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가족의 이름으로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거야.”
포키스는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첫 번째는 포드의 상인들.
한차례 소란이 끝난 직후,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그들 역시 본격적으로 시몬 바스티유 사냥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했다.
대부분은 고용된 용병으로 보였으며 지금은 급한 대로 가용 가능한 용병들을 풀어놨다지만 하루가 다르게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상황이라,
어쩌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역시 북쪽의 기업가, 앤서니 트와드.
기업의 위신이 떨어지지 않게 대외적으로 명분을 설파하며 지지층을 설계했던 그들은 아직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릴 압박할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섣불리 판단 내리기 힘든 적에 속했다.
세 번째는 순례자들.
해무의 탑을 추종하는 순례자들과의 충돌 이후 그들은 더는 우릴 쫓지 않았지만,
그러면서 생긴 피 냄새를 맡고 다른 탑의 추종자들이 얼마든지 달려들 가능성이 있는 만큼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
이는 내가 직접 순례자라 불리는 자들을 겪어보았기에,
저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또 다른 탑의 순례자와 충돌한다면, 그때는 정말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바로 남쪽에서 올라온 깃발 달린 자들.
작정하고 중립지역을 침투한 그들은 지금 가장 체계적인 지휘 아래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방금 쓰러트린 자들 역시 분명 그들이 보낸 추적자일 테지.
어찌 되었든 중립지역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비리에 관여한 남쪽의 깃발들에 불똥이 튀게 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으니.
그 전에 정치적으로라도 유용하게 써먹을 패를 가지려는 거겠지.
문제는 그 패가 바로 시몬 바스티유라는 거지만.
해서,
지금 가장 중요한 촙의 행방은 분명 남쪽의 깃발 달린 자들의 수중에 있을 것이 유력했기에.
머리를 맞댄 우리 세 사람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비록 눈대중으로 익혔던 요행에 가까웠었지만.
포드에서 있었던 기사와의 만남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진형과 그 진형을 유지하려는 행동 원리 정도는 어설프게나마 이해하고 있어.
언제나 듣고 수렴하기만 했던 나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엔 내가 포키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구나.
“포키스, 원거리 적 위험 요소만을 노려 저격해주십시오.”
“하지만 디안, 우린 저들과 비교했을 때 시야적으로 매우 불리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진 인챈트로 제공을 장악하겠습니다.”
아비베오에서의 일들은 훈련이니까 논외로 치고.
실질적으로 인챈트의 힘을 분배해 적절하게 발휘해본 것은 포드에서의 싸움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도 이젠 잘 알아.
지금 내 몸속에 갈무리 된 한 줄기 바람 정도라면, 저들이 날리는 새들을 교란하기엔 충분할 거다.
“물론 이건 촙의 위치를 발견하고 그곳에 진입했을 때 이야깁니다. 누군가를 속박하여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필시 임시로라도 어디엔가 거점을 차렸을 테니까요.”
맥레인은 아까부터 열렬히 의견을 내비치는 내 모습을 보곤 눈빛만을 반짝일 뿐이었다.
“그러니 촙이 있는 곳을 발견할 때까지 저들을 역추적하여 월 엣지로 원점돌파 합시다.”
이어지는 내 말에 포키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월 엣지는 기사의 진형이잖아?”
“그렇지요,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방패가 될 테니 포키스는 검이 되어 주십시오.”
포드에서 원거리 무기가 가지는 이점이 얼마나 지대한지 실감했기에, 반대로 원거리 무기에 통달한 포키스와 함께 움직인다면 해낼 수 있는 일의 폭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 내 설명에 잠자코 듣고 있던 맥레인은 작게 미소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런 진형이 있긴 하지. 실력 있는 기사 하나와 궁병대를 하나로 묶어 쓰는 일종의 기만 진형으로 ‘하울링’이라 불러.”
“그런 게 따로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뭐, 아예 그런 쪽으론 아는 게 거의 없었잖아.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거야. 하울링은 소수가 다수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진형이거든. 넌 자연스럽게 월 엣지라는 진형을 가지고 현재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든 끼워 맞춰 가변하려고 한 거고. 무지에 창피해할 게 아니라 감각적임에 스스로 대견히 여기란 말이야.”
