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04화 (104/365)

104화. 그 밑에서 (2)

우렁찬 벌레 울음소리에 두 귀가 시달리던 여름.

두 남자를 만났다.

낭만을 쥔 채 스스럼없이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감히 예상할 수 없는 비운을 등지며 걸어온 사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험에 첫발을 내디뎠던 젊은 시절, 어떻게 하면 여인을 꾀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철부지였었고.

일에 대한 숙련을 쌓기 위해 노력했던 어설픈 자였으며,

끝내 완숙함을 등에 업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인생의 막바지 길을 걷는 예비 늙은이였다.

이런 내게 그 두 사람은 분명 분에 넘치는 자들이었지.

그래서 더욱 가슴이 뛰었다.

마치 처음 내 스승을 만났을 때처럼, 인생에 찌든 심장은 다시 한번 젊음을 착각하며 박동했다.

인연과 운명이라는 게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기이하기가 끝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낭만을 쥔 채 꿈을 이야기하던 자는 상실을 겪고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고.

예상할 수 없는 비운을 등지며 걸어온 자는 모든 것을 끝내려고 마음먹은 듯 보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유쾌했을지도 모를 소설의 세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것만 같다.

속 좋은 놈, 속 쓰린 놈,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

어쨌든,

만남은 한 망자를 묻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속 쓰린 놈이 안아 들고 있던 여인은,

식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에 보는 눈동자가 끓는 듯했으니까.

그래서 뭐가 그리 공감된다고, 나와 속 좋은 놈은 그를 도와 그녀를 묻을 때 같이 울어주었다.

본디 사형수였던 속 좋은 놈은 그날 죽을 운명이었겠지만.

그는 그날 우리에게 주눅 든 모습 없이 꿈을 이야기했다.

언제까지 상실만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느냐고 설파하던, 속 좋은 놈의 눈빛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난쟁이의 뜨거운 고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당일 저녁이 되었을 때.

이미 나는 속 좋은 놈의 고로 속에 요동치는 철판이 되어 있었다.

그의 두들김에 맞춰 어떤 모습으로든 성형할 준비를 마칠 철판 말이야.

나는 변화를 원했고.

속 좋은 놈은 그런 변화를 꾀하려 하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밖에.

속 쓰린 놈은,

묵묵히 속 좋은 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속 좋은 놈이 제아무리 혀를 놀려봤자 그의 상실이 위로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봤다 자신해서.

타인의 인상을 보는 것만으로 얼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자인지 나름대로 판가름할 수 있었다.

속 쓰린 놈은 뭐랄까.

겪은 상실을 발판으로 이제 완전히 사라지리라 마음먹은 사람 같달까.

그런데 왜인지,

끝에 가서 그는 마음을 바꿔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었지.

나는 아직도 그가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른다.

이후에 써 내려갈 내 생생한 이야기엔 부디 그와 관련된 깨우침의 글이 쓰여있길 바랄 뿐이다.

* * *

식은 비가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핏기 가신 나뭇잎들이 바닥에 휘휘 떨어지던 가을.

시몬의 연인 엘라가 죽었다.

그건,

사고였다.

그래, 피할 수 없었던…,

* * *

조립된 하늘과 구름 사이로 눈이 쏟아지던 겨울.

꽤 오랜만에 깃털 펜을 들고 이 수첩에 방문한 것 같은데.

한동안 펜 대신 단검과 얼마 남지 않은 화약을 머금은 총을 들고 다녔더니 제법 유려했다고 생각했던 글씨도 개판이 돼버렸군.

* * *

베두르카 건의 수입

금화 250개.

은화 622개.

말릭스 가죽으로 만든 명품 벨트가 20개.

집행자 맥레인이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 * *

우리 가족들의 회계장부만 쓰다 보니 정작 내 수첩은 잉크에 굶주려 있는 줄도 몰랐네.

우린 제법 해당 지역에서 잘 나가는 무법자 집단이 되었다.

