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눈, 겨울
피와 쇠 비린내가 진동하는 평야.
그 위로 켜켜이 쌓인 눈밭 곳곳엔 붉은색이 옅게 칠해져 있다.
그런 일대를 두꺼운 갬비슨을 입은 스무 남짓한 병사들이 훑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엔 끝이 날카로운 기다란 장대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이제 그들은 붉게 물든 눈밭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뿌옇게 올라오는 김을 발견하기 무섭게 기계적인 모습으로 든 장대를 내리꽂는다.
“꺽…”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장대를 꽂아 넣은 곳으로부터 외로운 단말마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쑤셨던 장대를 뽑아 그곳을 지나치기 무섭게, 새로이 뿜어져 나온 붉음이 눈밭에 서서히 덧칠되어 퍼져 나갔다.
병사들의 일 처리가 끝나자, 이번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린 시동들이 다가와 익숙한 모습으로 붉은 눈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드러난 것은 막 숨이 끊어진 시체.
곧바로 아이 하나가 시체 주위에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뒤이어 달려든 두 아이는 능숙한 솜씨로 손가락과 목을 살펴 장신구가 없는지를 살폈다.
이 눈밭은,
방금까지 격전이 벌어지던 현장이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살기 위한 갈무리가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장 인근에 차려진 제법 규모가 큰 야영지에선,
막 잡혀 온 한 남자가 단두대 위에 올려졌다.
그런 남자를 두고,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두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뒤돌아 건조한 말투로 이야기를 나눴다.
“난폭한 놈들은 이게 끝인가?”
“아마도, 중립지역에서 제법 잘 나가던 군벌이라던데.”
“그래?”
그 말을 듣고 잠시 의문을 표한 중년의 기사가 고개를 돌리자, 이제 막 집행자가 단두대 위로 올라온 남자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단두대에 올라온 남자는 뭔가를 말하고 싶었는지 웅얼거렸지만, 혀를 굴리기엔 입에 가득 욱여넣은 천 때문에 결국.
쩍.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도끼를 받아 머리가 분리되었다.
이제 중년의 기사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저놈 이름이 뭐랬더라? 즈…,”
“즈라칸, 중립지역 북쪽의 늑대라던데.”
“늑대라, 들개 새끼 주제에 지금까지 착각에 빠져 짖어댔구먼.”
* * *
길을 잘 들인 두꺼운 아마포 위에,
열두 구의 시신이 정갈한 모습으로 나란히 누워 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조용히,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걸친 갑옷엔 피와 화약의 잔흔을 급히 닦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제, 그가 나무를 자루 삼아 만들어진 긴 워 해머를 가슴에 댄 채 망자가 된 이들에게 고개 숙이자.
그 일대에 잠자코 서 있던 병사들 모두가 뒤따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장성한 나무의 가지들이 꺾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의 낮고 근엄한 말에 누군가는 슬피 흐느꼈고, 또 누군가는 턱이 갈라질 때까지 이를 씹으며 분을 참았다.
“어쩌면 웅대한 과실을 품었을지도 몰랐을 가지들아,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중년의 기사가 진심으로 넋을 기리자, 도열한 시신 양옆으로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조심스레 들고 있던 불을 내려 아마포를 태웠다.
지글지글.
굶주린 불씨가 아마포를 갉아먹고, 망자의 식어감마저 앗아갈 때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대부분은 그것을 등진 채 자리를 떠났다.
“베지어.”
뒤이어 멀찌감치 떨어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 하나가 망자들 앞에 나섰던 중년의 기사를 불러 세웠다.
“말린, 무슨 일인가?”
“수거 작업이 거의 끝났네.”
“그래…, 그럼 마무리 짓는 대로 자네가 병사들의 복귀를 책임져 주게나.”
“자네는?!”
“곧 남쪽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올 테니 검문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야겠지.”
“그럼 병사들을 복귀시킨 뒤 나도 바로 뒤따르겠네.”
덤덤하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은 이내 각자의 할 일을 위해 거침없이 움직였다.
베지어는 곧바로 자신의 종자와 함께 말을 몰아 근방에 있을 길목부터 차근차근 점검하기 시작했다.
종자의 안장에는 제법 긴 깃대가 달려 있었는데, 그 위로 작은 깃발이 펄럭였다.
“톰.”
길을 따라 주위를 훑던 베지어는 잠시 후, 뒤따르는 종자를 불렀다.
“네, 베지어님.”
“오늘 죽은 병사들 가운데 친하게 지냈던 자가 있었는가.”
“네, 작은 화원을 운영하던 자이크라는 청년입니다.”
종자의 대답을 들은 베지어는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직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혹독하기가 그지없구나.”
베지어는 숨겼던 착잡함을 표정으로 드러내었다.
“이 땅은 깃발을 하나로 묶을 기둥이 필요해.”
“하지만 기둥 되기를 자처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깃발의 표적이 되겠지요?”
“그래,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당장은 그런 명분을 노리는 아귀에 불과하니까.”
한참을 길 따라 이동하던 베지어는 이윽고 마주한 갈라지는 길 앞에 멈춰 말에서 내렸다.
눈에 파묻힌 이정표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중립지역의 이변으로 인한 부담을 우리가 안게 생겼으니, 병사들의 손실은 계속 이어지겠지…,”
탄식을 이어가던 베지어가 투박한 건틀릿으로 눈을 쓸어내리자, 숨었던 이정표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프로쿠아]
[시내미티]
갈라진 두 길의 행방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드러남과 동시에, 베지어는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굽 소리에 자연스레 귀 기울였다.
“톰…?”
“한 명인 것 같습니다.”
