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가족의 이름으로 (5)
탕! 탕!
불을 머금은 화약이 괴성을 내질렀다.
매캐한 냄새와 흰 연기가 일대에 범람하고, 개중엔 먼저 들이닥친 병사와 그리소 일당 몇이 부딪쳐 뒹굴었다.
그 와중에 시몬과 재키는 욕지거리를 한껏 내뱉으며 핵심 일당과 함께 뒤로 내뺐고,
나와 디안은 그런 그들을 쫓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맥레인, 저들이 말을 탔어요!”
휙!
디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휘파람을 불자 기다렸다는 듯 벤투스가 달려 나왔다.
난 그런 벤투스의 안장 머리를 붙잡고 단번에 뛰어올라 디안의 목 뒤를 채가듯 들어 올려 뒤에 앉혔다.
벤투스여,
야생이 잉태한 한 줄기 바람이여.
마지막이로구나.
옛날처럼 뛰어라.
내 심정이 닿았을까.
벤투스는 뒷발을 연달아 치대는 특이한 동작을 시작으로, 쏜살처럼 튕기듯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동시에,
온몸을 옥죄는 고통을 꾸역꾸역 씹으며 가진 감각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 옛날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럼에도 제법 날카로운 기세가 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뒤따라오는 순례자 무리가 셋, 그리고…,
저 멀리서 또 다른 군세가 들이닥치고 있구나.
그렇담 시간이 그리 많진 않겠어.
“맥레인! 앞에!”
뒤에 타고 있던 디안이 대뜸 경고를 날렸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앞에서 순례자 무리 하나가 쇄도하듯 들이닥쳤다.
하지만 벤투스는 중간에 발을 사선으로 틀어 그들의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빗겨 갔다.
“디안, 너는 시몬과 재키가 어디로 가는지만 집중해!”
“네, 맥레인!”
영리한 벤투스는 고삐로 전하는 내 의견을 스스로 절충해 방향을 정하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주위엔 바람을 찌르는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고 있어 상황마다 늘 급박한 기류가 우릴 짓눌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디안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집중력으로.
막 언덕을 타고 올라가 능선을 통해 산을 빠져나가려는 그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재키의 일당 대부분은 그대로 포위당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음에도, 그들에겐 그것이 그저 시간벌기에 불과하다는 듯 움직이는구나.
벤투스도 이제 막 언덕으로 향하는 오르막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채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을 환하게 밝혔다.
덕분에 능선을 막 타고 오르려는 시몬과 재키의 위치가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그 시점부터 그들은 말에서 내려 좀 더 깊숙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쫓아 언덕 끝, 능선의 시작점에 도달한 나는.
이제,
말에서 내려.
따라 내린 디안을 마주한 채.
그의 두 어깨를 맞잡았다.
“디안.”
“맥레인?!”
“내 말 잘 들어.”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맥레인!”
눈치 빠른 녀석, 내가 내뿜는 분위기를 바로 파악한 듯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나는 더욱 굳건히 서서 그를 재차 불렀다.
“내 말 잘 들어, 디안!”
“맥레인!”
“이제…, 여기서 끝을 내야 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고집부리지 말고 디안! 시간이 없어 제발!”
“제발 맥레인, 뭐 하자는 건데요!”
나는 미리 벤투스의 안장에서 꺼내놓았던,
작은 함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우주가 파르르 떨렸다.
당황해 딱딱하게 굳은 그에게, 나는 함에 있던 팬던트를 목에 걸어 주었다.
그리웠던 향기다.
해서, 순간 옥죄어오던 고통도 잊은 채 심장이 발칵 뛴다.
“디안, 이제부턴 네 이야기의 시작이야.”
“맥레인…!”
“누구에게도 재단되지 않는, 너만의 인생을 살아. 누구도 너를 결정짓게 하지 말라고. 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디안은 허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려보냈다.
그러나 난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다잡고 말했다.
“잘 들어! 또 이건 내 부탁이다. 부디…, 부디…, 너 자신에게 잡아먹히지 마라. 그 무엇도 널 퇴색하게 만들지 마라.”
“맥…레인!”
“어쩌면 나는 네게 아주 큰 짐을 강요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부탁이 될 수도, 또 네 결정이 될 수도 있겠지. 그건 이제부터 온전히 네가 결정해야 할 몫이 될 테지만, 난 네가 어느 길로 가든 응원하마.”
“아아…, 맥레인 하지만…!”
“이제 벤투스는 널 위한 나침반이 되어줄 거다.”
“당신은…, 맥레인 당신은! 길도 찾을 줄 모르면서!”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이젠 알아, 내 갈 길이 어디인지.”
“모르겠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맥레인!”
“내가 알고 있었으니 괜찮다, 디안. 가라.”