포키스는 놀란 눈치로 맥레인을 쳐다볼 뿐이다.
“왜.”
“맥레인, 네가 그렇게 자상하게 말하는 건 처음 봐.”
“닥쳐.”
둘의 이야기 속에 아주 작은 웃음꽃이 피었다.
언제나 팽배한 긴장감만이 가득했던 우리 사이엔 어쩌면 가장 필요한 향기였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겨울이 더 차가워지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꽃이었을지도 모르니.
우리는 한동안 서로 눈을 맞춰가며 피식 웃었다.
* * *
실력 좋은 기사 하나가 적들을 꾀어 오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병대가 그들을 요격한다.
그 사이사이 전술적 공백을 메우는 건,
오롯이 기사의 재량에 달려있기 때문에 단연 그 기사의 실력이 진형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렇듯,
외로운 늑대인 줄 알고 달려들었으나,
화살, 그러니까 다른 늑대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거짓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이 기만 가득한 전술이 바로,
하울링.
비록 궁병대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괜찮다.
저격수인 포키스의 화살은 그 오리무중으로 가득한 궤적 자체가 무기였으니까.
지금은 몸을 가눠야 할 때인 맥레인을 위해서라도.
내 선에서 모든 걸 끝내야만 한다.
추격조를 연달아 마주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쳤던 추격대의 발자국을 역으로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5인 1개 조로 수색하던 다른 추격자와 맞닥트리자,
우린 미리 계획한 대로 차분하게 움직였다.
발각과 동시에 거리감을 유지하며 도망을 계속하다가,
찌르르, 찌르르.
포키스의 사정권 안에 저들이 들어왔다는 신호가 들리는 순간.
되려 득달같이 검을 뽑아 저들을 덮친다.
이윽고 저들과 첫 합을 겨룰 때쯤,
후방에 있던 하나가 저격을 당하고 쓰러진다.
이내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저들의 몸에서 쓸만한 정보를 탐색했다.
하울링이 세 번 정도 통했을 시점엔,
수색조 간 연락에 이상이 생긴 것을 인지한 적들이 빠르게 숲에서 빠져나갔지만.
이미 필요한 정보는 얻었어.
적들의 품에서 공통된 약도 두 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약도엔 저들의 거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뒤늦게 합류한 맥레인은 쓰러진 적들의 외향을 살피며 그들을 평가했다.
“가문 아래에서 봉사하는 사냥꾼들이야. 개중엔 원정대에 속한 인물도 보이는 것 같은데. 이들은 말 그대로 수색을 위해 파견된 자들일 뿐 본대라고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약도에 적힌 거점을 급습하는 것부터가,
진짜 전투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군.
* * *
포키스와 함께 숲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낙엽을 속여 걷길 몇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제법 천막 여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야영지를 발견했다.
약도에 그려진 거점의 위치와 정확히 일맥상통하니 틀림없이 수색조를 보낸 쪽의 진영이리라.
날선 긴장 위로 몇 시간이나 이동을 한 터라 우리는 일단 지친 몸을 조금 달래기로 했다.
예전의 맥레인이었다면,
이 시점에, 아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이번 일에 개입하려 들었을 텐데.
그는 이제 내가 내린 결정을 그저 말없이 지지해주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내겐 아주 큰 힘이 되었다.
뭔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지지대가 내 등 뒤에 있는 느낌.
그래서 간헐적으로 전신이 떨리도록 그가 기침할 때가 되면, 그 지지대에 균열이 생기는 것만 같이 불안했다.
이제.
벌겋게나마 공기 중에 체류하던 석양마저 가라앉은 밤이 되었다.
포키스는 신호를 보내겠다고 말하며 은밀하게 자리를 떴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나도 본격적으로 저들의 거점 주위를 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런 나를 맥레인이 다가와 비뚤어진 어스름을 고쳐 씌워준다.
“다녀와라, 그리고 가족을 구해.”
“금방 올게요, 맥레인.”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어스름을 흩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세공소 이후 처음 맞이해보는 겨울이라 그런지.
모든 게 새롭다.
