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09화 (109/365)

109화. 가족의 이름으로 (4)

“맥레인…!”

시몬은 숨김없는 놀란 표정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마주 선 맥레인을 끌어안았다.

“맥레인!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그리곤 맥레인의 뒤에 서 있던 날 보며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디안…! 무사해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이어서 시몬은 머뭇거리며 울분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포키스는…?”

그러자 맥레인이 되물었다.

“촙이 보이질 않던데, 그는 어떻게 된 거지?”

시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떨궜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좀 생겼어, 그런데 촙이 우리를 위해 일부러 뒤떨어져 가길 자청했었지…, 그 이후론…, 미안해 맥레인.”

맥레인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거렸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 역시 잠자코 있었다.

“맥레인,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얼굴이 상했나? 젠장! 디안도 너무 고생 많았다.”

시몬은 재차 우리를 번갈아 보며 눈물 흘렸다.

이어 옆에 있던 재키가 제법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맥레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록 희생이 뒤따랐지만, 맥레인. 이제 우린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모든 걸 청산할 수 있어.”

이에 맥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드디어 그때가 오는군.”

“동쪽에서 배를 구한 뒤 곧바로 테리라스로 갈 거야. 채권 두 장만 팔아도 충분히 그만한 금액을 마련할 수 있겠지.”

“그렇겠지, 매튜의 죽음으로 산 채권이니까.”

“씨발, 맥레인. 이제야 와서 비아냥거리기야? 매튜 역시 우리가 자유를 되찾는 걸 바라고 있을 텐데 넌 변함없이 지랄투성이구나!”

지켜보고 있던 시몬이 서둘러 둘 사이를 가로질러 막아섰다.

“모두가 예민해질 때니 서로 더 조심하도록 해. 일단은…, 쉬는 게 좀 어때 맥레인?”

“그래…, 그래야지.”

맥레인은 지친 얼굴로 뒤돌아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한껏 울어 눈 주변이 붉어진 비질라는 내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안나 아주머니는 헤진 내 구두를 어떻게든 손 봐주려 당신의 갈라진 손으로 말린 가지를 실 삼아 꿰맸다.

안드레와 케니는,

감당할 수 없는 음울함을 서로 덜어내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장고 끝에 맥레인은 속 쓰린 말투로 말했다.

“오는 길에 포키스를 만났어.”

별 기대하지 않던 그들에게 들려오는 때아닌 희소식에, 그들은 다시금 눈을 반짝이며 맥레인을 바라보았다.

이 시점에서 가족의 생사만큼 중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앞에 마주했던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다.

맥레인은 잠시 거친 기침에 시달리다가 겨우 몸을 추스른 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릴 쫓는 놈들에게 잡혀있던 촙도 구해냈지.”

이어지는 말에 케니와 안드레는 서로 맞잡은 손을 꽉 잡은 채 맥레인의 말을 기다렸다.

“촙은…, 몸이 많이 상했지만 살아있어. 포키스가 그를 치료해 줄 거야.”

안나 아주머니는 손보고 있던 구두를 잠시 놓은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케니와 안드레 역시 붉어진 눈시울로 북받쳐 오르던 슬픔을 꾸역꾸역 삼켰다.

하지만 맥레인은 좀 더 냉정한 표정으로 그들의 슬픔이 채 식기도 전에 본론을 말했다.

“촙은 시몬이 자길 버렸다고 했어.”

그 말에,

안드레가 즉답했다.

“하지만 맥레인, 보스가 분명…, 촙이 우릴 위해 희생했다고…”

“그 당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맥레인의 질문에 케니가 침착함을 애써 유지한 채 답했다.

“마을에서 채권 하나를 팔고 난 뒤, 뒤늦게 합류한 재키의 동료들 때문에 이동 시간에 차질이 생겼어요. 그 와중에 추격자들이 들이닥쳤고…, 그런데 촙은 사건이 벌어지던 전날 밤 보스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했어요.”

“그게 뭐지?”

“재키의 동료들과 함께 조직의 후미를 지켜야 한다는 말만 했는데…,”

그렇게 해서 촙은 재키의 동료들에 의해 버려졌던 거군.

케니의 말에 맥레인은 고개를 슬쩍 떨궜다.