이어 나는 그의 허리춤에서 셀레어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내 낡은 아밍 소드의 폼멜을 부러트려 그에게 건넸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내 물음에, 디안은 덜덜 떠는 손으로 부러진 폼멜로부터 드러난 가시에 손바닥을 짓누르듯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흐르는 피,
그에 맞춰 나도 셀레어의 폼멜을 쥐어 부순 뒤 손바닥을 지그시 가져다 대어 피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내 몸에 들어오는 바람은 없다.
되려 거부반응에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뿐.
이는,
피를 끓였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날 감추기 위해,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경지를 끓여 기화시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쿨럭.
이젠 한계다.
내 몸도 결국 한계라는 벽에 치닫는 순간이 오는군.
디안은,
마음이 넓은 아이였다.
그래서,
지금 내 심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려,
피 흘리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 손바닥을 맞잡았다.
“맥레인, 가족이 되어주어서 감사합니다. 난 평생 당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이를 갈고 있다.
아직 내 말에 반목할지, 순응할지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보다.
기뻤다.
나도,
너와 가족이 되어 기쁘다, 디안.
기쁘다.
“이제 가! 어서!”
나는 반강제로 안기도 버거울 만큼 장성한 디안을 끌어안아 벤투스의 안장에 올렸다.
그리고 벤투스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동안 고마웠다, 이젠 네 발자취를 내 유일한 가족을 위해 써다오.”
서둘러 놈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벤투스는,
맹수처럼 부르짖으며 한참을 서성이다.
끝내,
달려갔다.
잘 가라.
“잘 가라.”
잘 가라 디안.
“잘 가라 디안…,”
이제,
내게 주어진 일을 마무리할 때다.
* * *
산을 오른다.
거친 숨이 구멍 난 폐를 쓰다듬고 올라와 핏방울과 함께 코와 입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그러나 내 발에 더딤은 없다.
그러다 마주친 순례자 몇과 검을 나눴다.
늘 낡은 검만 써서 몰랐는데, 제법 날이 살아있는 좋은 검이로구나.
저들이 내놓는 공격이 무엇이 되었든 내겐 상관없는 것이었다.
비록 피 끓여 모든 게 기화해버린 몸이지만, 그럼에도 악착같이 떠올린 기억으로 내뿜은 검술은 그들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기억으로 말미암아,
내 가족, 디안이 가진 재능의 초안을 완성 시켰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다.
총탄 하나가 내 배에 박혔다.
하지만 내 몸은 일말의 주춤도 없이 말끔히 움직여 순례자 다섯을 연달아 베어버렸다.
기침은 더욱 깊어지고 온몸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웠지만,
그보다 홀가분함에 몸은 더욱 가볍게 느껴질 뿐이다.
다시 이번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갑옷 안에 입는 천 옷을 입은 무리가 내 앞에 들이닥쳤다.
제법,
강인한 자다.
해서 기력이 남아있을까 싶은 내 몸을 억지로 비틀어, 가진 셀레어의 바람 한 줄기를 풀었다.
그러자 그는 서리가 낀 워해머로 내게 응수했다.
동시에 이러한 바람의 흔적을 느낀,
셀레어를 쫓는 자들의 기척이 일거에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나는 다시 셀레어의 바람 한 줄기를 억지로 몸에 품어 발산했다.
그 결과로 왼쪽 정강이뼈에 금이 갔다.
상대도 결사를 다짐했는지,
다시 한번 나이에 걸맞지 않은 호쾌한 움직임으로 가진 재해의 힘을 개방시켰다.
하나의 거대한 우박은 내 발등을 짓이겨 날려버렸지만,
우박 위를 스치듯 지나간 내 바람은 그의 목을 휘감았다.
더,
더 와라.
셀레어는 여기에 있다.
그치지 않고 검을 번쩍 든다.
다시 한번,
바람 한 줄기를 내뿜는다.
으득.
갈비뼈가 안으로 쪼그라들듯 부러져 순간 의식을 잃을 뻔했다.
이어 또 다른 무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 무리와 전투를 벌였는지, 놈들의 상태도 영 말이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라이튼 제국에서 보낸 기사들 같은데,
어쩌면…,
질 수도 있겠다.
사방에서 검과 도끼가 쇄도한다.
그중 대다수를 셀레어로 쳐냈지만, 날카로운 도끼 하나가 내 배에 절반 이상 베어 들어왔다.
“크헉…!”
뜨거운 피가 목구멍을 치달아 올라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배에 박힌 도끼를 품은 채 검을 크게 휘둘러 그들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굶주린 맹수처럼 그들은 다시 내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이제는 바랄 수 없던, 해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내겐 앞으로 주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깨달음이 찰나의 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상극이 극상을 벼린 건,
디안 하나뿐만이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든 것을 잃은 내 육체가 깨달음 하나를 얻어…,
[운명의 노래]
[역전]
내 남은 유일한 가족의 비전이 두 손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파팍!
