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07화 (107/365)

107화. 가족의 이름으로 (2)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역대 최강의 창술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 창술은 재능의 영역인 비전에 가까워서,

한 세대도 넘지 못하고 사라져 역사에 길이 남아 칭송받을 운명이었지만.

수많은 가문이 그 비전의 편린이라도 얻고자 달려들었고.

저명한 학자들의 투신 끝에,

해당 창술의 몇몇 결이라도 복원시키는 데에 성공한 가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은 하나의 완성된 창술이라 불리기 민망할 만큼 불완전했으나,

각자가 복원한 비전의 조각들을 기반으로 가문의 대를 거쳐 개량시킨 끝에 위력적이고 개성 강한 창술들을 완성 시킬 수 있었다.

여기,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중립지역의 땅을 밟고 서 있는 남자의 가문 역시 그러한 가문 가운데 하나였다.

비전의 결로 시작해 이제는 가문 고유의 무술이 된 지금 시점에서, 그가 가진 창술의 경지는 그의 가문 안에서도 그 완성도가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뿐인가.

칼같이 솟아오른 날카롭고 긴 잿빛 속눈썹,

살짝 튄 매부리코 아래로 움푹 들어간 깊은 눈두덩이 속 빛나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듯한 각진 턱.

과연 가문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다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용모를 가진 그의 이름은 몽투르 베이선.

변경백 에지스 베이선의 장남인 그는,

지금 자신의 아비에게 유배당하듯 중립지역으로 쫓겨난 상태다.

사실상 베이선 가문은 지리적으로 마주한 중립지역을 기준으로 라이튼과 티바르를 동시에 견제해내는 형국이라, 해당 제국 내에선 그 위상이 하늘을 찌르는 가문이었는데,

당장 에지스의 장남인 몽투르의 호칭이 남작이 아닌 백작인 것을 보면 그 위상을 유추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가문의 장남이라 불리는 놈이.

근본도 없는 지주, 세브리와 어울려 견제해야 할 라이튼과 티바르 사이에서 위험한 돈놀이를 그것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만큼 해댔으니.

잘못하면 가문의 위신이 추락함은 물론, 이로 인하여 두 제국에게 시비를 받을 명분마저 생길 마당이다.

해서 스스로 그 일을 해결할 때까지.

몽투르는 중립지역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최근엔 공작까지 나서서 편지를 보내 닦달을 하는 걸 보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좆될 준비나 하라는 건가.”

순례자들과의 충돌이 꺼려져 밑 사람을 시켜 믿을 만한 엔트로피급 용병을 고용했었는데,

그게 오히려 무리수였을 줄은.

그래도 과정이 어찌 되었든,

놈들이 그 골치 아픈 포드를 빠져나갔으니 결과적으론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사실,

중립지역만 아니었어도 놈들을 찾는 건 정말 문자 그대로 시간문제였을 거다.

당장 고향 땅에서 몽투르가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의 수만 해도 사백이 넘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내 휘하에 있는 기사단장 둘이 중립지역 행에 동행했다는 거고,

그들의 뛰어난 용병술 덕분에 수색 자체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기사단장을 필두로 이제 막 체계적인 수색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한 상태니, 그 광범위한 그물에 목표물이 걸리기만을 기다리면 될 뿐이야.

결국엔 이렇든 저렇든 시간 문제로 귀결되는군.

그래도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건가.

간이로 차린 천막 입구,

한쪽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몽투르는 질겅질겅 씹고 있던 과일 껍질을 바닥에 내뱉었다.

그의 시동 둘은 막 인근에서 장작을 구해와 천막 근처에 따듯한 불을 지폈는데,

몽투르는 그중 하나를 불러 먹고 있던 과일을 던져 주었다.

“먹으면서 쉬엄쉬엄해라, 이놈아.”

“감사합니다, 백작님.”

“고향 땅에 있을 네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일을 마치도록 하마.”

넙죽.

과일을 양손으로 받아든 시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다.

