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 밑에서 (3)
재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잘 개어져 있던 천을 집어 피 묻은 단검을 닦았다.
이어서 서랍을 한참이나 뒤적거리던 그는 마침내 빳빳한 종이 하나를 찾아 꺼내곤 곧바로 품속에 집어넣는다.
밖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재키는 그러한 소란에도 일말의 동요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집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문에 도달하기 무섭게 바깥쪽에서 왈칵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두 사람.
보우와 제제.
그들은 한껏 흥분한 모습으로 달라붙은 채였는데, 막 재키를 맞닥트리곤 놀라 당황했다.
“재키! 여기 있었구나!”
“채권은 찾았어, 보스?”
둘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재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내가 말했지, 이제 난 너희들의 두목이 아니라고.”
그의 으름장에 보우와 제제는 입을 다문 채 경직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보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금화는 얼마나 나왔지?”
“금화보다는 거스름인 은화가 더 많이 나왔지. 환산하면 금화 삼십 개 정도?”
“정말 우리 심기를 건들면 큰일 날 줄 알았는지 마을에 있는 돈을 싹 긁었던 것 같아.”
보우와 제제의 말에 재키는 일말의 감정변화 없는 모습으로 단검을 닦은 마른 천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런데 재키, 정말 시몬을 두목으로 모실 생각이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그의 뒤치다꺼리만 하게 될 거라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재키는 그들과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우린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이다. 명심해. 우린 이제 덜떨어진 범죄자 집단이 아니라 꿈을 가진 중립지역 최고의 무법자들이라는 걸.”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곧장 문을 박차고 나서는 재키.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불길이 치솟는 마을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 재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평온했던 마을은 이제 쥐어짜이듯 아비규환을 토해내고 있다.
자비가 없는 그리소 일당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날뛰었지만.
예전처럼 목적의식 없이 분탕을 쳤던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 이 모든 것은 꿈을 가지고 어설픈 방향으로 우회하던 자를 만나, 그의 돛을 올바른 방향으로 틀어 항해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제법 훌륭한 조타수들을 잃은 건 뼈아프지만,
뭐,
동시에 성가셨던 닻이 사라지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론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 * *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숲에 숨어 사는 귀 큰 자들처럼.
햇볕 아래 그림자가 무성한 곳들만 골라 다니며 도망을 계속하던 시몬은 제법 깊은 숲에 당도하고 나서야 겨우 쉴 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리소 일당이 차려준 움막 안에서,
그는 슬픔과 허무 대신 격앙된 분노를 씹어 삼켰다.
매번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왜 나는 상실을 겪어야만 하는가.
왜 나에게만 이런 가혹한 운명이 주어지는 것인가.
근데 이제 그 이유를 제법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지금까지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던 거다.
꿈이란 건,
깨끗한 것만으로 도달하기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애초에 우리는 무법자.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으로 깨끗함을 쫓아봤자 세상은 그것을 같은 시선으로 봐주지 않는다.
이젠,
꿈을 향하는 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걷겠다.
해서 상실 없이 담담하게 쟁취해내 보이겠다.
점성술사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필시 이런 결심을 내린 나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리라.
“보스.”
시몬의 움막으로 재키가 걸어 들어왔다.
“일은 깔끔하게 처리됐어.”
그 말에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키는 이제 시몬에게 있어선 꿈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였다.
고민도, 주저도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는 분명 지름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몇몇은 인근을 살피기 위해 정찰을 나갔어. 아마 곧 활로를 찾아올 거야.”
“그래, 재키.”
“그럼 이따가 가족들이 돌아오면 다시 올게.”
보고를 마친 재키가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막 찾아온 안나와 마주치곤 멈춰 서서 시몬을 돌아보았다.
“시몬, 안나가 찾아왔는데.”
그런 그의 말에 시몬은 잠시 고개를 들어 안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찾아왔으면 좋겠군, 안나.”
“보스 말 들었지?”
이어지는 재키의 말에 안나는 그대로 뒤돌아서야만 했다.
* * *
움막이 차려진 숲 인근,
비교적 외딴곳에 차려놓은 모닥불 주위로 다섯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닥불을 크게 지필 수 없어 그 크기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해서 다섯 사람 모두의 추위를 물리칠 수 없어 연신 입김을 뱉으며 손을 비벼야만 했다.
와중에,
안나는 자신의 겉옷을 비질라에게 덮어주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갑작스레 통보받은 가족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곧 안드레는 조용히 일어나 조금 떨어진 움막 쪽을 주시하며 잔뜩 경계했다.
불과 며칠 전,
술에 취한 재키의 동료 셋이 이곳에 기어와 잠들어 있던 케니의 손과 발을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려는 걸 막았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촙은 단번에 그 셋을 주먹으로 때려눕혔고,
그로 인하여 이 다섯 사람은 어느 샌가부터 시몬 바스티유 내에서 겉도는 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장고를 거듭했던 촙이 오랫동안 유지했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제 보스는 우릴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 말에 선잠을 청하던 비질라는 말없이 안나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런 비질라를 더욱 끌어안은 안나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촙을 타이를 뿐이다.
“촙, 지금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시간을 더 두고 지켜보자.”
“보스가 만나길 거부했다면서요,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요.”
“난 단지 이 이상 누구도 다치지 않길 원할 뿐이야…,”
안나의 말에,
그들은 다시금 밤공기보다 차가운 슬픔을 곱씹어야만 했다.
이제 별들도 잠드는 야심한 새벽이 되었다.