본격적인 추위는 밤이 되기 무섭게 땅을 얼렸고, 곳곳에 하얀 성에가 피어있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이곳이 숲이 아니라 감색 바위 지대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점 안쪽을 관찰할 수 있는 지대까지 다가가자,
드디어 그 내부를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었다.
수는 당장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병력이 주둔해 있고.
그 가운데 단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깃발을 내걸고 있는 거대한 천막.
마침 천막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전신을 은빛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한 남자.
한쪽 어깨에 뒤덮인 반질반질한 재질의 천엔 가문의 증표가 새겨져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추 느낄 수 있다.
순례자와 같다곤 할 수 없지만, 그 압박감만큼은 똑같은 특유의 기운을.
분명 인챈트의 힘을 가진 무기를 지니고 있을 테지.
최대한 저 남자와의 싸움은 피해야 한다.
다시 시선을 돌려 야영지 뒤쪽을 보자 그곳은 거대한 철제 새장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안에는 이미 주검이 된 자들도 있었지만, 흐르고 있는 자신의 피가 실시간으로 얼어붙고 있는 걸 바라보며 신음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촙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분명 저 부근에 있겠지.
조금만 참아, 우리가 구해줄 테니까 촙.
찌르르.
때 좋게 어디선가 포키스의 새가 날아와 내 어깨 위로 앉았다.
나는 미리 포키스에게 받았던 얇게 말린 종이를 꺼내 펜대가 없는 자그마한 촉으로 신중히 글씨를 새겼다.
[전방 교란을 시작하면 동시에 제공 장악하겠음]
이제 그것을 새의 얇은 발목에 감아 다시 날려 보낸 직후,
나는 위치를 잡고 셀레어를 뽑아 들었다.
포키스가 야영지 정문 쪽 경비 하나를 저격하면.
저들은 일거에 새를 풀어 주면 시야를 확보할 것이다.
그때.
품었던 한 줄기 바람을 풀어 그것을 저지해야 한다.
“누가 화살에 맞았다!”
“저격수다!”
“새를 풀어!”
곧이어 야영지로부터 들려오는 소란.
그리고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야영지를 활보하던 자들이 일거에 새를 푼다.
동시에.
자루를 양손으로 가득 잡은 나는.
[87년, 셀레어]
[두 개의 산을 깎은 세상의 소용돌이]
셀레어를 힘껏 휘둘러 몸 안에 품었던 한 줄기 바람을 하늘에 풀었다.
팍!
검 끝을 필두로 뿜어져 나간 바람이 허옇게 질려 막의 형태로 부풀어 퍼지고.
동시에 사방으로 날아오르던 새들이 일거에 바닥에 쏟아졌다.
그것을 확인한 즉시 나는 야영지 뒤쪽을 향해 매섭게 질주했고, 그런 날 발견한 경비대 두 명은.
어디선가 연속적으로 날아든 두 발의 화살에 심장을 헌납한 채 쓰러져야만 했다.
* * *
결과적으로.
우리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이 무색하게 보일 정도로,
구출해낸 촙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열 손톱 모두가 망치에 쪼개져 있었고, 왼쪽 무릎은 으깨져 있었으며.
코뼈는 부러지고 유리 조각에 난장판으로 뒤집힌 혀는 걸레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촙은 악착같이 의식을 붙잡고 있어서.
부어오른 눈두덩이 속,
광맥처럼 파묻힌 충혈된 눈을 굴리며 우릴 알아봐 주었다.
“매…레이…포…히스…디…아…안…”
피 섞인 눈물을 흘리며 반가움을 표출한 그는 아래턱을 한동안 덜덜 떨다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
사력을 다해 목을 빳빳이 세워 터진 입술을 움직였다.
“나…느…나는…, 버려…버려져어…버려졌어…”
“누구에게, 촙! 말해줘. 대체 누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울분을 토해내며 물으니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시몬이…,날…버…버렸어. 날… 이용했어…”
이윽고.
촙은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의식을 잃었다.
포키스는 곧바로 피투성이인 그의 가슴에 귀 기울여…,
고막으로 전해져 오는 미약한 진동을 감지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있어…, 아직…. 하지만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거야.”
그의 말에 맥레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키스, 떠나라.”
그는 작심한 듯.
장고 끝에 나올만한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그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촙과 함께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