그리고,

“새벽을 틈타 이곳에서 떠나라.”

그들 하나하나와 눈 마주치며 단언했다.

“케니, 안드레와 함께 말을 타고 떠나.”

“맥레인…?”

케니의 의문이 섞인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맥레인은 고개를 돌려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 매튜의 말이 있어. 비질라와 함께 그 말을 타고 떠나라.”

“그게 무슨 말이야 맥레인…!”

따지듯 묻는 안나, 그리고 안드레의 의문.

“맥레인, 우린 시몬 바스티유…,”

“시몬 바스티유는 이제 없어.”

맥레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안드레를 쏘아붙였다.

“이젠…, 그냥 무법자인 시몬이 있을 뿐이야.”

이어 맥레인은 그들의 질문을 더는 받지 않겠다는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새벽을 틈타 떠나라.”

그러나 케니는 끝까지 포기 않고 물었다.

“포키스도 그 말을 곧장 따랐나요?”

그런 케니의 질문에 나는 맥레인을 대신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케니…, 포키스는 우리 남은 가족들의 안전 때문에 떠나길 선택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이곳에 있는 이상, 가족들은 도망칠 수 없으니까. 저들은 어떻게든 포키스의 능력을 이용해 가족들이 떠나는 걸 막으려 들 거야.”

그래, 포키스가 맥레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유.

그것은 그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맥레인은?! 디안 너는!”

따지듯 묻는 안드레에게,

맥레인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그런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난 이미 결정했어, 맥레인과 끝까지 싸우기로.”

“어째서…!”

“안드레.”

내 강한 어조에 안드레는 놀란 표정으로, 북받치는 감정에 입술을 떨 뿐이다.

“부탁해. 우리 가족을 지켜줘. 그리고 바랄게, 너도 내게 가족을 지켜달라 부탁해줬으면 좋겠어.”

안드레는,

첫날.

내게 으스대며 천연덕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줬던 안드레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안나 아주머니는,

달아오른 코끝을 애써 감춘 채 태연하길 애썼다.

그리고 그런 각오에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알아차려, 말없이 내 품에 있던 비질라를 조심스레 자신의 품에 옮겼다.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라티아의 일이 있고 난 뒤,

덤덤히 맞이했던 이별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이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서.

나도 이젠 더는 버티기가 힘들어.

끝내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눈물이 내 볼을 긁고 지나간 후였다.

* * *

어스름이 절정에 달하는 심야.

촛불 하나만이 움막 안에서 외로이 춤을 춘다.

그 앞에,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시몬은 말없이 품에서 꺼낸 머스킷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맞은편엔,

재키가 앉아 있었다.

“보스, 이제 슬슬 결정을…,”

“재키.”

재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몬은 격앙된 표정을 지으며 재키를 노려보았다.

“그냥…, 닥쳐.”

이에 재키는 말없이 고개를 슬슬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재키는 이제 시몬과 말을 편하게 놓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재키는 시몬이 어떤 인간인지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심란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결국엔 시몬, 이 모든 건 네 욕망으로 비롯된 결과일 뿐이야.

상실 운운하며 포장질 하던 그 욕망을 기껏 드러낼 수 있게 해줬더니, 뒤늦게 후회가 막 밀려오나?

하지만 이젠 후회도 별 의미가 없잖아?

그냥 이제 받아들이란 말이야.

이제 너의 가족은 나와 내 동료들뿐이다.

우리가 너의 죄책감을 삼켜줄 테니, 그저 너는 가진 욕망을 펼치기만 하면 돼.

너의 꿈, 너의 이상을.

이제 우리와 공유하면 돼.

재키는 살짝 고개 숙인 채 밀려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이윽고,

시몬은 재키에게 가지고 있던 머스킷을 건넸다.

“여기에 담긴 화약에 불이 붙을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내일, 우리는 배를 타기 전에 무조건 적들을 맞이하게 될 테니…,”

“될 테니…?”

“맥레인과 디안이 우릴 위해 싸워줄 거다.”

“그럼 이건 내게 왜 주는 거지, 보스?”

“만일을 위해서다. 가족의 대부였던 내가 나서면…, 그들의 상실이 얼마나 크겠나.”

“…,그래 알겠어, 보스.”

