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11화 (111/365)

111화. 변화의 바람

맥레인 베나즈의 길고 길었던 소임이 끝났습니다.

기사들의 왕이 가진 검을 해체하여, 그 자루에 있는 인챈트를 파내고.

이내 만들어진 낡은 검 자루에 인챈트를 옮겨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끔 위장한 것처럼.

기사 맥레인 역시 무법자로서 최선을 다해 위장자의 삶을 살았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자신을 지워냈습니다.

비록 수십 년간 비루한 무법자로 살았을지언정.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분명 기사로서 담담히 최후를 받아들였을 거라고 저는 장담합니다.

이제,

저는 친우이자 존경하는 기사였던 맥레인이 남긴 유산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 유산은 그의 의지로 벼려진 새로운 바람이며,

보기에 찬란하고 또 밤하늘의 별처럼 고고합니다.

그의 이름은 디안 베나즈.

그의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저로서는 가늠이 되질 않지만 분명 선생께서는 헤아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하여 이 편지와 함께 맥레인의 의지를 떠나보냅니다.

저도 이제 거짓 장막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변화의 바람이 엄연한 날씨로 군림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소임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도 부디 찾아온 별빛을 거두어 다독여주시기를.

-조이 크레비디-

* * *

조이 크레비디는 차분히 자신의 거짓된 신분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능히 하루 만에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치밀함을 자랑했지만.

그는 나를 배려해 며칠에 걸쳐 천천히 움직였다.

내 어질러진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 그게 쉽지는 않았다.

연속된 상실에 난자당한 감정은 쏟아진 물과 같아서 어떻게 다시 주워 담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기 위해 한참을 고심하다가, 막상 주워 담으려 시도하려 했을 때는 다 말라 사라진 것처럼.

난자당해 흩어진 내 감정 역시 휘발되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는 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다만,

내 감정은 투명한 물이랑은 달라서.

얼룩이 남았다.

그 얼룩은 아마도 평생토록 남아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 얼룩이라도 남아있음에 감사한다.

이는 내게도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으니까.

그렇게 남겨진 얼룩을 포용할 수 있을 때 즈음에,

조이는 늦은 밤 나를 불렀다.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는 한동안 촛불의 춤사위만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품에서 단단히 봉인된 편지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곧 중립지역에 전쟁이 벌어질 거다.”

이어서 그는 어느 글자가 새겨진 반지 하나와 가방, 그리고 은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연달아 식탁 위에 꺼냈다.

“해서 지금은 중립지역 전체가 소란스러울 테니 그 틈을 타 고삐를 잡고 북쪽으로 이동해라.”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건 벤투스가 알려줄 거야.”

마지막으로 끝이 닳은 낡은 수첩을 꺼낸 조이는 진심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내게 조언해주었다.

“비록 사흘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써 내려간 거지만…, 낯선 북쪽 땅의 환경에서 적게나마 도움이 될 거다.”

이내 식탁에 올라온 반지를 가리킨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북쪽 국경을 넘을 땐 이 물건이 요긴하게 쓰일 거다. 또 가방 안엔 제법 쓸만한 것들을 챙겨 넣었으니 때맞춰 쓰도록 하고…,”

조이는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가는 길에 마주한 시련에 무릎 꿇지 말기를.”

그건,

진정으로 그가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처럼 느껴져서.

나는 기꺼이 은은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새벽.

달빛에 비친 구름의 모양이 심상치가 않다.

어색하게 맞물린 하늘 사이로, 금방이라도 뭐가 쏟아질 것 같네.

그럼에도 나는 담담히 벤투스의 목을 쓰다듬으며 안장에 가방을 단단히 채웠다.

이제, 안장 위에 올라탄 나는 배웅하는 조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이, 나중에 다시 봐요.”

그러자 이번엔 조이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 흔들었다.

“그래, 다시 만나자. 그리고…, 잘 가라.”

그의 두 눈엔 어느새,

반짝이는 별 두 개가 맺혀 있네.

“맥레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내 뒤늦게나마 대신하마. 부디 다치지 마라.”

나는 얼른 고삐를 틀었다.

품었던 얼룩이 내 얼굴에 다시 나타날까 봐.

이윽고 고삐를 치대고 박차를 가하자, 벤투스는 기다렸다는 듯 뒷발을 두 번 두들기더니 가벼운 몸놀림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 *

멀어져가는 영롱함을 놓치지 않으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조이는.

이내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아 녹이 슨 자물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목걸이로 간직하고 있던 열쇠로 그것을 열려고 했으나, 자물쇠가 너무나 낡아버려 열쇠 구멍에조차 맞질 않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가?

이제야 시간의 무게를 체감한 조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열쇠를 바닥에 내려놓고 대신 무거운 촛대를 집어 들었다.

이어서 크게 휘둘러 자물쇠를 찍는다.

팍!

낡은 자물쇠가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힘없이 쏟아지고, 이내 먼지 쌓인 상자를 열어젖힌 조이는.

그 안에서 막 들어온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갑옷을 바라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부터 가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손끝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갑옷을 쓰다듬던 그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래, 가야 한다면 베르융이 먼저겠지.”

이윽고 잘 보관된 갑옷 아래, 손 전체를 감싸는 가드가 인상적인 세이버를 집어 든 조이는 물린 검집을 잡아 힘차게 뽑아냈다.

그러자 양초와 기름을 머금어 유복한 광택을 자랑하는 날이 소리 없이 번쩍인다.

그것은,

[21년, 이다치오]

[세상을 적신 하늘의 눈물]

조이의 과거 지녔던 명예를 가장 잘 대변하는 물건.