은빛 궤적에 따라 꿰인 일곱 명의 장정이 그대로 갈라져 쓰러진다.
동시에,
나도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쿠…헉…”
진득하게 뭉친 핏덩이가 연신 목구멍 안에서부터 꿀렁거리며 튀어나온다.
“흑…헉…흑…”
점점 짧아지는 숨.
그런 내 앞에,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사람.
“이…씨이발… 괴물 같은 새끼.”
“…재…애키…쿠헉…! 좆…같은 짐승 새끼가 아직 살…아있었…구나.”
철컥.
재키는 표정을 있는 힘껏 일그러트리며 내게 머스킷을 겨누었다.
“이제 그만 쉬어라, 그 눈꺼풀 밑에 테리라스의 햇살은 없겠지만.”
“근…본…도…긍지도…없는…빈 껍데기…곤충 새끼…”
탕!
불 만난 화약이 밀어낸 탄알이 내 어깨에 박혔다.
이에 발작하듯 나는 오른발에 힘을 잔뜩 주어 일어섰고, 당황한 재키는 서둘러 내려간 공이를 세워 다시 한번.
탕!
총을 쏴 내 가슴팍을 맞췄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안 죽는…!”
탕!
재차 나가는 탄알이 내 옆구리를 스쳤다.
그렇게 재키의 지척에 다가가기 무섭게, 나는 온 몸을 던져.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이…등…신아…,누군…가의 긍지를…쳐 죽이려면…머리를…맞췄어야…지.”
“끄…윽…, 이 개 씨발…!”
재키의 가슴을 꿰어 들어간 셀레어는 놈의 등 밖으로 뿜어져 나와 있었다.
이어 내가 제풀에 지쳐 바닥에 쓰러지자, 재키는 가슴에 검이 박힌 채로 주춤거리며 한참을 뒷걸음질 치다가.
품속 구멍 난 주머니를 통해 피 묻은 채권을 허공에 다 쏟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 숙였다.
끝…
인가.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마지막 남은 연초를…,
* * *
언제였을까.
기사 베르융이 들판에 누워 쉬고 있던 맥레인 곁에 다가와 물었다.
“맥레인, 언제부턴가 연초 피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끊은 지가 언젠데.”
“세상에, 숨쉬기를 포기할지언정 피우시던 연초를 끊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메리안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건지, 연초만 피었다 하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잔소리를 퍼붓는 통에 도통 필 수가 있어야지.”
“세상에, 글라디옴께서도 기척을 놓친단 말입니까?”
“말도 마라, 이젠 연초만 펴도 메리안의 잔소리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를 지경이니까.”
맥레인의 투정에 베르융은 한참이나 배꼽을 잡고 웃었다.
* * *
살아남은 아귀들이 셀레어를 쫓아 산을 타고 올라오는 상황 속에서,
시몬은 조용히.
쓰러진 맥레인 곁에 앉았다.
후회하긴 이미 늦었으며, 그렇다고 본인을 변호하기 위해 변명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던 그는.
곧 엘라를 죽였다는 게 자신이었다는 걸 속으로 몇십 번 되뇌듯 고백하곤 막 떠오르는 따듯한 햇살 아래에서.
피 묻은 머스킷을 자신의 이마에 댄 채.
…탕!
* * *
벤투스는 중립지역을 거슬러 올라가는 바람처럼 한없이 올라가다, 어느 산길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인기척이 들리기 무섭게,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그 남자는,
조이.
조이 크레비디.
그는 열 마디 말 대신,
벤투스를 타고 온 내 모습을 보곤 착잡한 표정으로 이를 악문 채 날 거둬들였다.
그리곤 그는 말없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나를 방으로 안내하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난,
조용히 맥레인이 남긴 흔적들을 매만지며 한참 허무함과 그리움에 사무치다가.
문득,
들고 온 벤투스의 안장 가방 속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것은,
[용의 시대]
이윽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글자가 하나하나 금빛으로 빛나니.
그것은…,
[0]
[마그나베노스]
[세상을 관통한 창공의 눈]
* * *
날이 밝기 무섭게,
나는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조이 앞에 우뚝 섰다.
그러자 조이는 내게 물었다.
“결정했는가.”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에 걸친 팬던트를 쥔 채 그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디안…,”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이어지는 내 말을 듣고,
“디안 베나즈.”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내 이름은,
디안 베나즈.
‘가족의 이름으로.’
-1부 끝-
운명의 노래
2부 : 태풍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