그런 그와 반대로,

몽투르는 검댕을 묻히며 조용히 장작을 갈고 있는 또 다른 아이에겐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간청해서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은 집안의 아이였으니까.

저런 부류의 시동들은 바로 하급 기사로 빠져 전쟁터를 구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역할이었다.

물론 사려 깊은 귀족들도 찾아보면 있기야 있다.

시동들을 극진히 아끼고 또 모질게 가르치며 학습시켜주는 자도 찾아만 본다면 분명 여럿 있겠지.

그런데 그것도 결국엔 시간과 신경을 소비하는 일이 아닌가?

결과적으론 겉만 번지르르한 헛짓거리에 가까운 행위라는 거다.

그렇게 몽투르는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 빼어나게 무두질 된 맹수의 가죽으로 뒤덮은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오늘도 결국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너.”

몽투르는 천막 입구를 청소하던 시동을 불렀다.

채 검댕을 닦지 못해 얼굴이 시커먼 그 아이는 부랴부랴 달려와 그의 앞에 고개 숙였다.

“잘리스를 불러와라.”

“네, 백작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동이 쏜살같이 천막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술에 취한 듯한 중년의 남성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고약한 놈, 술이나 퍼먹고 다니고.”

“용서해주십시오, 그 고약한 놈이 스스로 뚜껑을 열고 절 유혹하지 뭡니까?!”

“그래? 그럼 혹시 네 몸속에 괴물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니 앙 실러 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군?”

“몽투르 공! 농인 걸 잘 알지 않습니까!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했는데 그게 그만 술인 바람에…”

“됐어, 잘리스.”

몽투르가 히죽 웃으며 잘리스에게 손짓했다.

“그물을 치고 기다리는 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지, 해서 말인데 날도 춥고 하니 따듯한 봄을 좀 구경해보고 싶거든.”

그의 말에 잘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몽투르 공의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수행하겠습니다.”

“중립지역의 꽃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니 두 다발만 가져오도록 해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잘리스는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천막 밖으로 나섰다.

그리곤 한참을 걸어가고 나서야,

뭐가 그리 신났는지 혼자 중얼거린다.

“작위를 가지게 되면 따로 기업 같은 데에서 맞춤 혀라도 만들어 달아주나? 내 주둥이로는 암만 놀려봐도 창녀들을 그렇게 거창히 표현하진 못하겠는데 말이야. 끅끅, 나중에 이 비유법은 따로 좀 써먹어 봐야겠구먼.”

그렇게 비틀거리며 야영지 밖으로 나서려는 찰나,

저 멀리서 엄청난 기세로 달려드는 말 무리를 본 잘리스는 퍼뜩 술에서 깨어 얼른 길에서 비켜나야 했다.

* * *

“내가 잘못 들었나? 우리 위대한 기사 발링스께서 놈들의 기만에 당했을 리가 없는데?”

“면목 없습니다.”

“발링스께서도 이제 많이 늙었나 보오, 그깟 무법자 놈들에게 당할 줄이야.”

한껏 비아냥거리던 몽투르는 이어 손사래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깟 무법자라기엔 결코 놈들이 저지른 일들이 작지 않으니 내 말을 잘못했군. 정정하지.”

어찌 되었든 라티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미친놈들이니까.

그놈들을 잡아 들여 트로피 삼듯 전면에 내세우고, 라티아를 쓸었던 인챈트를 증거로 가져오기만 하면.

나머지는 입술 벌리기에 안달이 난 발언가놈들이 알아서 물고 뜯고 노래를 부르며 정치질을 할 테니.

그것으로 라티아에서 했던 동전 놀이의 후폭풍은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뿐더러.

전쟁의 여파 가운데 두 제국이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을 수 있다.

“해서, 그들에 대한 추적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나?”

몽투르의 물음에 발링스는 덥수룩한 수염을 실룩이며 즉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들의 동선을 이미 파악한 상태로 이제 덮칠 때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지요.”

“그렇군.”

“몽투르 공께서 직접 일선에 나서주신다면 제아무리 용병들이라 해도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내가 거길 왜 가나?”