“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베지어는 안장에 걸어 놓았던 워 해머를 뽑아 들었다.
소탕한 군벌의 잔여 병력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개인이 중립지역을 이렇게 빨리 빠져나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얘기니까.
더군다나 프로쿠아와 시내미티는 모두 이렇다 할 벽이 존재하지 않는 영지다.
그렇기에 베지어는 다가오는 발굽 소리에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나.
“어…!”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고개는 반대편으로 멀어지는 발굽 소리를 향해 있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그의 눈가에 남아있는 건,
단지 흐릿한 잿빛의 흔적뿐.
이제 서둘러 말 위에 오른 베지어와 톰은 멀어져가는 발굽 소리를 쫓아 급히 박차를 가했다.
* * *
베지어와 톰이 의문의 말을 추격하길 한참.
어느새 쫓고 있던 발굽 소리는 멎어 있었다.
쫓아갈 수가 없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톰이 입김과 함께 말했다.
“혹시 우리가 본 것이 그 유명한 헬게와 마이어입니까?”
그의 입에 담긴 이름은,
기사들의 땅이라 불리는 아이베리아 내에서도 전설로 통하는 것이었다.
베지어로선 톰의 말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글쎄.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방금 본 그것을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포기 않고 계속해서 길을 따라 움직이던 베지어의 앞에.
숲 근처를 서성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온몸에 펄펄 끓는 김을 두른 잿빛 말이 있다!
“찾았다, 톰!”
베지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톰이 긴장한 표정으로 아밍 소드를 뽑아 들었다.
뒤이어 둘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의문의 남자를 향해 다가가…,
“어찌 그렇게 따라오십니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상대는 이미 베지어와 톰의 위치는 물론 지금 하는 행동에 내포되었을 생각마저 간파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베지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오, 이런 세상에.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청년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고개를 든 톰 역시 자기도 모르게 마주한 청년을 향해 슬쩍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할 뻔했다.
별 무리를 품은 남자가,
어스름을 뒤집어쓴 채 눈밭 한가운데 서 있다.
그 모습은 오묘하면서도 아름다워서, 투박한 인생을 살아온 베지어마저도 순간 그럴싸한 시 같은 감상을 남길 뻔했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린 베지어는 곧바로,
“톰, 무기를 내려라.”
자신이 들고 있던 워 해머를 바닥에 꽂아 놓고는 톰을 제지했다.
톰은 그 말에 군말 없이 따랐으며, 그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
“나는 프랑쿠아의 영주 베지어 리튼이다.”
베지어는 조심스레 본인을 소개했다.
그러나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중립지역에서 오는 길인 것 같은데, 맞는가?”
재차 이어지는 베지어의 질문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렇다기엔, 분탕을 칠 종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립지역에서 왔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시찰을 나온 거대한 깃발의 핏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그렇다면 중립지역의 어수선함은 그쪽이 더 잘 알 터이니, 우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래서, 어떻습니까?”
청년은 당당하게 물었다.
“저에게서 검문검색의 필요성을 느끼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베지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네.”
하지만 저 귀인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싶었던 베지어는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재차 이어갔다.
“어디로 가는가? 그리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면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니라.”
청년은 자신의 말을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이 말입니다. 저는 그저 고삐를 잡을 뿐이죠.”
“혹, 쉬어갈 곳이 필요하다면 내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여유가 있다면 프랑쿠아로 오게.”
“친절하시군요.”
“이곳은 중립지역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은화의 무게도 줄일 겸, 찾아가겠습니다.”
“좋네, 이 길을 따라 쭉 이동하다가 왼쪽 길을 골라 달리다 보면 마을 하나를 마주하게 될 걸세. 그곳이 프랑쿠아지.”
“그럼, 이만.”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쓰고 있던 어스름을 빠르게 식어가는 말에게 덮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고, 본인은 눈의 촉촉함을 거부하는 낙엽들만을 골라 능숙하게 불을 피운다.
모르겠어.
베지어는 지금 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아리송하다.
황야에 핀 화초를 본 기분이랄까.
중립지역에서 건너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온화한 성품을 가졌구나.
그런데,
그 온화함 속엔 헤아릴 엄두조차 나질 않는 깊은 골이 있다.
온화함에 이끌리다 발을 헛디뎌 그의 골에 빠지게 되면, 그때부턴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두 발 걷는 자라면,
필시 그를 인간으로서 흠모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 * *
중립지역과는 사뭇 다르다.
해서 그 다름에 적응하려면.
그러한 다른 점을 직접 겪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을 것이다.
“벤투스, 아무래도 지금이 고삐를 살짝 돌릴 때인 것 같은데.”
내 말에 벤투스가 콧김을 내밀며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사실 내심 설렜다.
지금까지 이 새로운 땅에서 본 것이라곤 새하얗게 칠해진 풍경들뿐이었는데,
방금 다른 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마주했으니 어쩌면 이 설렘은 당연한 걸지도.
기사와 종자가 떠나고, 한참 뒤 모닥불이 추위에 벌벌 떨어 그 기세가 점점 죽어가던 때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목에 걸린 펜던트를 꼭 쥐었다.
맥레인,
이제 나는 당신이 살아가던 세상을 배우려 합니다.
벤투스에 덮인 어스름을 거둬 두르고, 안장 위에 올라타 고삐를 잡는다.
프랑쿠아에서 마이스터와 관련된 기록을 훑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뿐이 아니라,
이 땅의 정취를 있는 힘껏 받아들이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
그리고 프랑쿠아를 떠난 직후엔,
조금은 헤아려 봐야겠어.
내게 주어진 이 낡은 아밍소드가 품고 있는.
0의 넓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