많은 동료가 생겼지만, 대부분은 지나가는 가을의 낙엽 같은 놈들뿐이었다.

그래서 종래엔 늘 우리 세 사람만이 모닥불을 낀 채 궁상스러운 모험을 계속해야 했다.

* * *

이제 깃발을 휘날리는 경비병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지쳤다.

그들은 언제나 집요했으며, 무시무시한 갑주를 입어 총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였다.

밀려왔던 치안을 한 번에 청소하려는 모양인지.

그 무시무시한 기사 단장을 필두로 꾸려진 경비대를, 우리 같은 놈들은 절대로 대적할 수 없어.

맥레인이 아니었으면 우린 아마 열 번도 넘게 잡혔을지도.

* * *

시몬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겪는 압박감은 분명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결정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신중하게 판단했으니까.

우리는 이제 중립지역으로 떠난다.

* * *

과연 중립지역은 대단한 곳이었다.

울타리만이 유일한 법인 이곳에서 우린 특별한 가족들을 만났고 그 규모도 슬슬 커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우리의 가족이 된 사람은,

가혹한 인력 시장을 뛰쳐나온 엔제이였다.

미련에 지방을 좀 두르고 살갗을 씌우면 딱 그이지 않을까 싶은,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미워할 순 없는 그런 녀석.

* * *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는 탈영병 포키스가 합류하고 나서부터 착수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젊은 피도 대거 수혈됐고, 안나가 합류하기 무섭게 우리 조직은 내부적으로도 중심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

감히 적어본다.

지금부터가 시몬 바스티유의 전성기 시작이라고!

* * *

처음으로 큰 건에 실패했다.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무래도 군인을 털겠다는 무모한 계획부터가 실패의 원인이었을 지도.

이 글도 삼일을 꼬박 밤을 새워 도망치다가 종일 기절하고 나서야 겨우 쓴 것이다.

다들 무사한 걸까.

제발 무사해야 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포키스의 새가 날 찾기를 기도하는 것뿐.

* * *

흩어진 가족 중 가장 늦게 합류한 이는 시몬이었다.

그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도망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무법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했다.

그의 이름은 재키.

뭔가 우리와는 결이 다른 무법자였던 그는 유독 우리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결속을 탐내는 듯 보였다.

* * *

한 울타리 내에서 유통되는 신문을 얻어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제법 의미심장한 기사를 보았다.

그러니까 시몬이 말했던 자신의 도주로와 겹치는 지역에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는 거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글쎄.

* * *

오늘도 선을 넘으려는 재키를 막느라 진땀을 뺐다.

하긴, 내가 시몬이라도 재키의 말을 그냥 흘려듣진 못할 것 같다.

시몬의 계획에 나는 언제나 신중했었고, 소극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제동을 걸어왔었으니까.

진정 무법자와 같은,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저질러 보는 재키의 성향은 결정자로선 새로운 해결책의 제시로 느껴졌을 테니.

* * *

의심이란 게 무섭지.

며칠 동안 신문에서 보았던 기사가 머릿속에 맴돌아 결국엔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 사건은 분명 재키가 벌인 것이 확실했다.

시몬은…,

뭐 상황이 상황인 지라 묵인했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하지만 그 사건을 빌미로 시몬은 어느새 재키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

* * *

사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아니, 사실은 말할 대상이 없었다.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두 사람과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뒤늦게 수첩을 잉크로 배 불려 본다.

결과적으로…,

엘라를 죽인 건 맥레인이었지만.

과정적으론 시몬이 죽게 한 것이다.

그래,

결정을 내린 건 시몬이었고.

맥레인은 그저 그의 결정을 믿고 따랐을 뿐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는데,

시몬은 자신의 결정으로 엘라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손에 쥐어질 금화가 우선이었을 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니 나는 시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 * *

어느 날,

별 하나 없는 야심한 밤에 맥레인이 진지한 얼굴로 나와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사실 그는 지금도 전혀 무법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거친 말을 서슴없이 쓰려 하고, 더욱 무법자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그의 모습은.