“맥레인, 자네를 위해. 그리고 디안을 위하여.”

갑옷을 거두어 가죽에 고이 감싸고, 세이버를 허리춤에 차고서 미리 싸놓은 나머지 짐까지 들쳐 맨 그는.

이제 문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집에 불을 지른 뒤 말 위에 올라탔다.

새로운 바람이 지금 막,

남풍이 되어 북쪽으로 올라갔으니.

그에 맞추어 나도 서둘러 범람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랴!”

조이의 우렁찬 외침에 맞춰, 불타오르는 집을 등진 채 말이 땅을 내리 찼다.

그 말의 머리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 * *

서서히 햇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쉼 없이 달리던 벤투스의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을 흔들며 잠든 나무에 기대앉아 조이가 건네준 수첩을 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글씨는…,

‘마이스터’

[디안, 너는 북쪽으로 치달은 직후 마이스터 ‘토르킨 루에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사상가이자 철학가이며, 맥레인의 스승이었던 자다.

비단 맥레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철학에 감화된 수많은 인재가 그를 거쳐 갔지.

그리고 너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 거다.]

이제야 맥레인의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기회가 된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정보들을 좀 더 알아보면 좋을 것 같구나.

“도중에 잠시 고삐를 돌려도 이해해 줄 거지, 벤투스?”

내 물음에 벤투스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저 행동은 틀림없이 긍정이었으리라.

벤투스의 휴식을 끝내고 나는 다시 위에 올라타 이동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움직이다가 해가 우뚝 솟을 때쯤,

나는 다시 숲의 경계 근처에서 벤투스의 거친 숨을 회복시키기 위해 내렸다.

이번엔 수첩 대신 맥레인이 내게 남긴 낡은 아밍소드를 들어보았다.

조이가 부러진 폼멜 부분을 수리해준 덕에 당장 무리 없이 균형을 잡고 휘두를 수 있는 상태다.

냉정하게 비교하자면 롱소드인 셀레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조악한 날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내게 있어선 당연하게도 이 낡은 아밍소드가 셀레어보다 훨씬 더 애착이 갔다.

몇 번, 검을 휘둘러 새로운 감각들을 받아들인 나는.

그냥 맥레인과 함께 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도 잠시.

슬쩍 조바심도 든다.

맥레인이 목숨을 걸고 감추었던 것 역시, 이 아밍소드였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자루 속에 숨어 있는 인챈트였겠지만 말이다.

이런 내가,

그의 유지를 성공적으로 이어받을 수 있을지.

기회만 된다면 맥레인,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그럼 또 쌀쌀맞고 거칠게 대답해줄까, 아니면 종래에 보여주었던 어울리지 않는 자상함으로 타일러줄까.

아비베오에서 그에게 부렸던 치기가,

지금에 와선 사치처럼 느껴지네.

푸릉!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내게 벤투스가 콧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래,

너야말로 맥레인이 그리울 텐데.

상대적으로 어린 감정은 잠시 내려놓고, 겨울에 걸맞은 혹독함을 한 입 베어 문 나는 다시 벤투스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에 맞춰,

“눈이다.”

막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내 볼 위에 떨어졌다.

이윽고 구름이 완벽하게 교묘한 모습으로 맞물리자, 고삐 풀린 황소처럼 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하얀색으로 켜켜이 색칠되고,

그 위로 내가 가는 길이 선명하게 찍히니.

끝내,

나는 중립지역의 북쪽 끝에 도달했다.

얕은 강줄기를 끼고 저 너머로 펼쳐진 새로운 땅은, 낯설고 또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만 하다.

생각해보니.

내 삶에서 처음으로 가장 멀리 이동해 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네.

그리고 덩달아, 이 이후에 하는 모든 일도 내 삶에 있어 최초의 것들이겠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은 절반 이상이 하얗게 칠해져 있다.

안녕,

평생 그리워할 나의 가족아.

안녕,

그래도 설레었던 자유를 선물해줬던 땅이여.

안녕,

안녕.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젠,

벤투스의 발걸음만이 하얀 세상에 새롭게 그려질 뿐이다.

나는, 고삐를 잡고 얕은 강줄기를 돌파해 건너편 땅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 * *

쉼 없이 눈이 내리던 날.

중립지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두 제국이 드디어 전쟁을 개시했다.

수많은 욕망을 기폭제 삼아 폭발하듯 치달은 상황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으며, 또 되돌릴 이유마저 상실한 채.

서로 죽이고, 죽을 뿐이다.

명분을 잡아먹고 명예를 얻어라.

죽어서도 후세가 너의 명예에 존경을 지불할 것이다.

수십 개의 깃발이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한 지 하루 만에 꺾였다.

서로의 피해가 가장 막심했던 곳은 단연 라티아였다.

그곳의 곡창이 빨아들인 양 제국의 세금을 생각하면, 이번 전투에서 라티아는 가장 중요한 땅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삼 일이 지났을 때.

앤서니 트라이던트는 라이튼 제국에게 완벽히 숙청당했다.

포드의 상단은 분리되었으며.

북쪽의 즈라칸이 이끄는 군벌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경계선을 넘으려 했지만,

경계를 수호하던 열두 기사와 그들이 이끄는 이백의 병사에게 철저하게 도륙당했다.

즈라칸의 군벌이 칠백에 육박했음에도.

그 기반이 탈영으로부터 시작했던 이상.

이미 싸움의 승패는 결정이 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듯 중립지역이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을 시기에,

변화를 몰고 올 심상치 않은 바람이 이제 막 북쪽의 거대한 대륙 ‘아이베리아’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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