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가족의 이름으로 (3)
라이튼 제국 최대 규모의 국경 요새, 베르젤.
그곳에서 지금 막,
수도에서 내려온 행정관료들이 대거 행렬을 이룬 채 입성했다.
그리고 그 행렬의 끝자락엔.
국경 남작들의 머리가 창에 꿰어져 적나라한 모습으로 효시 되어 있었다.
그 머리 아래론 크기가 서로 다른 사지가 마치 한 사람의 몸처럼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가족들이었으리라.
이렇듯 사지가 잘린 이는 비단 남작뿐만이 아니었다.
비리로 불린 재산을 이용해 어느 화려한 식당을 차려 운영하던 상인이나 그 인근에 누군지 모를 기업가의 주제로 은밀한 관계를 만들어 유지하던 사업가 대부분 역시 화를 피하지 못하고 짧은 창에 꿰여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국경 수호의 의무를 등진 채 비리를 저지른 그들의 말로는 참혹하기 그지없어서, 행렬을 마중 나온 대중들은 질린 얼굴로 공포에 떨었다.
수도 행정관들은 이내 성에 진입하기 무섭게 대중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의회를 열었다.
의회의 의장은 라이튼 제국의 재상, 라이츠 페난드.
왼쪽 광대에 핀 검버섯이 인상적인 그는 이마 너머 한참이나 후퇴한 백발을 가진 등 굽은 노인이었지만.
의회의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영롱한 잿빛 브리간딘을 걸친 사내가 서 있다.
라이츠 페난드의 오른손이라 불리는 그는 재무 부장관 아잔 켈스.
그는 라이튼의 중앙은행 총괄자이자 출납을 담당하는 남작들에겐 거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아직 30대에 불과한 이 젊은 남자는 기사로 시작해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라이튼 제국의 보배와 같은 자였기에 그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해서 지금도 발언가들의 혓바닥 위에서 그의 이름이 마를 일 없이 적셔지고 있을 것이다.
감색 눈썹, 깊은 눈매.
그리고 깎아지르듯 내려앉은 매부리코에서 나오는 강렬한 인상을 한 그가,
이제 라이츠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오늘 마련된 이 자리는 단순한 의회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성격은 재판 쪽에 더 가깝다. 우리는 오늘 그 누구보다 단호할 것이며 우리가 내린 결정은 곧 라이튼 제국의 결정이 될 것이다.”
광장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 빠짐없이 숨을 죽인다.
설마 숨소리라도 잘못 냈다가 책을 잡힐까, 숨 참는 자들도 있을 정도다.
그들은 말 그대로 예고 없이 찾아온 재해처럼.
국경 남작들이 결집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닥쳐와 서슬 퍼런 심판을 내리며 지나가는 길마다 피를 뿌렸다.
이제 라이츠가 굽이진 허리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좌중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다.
“베르젤의 영주는 나오라.”
라이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병사들의 손에 끌려 나왔다.
동시에, 라이츠는 무던한 표정으로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대역죄인이자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반역자, 베가르드의 봉토를 이 선언이 끝나는 즉시 모두 몰수한다. 또한 베가르드 가문에 벌금으로 금화 이백 만개를 부과한다.”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그러나 가차 없는 판결.
누가 봐도 이 상황은 의회가 아닌 재판에 가까웠지만, 그것에 이견을 다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이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무려 라이튼 제국의 의회에 반목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의회는 단지 이 자리의 성격을 포장하기 위한 단어일 뿐.
이 모든 건 그저 라이튼 제국이 자체적으로 눈앞에 놓인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라이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 하나가 반역이라는 단어 모양을 한 달군 쇠로 그의 이마를 태웠다.
치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으아아아악!”
자지러지게 울려 퍼지는 남자의 신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상기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었기에 가족의 몰살만큼은 막았다는 것 하나뿐.
