점 문신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사내.
재키가 작은 마을의 마천루인 방직소에 들어갔다.
그 안엔 이미 책상을 사이에 두고 시몬과 마을의 대표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시몬은 재키가 들어옴과 동시에 품에서 반질반질한 약으로 겉칠 된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맞잡은 검지 : 신뢰 보증 채권]
한 난쟁이 조합의 최고 기술력을 발주해낼 수 있는, 신뢰를 형상화 시킨 값비싼 수표.
그러나 그 종이를 받아 든 마을의 대표자는 오히려 난색인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재키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듯 나타나 테이블 위를 손으로 내리쳤다.
“잘 봐, 이건 말 그대로 돈이라고.”
재키의 말에 마을의 대표자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현금이 될 수는 없잖습니까…?”
이에 재키는 화답하듯 살기가 등등한 눈을 부라리며 남자를 겁박할 뿐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인 건 맞지. 우린 그저 시간이 없어 빠르게 환전하고 싶을 뿐이야. 심지어 우리 보스께서 요구한 값은 이 채권의 정가에 비하면 혀 말릴 만큼 짜디짠 염가라고!”
시몬은 그런 급발진하는 재키를 제지하곤 온화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장 자네들이 쓸 돈 정도는 남기고 이 채권을 사가도 좋네, 알다시피 우리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왜일까.
마을의 대표자는 오히려 시몬의 말에 더욱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 뿐이다.
어쨌든 강매의 주체는 시몬이었으니까.
중립지역 전체를 아울러 현시점에서 가장 악명높은 시몬 바스티유의 두목이었으니까!
“어떤가? 이 마을에서 그 정도 금화를 모을 수 있겠나?”
시몬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랴부랴 방직소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마을 거리를 점거한 일당들 너머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씁쓸함을 집어삼켰다.
이어 그들끼리 모여 자초지종이 오가고 나니 얼마 안 가,
“곧 차가운 겨울이 찾아오는데 어찌 곡식 바꿔 먹으려 모아뒀던 돈을 쓴단 말입니까?”
“도대체 얼마를 내야 하는 건지..!”
“그 채권을 산다 해도 그것을 다시 되팔 동안 겨울을 날 준비는 어찌하자는 거요?”
“요즘 중립지역 곡식값이 미쳐 날뛴다는 거 잘 알잖아요, 때를 놓치면 더 비싼 값에 사야 할 겁니다.”
결국엔 팽배했던 불안이 부풀어 터져버렸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에, 마을 거리를 점거한 일당은 오히려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그들을 압박할 뿐이었다.
이 작은 마을 사람들조차 분명 시몬 바스티유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본 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 시몬 바스티유는 적어도.
언제나 거악을 찌르는 악의 단검일 줄만 알았는데.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일당들의 모습을 보니 그 두려움이 더 진하게 우러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마을 외곽에 서성이는 몇 사람들은.
그저 쓴맛 가득한 착잡을 씹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촙은 퀭한 눈으로 뭐에 홀린 듯 작게 중얼거린다.
“잘 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됐어. 우리가 알던 보스가 아니잖아.”
그러자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직 얼굴에서 슬픔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안드레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재키, 그리고 그 똘마니인 그리소 놈들 때문에 어그러진 거야.”
안나 아주머니는 혹여나 안드레의 말을 누가 들을까, 화들짝 놀라 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일단 그녀에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식구들을 지키는 게 먼저였으니까.
* * *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쥐어짠 마을의 대표자가 내놓은 금액은,
통용 금화 이백 개.
재키는 당장 눈살을 찌푸렸다.
훔친 채권 가운데 가장 가치가 적은 것을 골라도 어림잡아 금화 오천 개는 호가할 텐데.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잖아.
물론 저 금화 이백 개만 있다면 바다를 건널 배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채권을 안전하게 처리할 땅에 도달할 때까지 요기하게 써먹을 수 있는 액수인 것 맞다.
해서 시몬은 분명 제시한 채권과 바꾸겠지.
재키의 예상대로.
시몬은 바로 마을의 대표자가 가져온 금화와 채권을 교환했다.
하지만 재키는 실망하지 않는다.
시몬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제는 알거든.
슬슬 마을을 벗어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와중.
시몬은 조용히 재키를 불렀다.
“재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재키는 은밀한 표정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췄다.
“그래, 보스. 어떤 일이지?”
“내가 마을을 떠나면 그 즉시 너와 네 가족이 채권을 회수해줬으면 좋겠는데.”
“저들이 반항하면?”
“…,뭐 수단과 방법은 언제나 다양하잖나.”
재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시몬 네가 아무리 미련한 고집을 부리며 고고한 척을 해봤자, 무법자인 이상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거듭된 상실감이 아니더라도 애초부터 네 천성은 지금 그 모습이었던 거야.
재키,
그는 뒤돌아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점성술사를 만나고 나서부터, 시몬은 꾹꾹 감춰왔던 욕망을 슬 드러냈었지.
그래, 포드의 큰 건이 결정적이었다.
매튜가 죽었을 때.
시몬은 나보다 먼저,
디안을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너는 나와 한 점 차이 없는 무법자였던 거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 위로 올려 볼 생각이야.
그리고 나는 기꺼이 너의 그림자가 되어 주겠다.
나와 그리소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 * *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햇살마저 무색해질 만큼 차디찬 공기가 흐른다.
시간은 이제 겨울의 입구 앞에 서 있는가.
작은 숨에도 짙은 입김이 묻어나온다.
나와 맥레인은 나란히 말을 타고 어딘가에 있을 가족들을 향해 고삐를 치댔다.
그러면서도 점점 빈번해지는 그의 기침에.
바뀌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음을 통감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아려오는 살갗처럼 사정없이 오그라든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받고자.
나는 품속 유일하게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던.
매튜의 수첩을 펼쳐 보았다.
살짝 끝이 헤진 수첩의 첫 장엔, 주인을 닮아 유려한 필기체가 정성껏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노인이 되었을 내가 말하는 나의 옛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