“그게 무슨…?”

“설마 자네가 말한 때라는 게 내가 직접 나가 지휘하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몽투르 공.”

“이봐,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아시다시피 용병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몬 바스티유 일당들 개개인의 실력이 상정 외의 것들이라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저들은 또 높은 확률로 탈출을 감행할 겁니다.”

“그래서 내 친히 휘하의 믿을만한 기사단장 둘을 데리고 왔거늘.”

“백작님.”

발링스는 굳은 표정을 말을 이었다.

“지금 중립지역의 정세는 마치 ‘0’을 풀어놓은 것처럼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 중심에 시몬 바스티유 일당이 있습니다. 누가 그들을 잡느냐에 따라 그 정세의 모양새는 크게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몽투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은 잿빛 눈썹을 번쩍 올리며 물을 뿐이다.

“자신이 없는가?”

그 말에 발링스의 주름진 이마 속에서 굵직한 핏대가 꿈틀거렸다.

“그런 자신감으로 자네는 가문의 피로 이어진 인챈트에 본인의 피를 뿌렸나 보군?”

끽.

갈라진 턱 사이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발링스는 가문의 모욕에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갈았다.

이에 몽투르는 눈썹을 치켜뜨며 실실 웃더니,

“발링스, 왜 그렇게 발끈하고 그러나. 다 장난인 걸 알면서.”

한순간 만들어냈던 심각함을 허울뿐인 장난으로 포장하며 특유의 버릇과 같은 손사래를 쳐댔다.

“사흘 안에 놈들을 모두 잡아 오겠습니다.”

발링스는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의 행동은 분명 무례한 것이었지만,

몽투르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만연한 미소로 뒤돌아 멀어지는 발링스의 뒤통수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짧은 시간,

요양은커녕 잠깐의 휴식이라고 부르기도 애석할 정도로 숨을 고르던 맥레인은 다시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뜨겁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비록 내 몸이 비정상적인 범주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가만 보면 이런 나보다 맥레인의 육체적 능력이 더 경이로워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나도 몰랐는데,

어느새 그는 내게 있어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단 그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이 순간 고삐를 놀리며 걸어가는 그의 길 모두를 헤아린다 해도 나는 당당히 그를 자랑스럽다고 말할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일전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괜히 아찔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치기를 발휘해 은화 한 개를 그에게 던지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보다 전에,

내가 세공소에서 아리아에게 이름조차 받지 못했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겠지.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

가만 생각해본다.

운명은 과거의 내가 빚은 현재가 아닐까.

우리는 가지고 있던 바람 기름 전부를 편자에 먹였다.

말들은 바람 기름에 흠뻑 젖은 편자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발치의 바람을 사정없이 치댔고.

그렇게 숲을 벗어나 누구도 쉬이 추적할 맘이 들지 않을 만큼 빠른 속력으로 동쪽을 향해 주파했다.

매튜 아저씨의 말은 벤투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애써 달려주어서, 끝내 바람 기름이 다 마를 때까지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해는 슬슬 저 멀리서부터 고개를 쳐들고 있다.

더그덕 더그덕.

바람을 하도 밟고 다녀 붉게 달아오른 편자가 언 땅 위에 인장처럼 뜨겁게 새겨졌다.

이제,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맥레인이 내게 입을 열었다.

“디안.”

그는 말했다.

“미안하다, 그들과 뜨거운 이별을 나눌 시간조차 허락하지 못해서.”

나는 답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들 역시 지금의 저와 같다면…, 막연히 서로를 떠올리며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해 이별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것도 노래 가사냐?”

“아뇨, 가족을 이야기한 겁니다.”

맥레인은,

찬 공기가 무색하게 얼굴을 활짝 피며 웃었다.

“가자, 디안.”

맥레인은 다시금 고삐를 다잡고 치댔다.

“남아있는 가족을 구하러.”

나는 그런 그를 뒤따라 박차를 가했다.

아마도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 이미 어제.

맥레인은 모든 일의 매듭을 짓게 되겠지.

지을 것이다.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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