촙과 안드레는 나무에 기대어 마주 앉아 속삭이듯 대화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날 선 시선은 늘 움막 쪽으로 향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안드레.”
“뭘.”
“뭘 묻는 건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촙이 그의 냉소적인 모습에 반응해 발끈했지만,
이어지는 안드레의 말에 금세 성질을 죽여야만 했다.
“맥레인과 포키스, 그리고 디안마저 잃었으니 시몬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는 늘 능력 있는 가족들을 원동력 삼아 움직였었으니까.”
“그래서, 시몬이 이제 재키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응.”
“안드레,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우린 시몬 바스티유라고!”
촙의 말에 안드레는 퀭한 눈을 부라리며 비웃었다.
“그 번지르르한 껍데기가 벗겨진 것일 뿐이야. 그리고 우리가 알던 시몬 역시 그저 본모습을 드러낸 것뿐이고.”
“…뭐?!”
결국엔 촙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거지.
먼저 상황을 직시하고 내려놓은 안드레에게서 일말의 희망마저 빼앗긴 촙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씹어야만 했다.
* * *
맺힌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시몬과 재키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찍이 재키에게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 보고받은 시몬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갈 길을 정했고,
이에 겉돌던 다섯 사람은 그들이 한창 북적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이후에야 뒤늦게 따를 채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시몬은 다시 예전의 그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다섯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어서 그는 촙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미안하다, 촙. 알다시피 근래에 충격적인 일들이 너무나 많았지. 내가 더욱 신경 써서 가족들을 보듬었어야 했는데…,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어.”
그 말에 촙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안도.
식어 사라진 줄만 알았던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듯한 그런 안도감이었다.
“이해해요, 보스.”
시몬은 촙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했다.
“이제 내가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가족은 촙, 너뿐이야. 네가 이런 내 마음을 다른 가족들에게도 모두 전해줬으면 해.”
“하지만 보스, 직접 나서주신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촙,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별로 없어. 이젠 네가 매튜의 역할을 해줘야만 해. 아마도 터무니없이 과중한 일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잘 알잖니…”
시몬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 숙였다.
그런 그의 슬픔에,
촙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통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몬.”
“촙, 조만간 테리라스의 햇볕 아래서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그래,
먼저 떠나간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 * *
요 며칠간은 숲이 이야기해준 지름길을 통해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는 안전하지 않아 보인다.
바로 근처,
나무가 알려준 지름길을 수색하는 무리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추적자들 가운데서도 궤를 달리하는 실력자로 보였다.
숲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았으며,
단검과 워해머, 활과 함께 딱 보아도 특별해 보이는 가죽을 여민 갑옷으로 빈틈없이 중무장한 상태였다.
또 다섯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으며 그중 하나는 늘 벨트에 작은 새집을 두고 있었다.
포키스와 같은 저격수에 해당하는 인물인 듯싶은데, 두 눈이 멀쩡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다른 방법으로 새의 시야를 공유받는 것 같군.
나는 대답하지 않는 묵묵한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이 지나치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저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맥레인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어만 갔고, 그로 인해 우리 발목엔 항상 지체라는 족쇄가 따라다녔으니까.
고로,
만일 저들과 충돌한다면.
최소한 저들 모두를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해 저들 중 하나라도 살려 보내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어져.
지금 내 몸엔 이제 막 한 줄기의 바람만이 충족되어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론 저들의 후속을 받아칠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완벽한 사냥꾼의 위치에서 저들을 사냥할 각오로 움직여야 해.
낙엽의 신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은밀한 발걸음을 거듭하여 건너편,
과묵한 나무를 향해 자리를 재빨리 옮긴 나는 이제 한 수색 조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움직임을…,
누가 봤을까.
휙!
갑자기 내 곁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그 근원은 그대로 나를 스쳐 지나가, 이내 수색하던 자들 가운데 하나를 정확히 맞췄다.
이후엔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척수에서 뿜어져 나온 신호에 따라 몸을 움직였을 뿐.
크게 세 걸음을 걸어 그들의 지척에 도달함과 동시에 미리 봐두었던 궤적 그대로 셀레어를 휘두른다.
그 궤적에 정확히 둘이 꿰어 핏방울과 함께 쓰러지고,
손바닥 위로 자루를 한 바퀴 돌려 검의 태세를 갈무리한 나는 이제 막 들이닥치는 장정의 턱을 무리 없이 꿰었다.
그리고 동시에,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인 나머지 하나의 가슴에 화살이 박히며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내 감각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곳에서부터 날아든 그 화살은 분명.
“포키스.”
살아있었군요.
우선은 서로 만나는 게 우선이겠지.
서둘러 쓰러진 시체들을 낙엽으로 뒤덮은 나는 마주쳤던 과묵한 나무들만을 골라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맥레인이 있는 곳에 도달하자,
그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내 기척을 느끼고 힘겹게 눈을 뜬 맥레인은 이내 눈앞에 보이는 남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포키스, 이 유령 같은 자식 같으니.”
“맥레인, 디안.”
조금은 야윈 얼굴로 맥레인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인사를 나눈 그는 곧바로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줄곧 너희를 쫓아 이동하다가 우리를 쫓는 놈들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그게 뭐죠?”
“놈들이 시몬 바스티유의 일당 중 하나를 생포했데. 고문 끝에 놈의 이름을 밝혀냈다는데…,”
“누구…! 누굽니까 그게!”
나는 대번에 포키스에게 달려들어 물었다.
“촙이라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