이윽고 이마에 낙인이 찍힌 베르젤의 영주‘였었던’ 남자가 다시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고,
뒤이어 한 남자가 성큼성큼 홀로 걸어와 의회 중앙 단상 위에 섰다.
라이츠는 이에 맞춰 탁상 위에 놓인 수많은 두루마리 가운데 하나를 집어 펼쳤다.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수장, 앤서니 트와드. 그대는 기업의 보안에 소홀하여 병기를 유출 시킨 혐의로 벌금으로 금화 삼십 만개를 부과한다.”
떨어진 판결.
그러나 앞에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가벼운 쪽에 속했다.
이는 분명 앤서니 트와드가 뿌린 재물을 받아먹고 거나하게 트림한 발언가들의 덕이었을 것이다.
이제 앤서니 트와드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무려 라이츠에게 읍소했다.
“존경하는 라이튼 제국의 재상이신 라이츠 페난드님께 이 미천한 기업가가 감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에 라이츠는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기업의 병기가 유출된 건 명백히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잘못이나, 이는 반대로 잔악무도한 무법자 집단인 시몬 바스티유의 도 넘은 과격함으로 빚어진 참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걸고 그들에게 설욕할 기회를 주십시오.”
“병사를 내달라?”
라이츠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자 앤서니의 안색이 금세 창백해진다.
하지만 그는 물러섬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들을 잡기 위해 지금까지 가진 모든 재원과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그들에게 가까이 도달했다 자신할 수 있지요. 이제 일을 확실하게 굳힐 무언가만 있다면 그들을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라.”
“그들을 잡고, 유출된 병기까지 수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라이튼 제국은 중립지역이 그토록 목말라하던 정의를 충족시켜주게 되는 겁니다. 즉, 전쟁의 명분과 우위 모두를 점하시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바꿔말하면 중립지역에 세워진 모든 방책이 티바르 쪽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잘도 대담하게 떠들어 대는구나.”
라이츠가 헛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리지만,
반대로 아잔은 조심스레 라이츠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후.
라이츠는 무던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 스물과 병사 이백을 내어줄 테니 일을 마무리 지어라. 기사에 손실이 생길 경우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또한…,”
과연 골골대는 노인이 맞는가?
맹수와 같은 표정을 지은 그에게 앤서니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실패할 경우, 너는 망자의 눈으로 라이튼 제국의 모든 곳을 보게 될 것이다.”
앤서니 트와드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상인이라면 필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팔아내야 하는 법.
만약 상대가 원하는 것이 내 수중에 없다 하여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만들어 팔면 그만이니까.
* * *
몽투르 백작 휘하에 속한 기사단장, 발링스는 피투성이가 된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채 처연한 표정으로 바위 하나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그가 이끄는 병사와 용병 일흔 명이 방금 벌어진 전투의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아직 질긴 숨이 붙은 채로 작게 신음하던 자들 위로, 발링스의 수하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턱밑에 창을 박아 넣었다.
이동하던 발링스를 불시에 습격한 것은 다름 아닌,
순례자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스무 명 남짓한 적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덕분에 백에 육박하던 발링스의 병사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버렸다.
이 미친 들개 같은 놈들!
발링스는 자신의 워해머에 묻은 살점과 핏물을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그가 든 워해머의 손잡이 가죽 안엔,
[89년, 자트 아브]
[하늘에서 쏟아진 한 덩이의 냉정]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챈트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검은 들개들은 이 인챈트 냄새를 맡고 달려든 거겠지.
어쨌든 대외적인 명분 없이 남쪽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으니 저들은 이 발링스를 외로운 늑대로 여긴 것이다.
분을 삭인 발링스는 차가운 이성으로 머리를 식혔다.
시몬 바스티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아마도 이런 들개 새끼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아질 게 분명하니,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죽은 들개 무리 시체를 발로 차며 뒤적거렸다.
그리고,
놈들의 시체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물건에 주목했다.
이건 틀림없이, 다른 것에 비해 매우 과격한 성능을 자랑하는 연료인 바람 기름이다.