내 눈엔 어색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지우는 중이라고.

그래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그래야만 지킬 수 있단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묻지 않았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지 맥레인 그 자체에 대해서만 더 알고 싶었으니까.

역시나 그는 엘라의 일 때문에 적잖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시달리는 죄책감의 무게만큼이나,

그는 시몬에게 얽매여 있었다.

내가 느낀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어도, 그에겐 그저 억지스러운 위로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 * *

오랜만에 제법 큰 건수가 들어왔다.

무려 중립지역의 전설로나 내려오던 만스타인 세공소로 향하는 지도를 맥레인이 입수한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밀려가는 숲이 결국엔 감추고 있던 비경을 내놓았구나!

아마 곧 세공소를 살피러 가족들이 출발할 거다.

* * *

세공소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두 발 걷는 자였다.

사람, 난쟁이, 귀 큰 자.

그 세 종족 가운데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간직한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세공소에서 나온 보석과 같았다.

솔직히,

기쁘다.

아름답지만 분명 그만큼의 불운을 쥐고 있을 이를 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가 깨어나 우리의 가족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상처를 우리가 보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법자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쉽고 뜨거운 작별로 배웅해줘야지.

* * *

기어이,

재키는 디안의 가치를 가늠해보려 했다.

감히 우리 가족을!

하지만,

디안은 그곳에 시몬도 있었다고 했었지.

상실을 겪고 욕망을 좇는 아귀가 된 거냐, 시몬?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었던 거냐.

언제가 되었든, 디안에게 자유를 선택할 기회를 한 번쯤은 줘야 할 것 같아.

* * *

케니처럼 총명하고,

안드레처럼 순수하며,

촙처럼 우직한 면도 가진 디안은 금세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난다고 하면 너무나 아쉽겠지만, 그래도 그의 결정을 두고 왈가왈부하진 않을 것이다.

마침 맥레인과 함께 마을로 내려간다니,

맥레인을 시켜 그에게 결정할 기회를 줘야겠어.

* * *

맥레인이 서툴러 다소 거친 방법을 쓰긴 한 것 같지만.

디안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택했다.

그리곤 맥레인과 같이 매우 수상한 대면을 반복하는 것 같았는데…,

처음 본 것 같다.

디안과의 대면이 끝나고 돌아오는 맥레인의 눈엔.

언제부턴가 생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 * *

조용히 수첩을 덮었다.

직후 벌어진 일들에 치여 다닌 터라 한 글자 새길 여유도 없었던 매튜 아저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거창한 모습으로 끝났으면 좋았을걸.

거창하지 않더라도 끝장까지 글씨가 빼곡히 가득 차 있었으면 좋았을걸.

매튜 아저씨.

전 아직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족이 된 것을.

“디안.”

모닥불을 사이에 끼고 날 부르는 맥레인.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왜소해져 이제는 광대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 이동하는 내내.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내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 날 부르는 것으로 오늘 처음 입을 연 것이다.

“네, 맥레인.”

“이전과 같진 않을 거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시몬 바스티유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맥레인은 기침할 힘도 없는지 어깨를 몇 번 들썩거리다가.

“곧,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거다.”

그럼에도 날카롭게 살아있는 눈빛으로 나를 또렷이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부디, 그 결정에 등 돌리지 마라. 이건 내 부탁이다.”

말을 마친 맥레인은 내가 덮어준 어스름을 턱밑까지 올리곤 한껏 움츠러든 모습으로 잠을 청했다.

그런 그가 잠에 슬슬 빠져들기 전에.

나는 나지막이 그를 향해 대답했다.

“네, 맥레인.”

슬며시.

내 말을 들은 맥레인의 비쩍 마른 입술 꼬리가 휙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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