재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받아 든 머스킷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

* * *

이른 새벽.

가슴 속에 바위 두세 개가 끼얹어진 것만큼 무겁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생기는 기분이야.

이젠 마시고 뱉는 숨에도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입안은 고름으로 진창이 되어 버렸고, 몸 안에 득시글거리는 염증은 내 근육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구나.

과연 지금 상태로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언제나 내 육신에 관해선 확신만이 있었는데, 이제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몸은 내 의지에 따라 마지막까지 움직여 주겠지.

그거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 쟁여놓았던 연초를 모두 꺼내 보았다.

남은 건,

단 두 개비뿐인가.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가족들은 새벽을 틈타 모두 떠났다.

사실 시몬은 저들이 그보다 먼저 떠나갔어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보다,

이쯤이면 슬슬 때가 다가왔지 싶은데.

가족들을 설득하는 데에 포키스를 열거하긴 했지만, 그를 먼저 떠나보낸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정찰 능력이,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무수한 적들을 발견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시몬과 재키 일당으로부터 베일에 가려두기 위해서 그를 먼저 보냈다.

물론 그를 떠나보내게 된 결정적인 이유 역시 가족이었으니 다른 이유 따윈 따로 붙일 필욘 없나.

그래, 결국엔 가족 때문인 거지.

“디안.”

조용히 디안을 깨웠다.

그는 담담히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맥레인.”

“밤샌 거냐?”

“그건 맥레인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그럼 가는 밤 심심하지 않게 말이라도 걸지 그랬냐.

아니, 내가 걸어볼걸.

아쉽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여러 번 말했지만, 전 맥레인과 함께 할 겁니다.”

“왜 그렇게 날 좋아하냐 어?”

괜히 장난을 쳐보지만,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전 아비베오에서 당신의 죽음을 볼모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어찌 이 배움으로 당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디안,

그게 바로 기사의 마음가짐이란 거다.

훌륭하다 칭찬해주고 싶지만, 덜컥 그럴 용기가 나질 않네.

“이제…, 가자.”

“네.”

* * *

재키와 그 일행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시몬은 조용히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나와 디안이 다가가니 시몬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맥레인! 몸은 좀 어떤가? 디안은 괜찮니?”

이젠 말 섞는 것도 귀찮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시몬.

“시몬, 어제 남은 가족들 모두가 떠났어.”

내 말에 시몬의 표정이 대번에 바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맥레인?”

“내가 그들을 떠나보냈어.”

“맥레인! 똑바로 말해.”

“똑바로 말하라고? 그래, 똑바로 말하지. 오는 길에 포키스를 만났어, 그리고 그와 함께 너에게 버려진 촙을 구했지.”

그 말에 자연스레,

재키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 주변으로 슬슬 다가왔다.

“시몬, 왜 그렇게 망가져 버린 거냐? 아니, 애초부터 넌 망가진 인간이었던 거였어.”

“…,맥레인.”

“시몬, 언제부터였냐. 엘라를 잃었을 때부터였냐?”

“맥레인! 당장 입 닥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나는 그의 격정적인 반응에 놀란 시늉을 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인지, 주위에 모여든 장정 놈들이 무기 자루에 손을 얹기 바쁘다.

그래도 시몬 바스티유의 예전 집행자 대우는 해주겠다, 이건가?

거 참, 고맙네.

“몸이 아프니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나, 맥레인? 엘라를 죽인 건 너야!”

“죽을 걸 알면서도 넌 내게 말했지, 검을 휘두르라고. 쪽 구름을 용골 삼아 날아가던 배를 향해.”

“닥쳐! 맥레인, 이 이상 선을 넘어버리면 나도 이젠 가만있지 않겠어!”

“시몬, 이미 넌 한참 전에 선을 넘어 움직였어.”

맥레인의 목에 핏대가 울컥 솟았다.

“언제부턴가 시몬 바스티유는 가족들을 위한 요새가 아닌 감옥이 되어 있었을 뿐이야. 우린 이제 그 감옥을 나가려 해, 시몬.”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철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정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우릴 겨눴다.

개중에 몇몇은 총을 겨누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자루에서 셀레어를 뽑아 시몬을 겨냥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그 상황에서,

변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일어났다.

“놈들을 찾았다,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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