범죄자 따위의 놈들이 도망을 치기 위해 애용하는 그것은 분명 중량이 무거운 병사들이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무게만 어떻게 해결한다면 기동성 하나만큼은 확실히 확보받을 수 있다.
“용병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지금부터 모두 걸친 갑옷을 벗는다. 안장에 무거운 것들도 모조리 버려라.”
발링스의 말에 병사들은 군말 없이 입고 있던 갬비슨을 벗어 던졌다.
마찬가지로 발링스 역시 병사 둘의 도움을 받아 입고 있던 풀 플레이트 메일을 벗었다.
방금 순례자가 쏜 총알 세 발을, 그 값이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력화시킨 갑주는 이제 완전히 발링스의 몸을 떠났다.
“우린 지금부터 바람 기름으로 놈들의 뒤를 쫓는다. 병사 둘은 이곳에 남아 용병과 함께 장구류를 회수해 복귀하도록.”
놈의 이동 경로는 이미 파악한 지 오래다.
필요한 건 속도 하나뿐.
들개 새끼들이 더 몰려와 물어뜯기 전에 빨리 사냥을 끝마쳐야 한다.
이제 홀가분한 복장을 한 발링스를 필두로 병사 사십이 말을 타고 땅을 울리며 나아갔다.
이내 얼마 안 가 그 시끄러웠던 발굽 소리가 뚝 멎었다.
* * *
도착한 마을은.
이미 질러놓은 불에 반쯤 잡아먹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길바닥엔 서슴없이 난자당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능욕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적나라한 장면 역시 눈꺼풀을 여닫을 때마다 새롭게 펼쳐졌다.
내 앞에 우뚝 서 있던 맥레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내 다시 고삐를 잡고 움직였다.
“재키, 그 개새끼가…,”
그리곤 차마 외면하려 애썼던 것을 직시하곤.
“시몬, 네가 말하고 보여준 것은 모두 허울뿐이었는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뒤를 바짝 따른 나는,
마을 뒤편 숲에서 나무들이 주고받는 피 냄새에 관한 이야기들을 포착하곤 맥레인을 지나쳐 앞장섰다.
“이쪽으로.”
내 말에 맥레인은 초췌한 몰골에 어울리지 않는 살기를 흉흉히 띄운 채 말없이 뒤따랐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든,
결착이라는 게 지어질 것만 같구나.
그 끝에 맥레인은…,
없겠지.
하지만 맹세하건데.
나는 끝까지 그와 함께 남아 싸울 것이다.
그리할 것이다.
“디안.”
어두컴컴한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맥레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시간이란 건 참 무섭더라.”
“그 느낌, 저도 잘 알 것 같아요.”
“불현듯, 서서히, 또 어느새. 가만 보면 무서운 뜻을 가진 단어를 모두 머금고 있어 너무나 무서워.”
그리고 아비베오에서 보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던 맥레인의 그 슬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현듯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는 잘 지워졌을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그런 말을…,
“맥레인…,”
“서서히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내가 놓친 건 없었을까.”
가슴 한쪽이 심하게 아려온다.
“어느새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는 뜻한 바를 이루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맥레인. 우리는 가족을 구하게 될 겁니다.”
맥레인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래, 구하게 될 거다.”
그리고 작게 웃어 주었다.
부쩍 날 보며 자주 웃어 주는 맥레인의 그 모습에, 나는 순간 기쁜 마음에 활짝 웃어 화답했다.
“시몬 바스티유로부터 가족을 구하게 될 거다.”
다시 거친 숲길 위에서 과감하게 고삐를 놀린다.
이내,
숲 깊숙한 곳에서, 제법 크게 자리 잡은 움막을 발견한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그 안쪽으로 향했다.
보인다.
우리를 확인한 움막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보인다.
기약할 수 없었던 가족의 생환을 보고 뜨거운 눈망울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몬, 그리고 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