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눈, 겨울 (2)
북쪽 땅은 중립지역관 달리 정적이고 심적으로 느끼기에 척박했다.
다만 자신의 공동체 외에 다른 모든 이들을 경계하던 중립지역 마을과는 달리, 북쪽 땅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마을의 모습은 앞서 느꼈던 인상과는 판이했다.
[프랑쿠아]
삐걱삐걱, 눈바람에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팻말을 이제 막 지나친 나는 벤투스의 목을 쓰다듬으며 속도를 늦췄다.
이미 한바탕 갈퀴 질을 했는지 마을 입구부터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을뿐더러, 주위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목책이 듬성듬성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거주민들은 중립지역과 같은 염세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의 공동체는 외세에 대항하여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마침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가장 먼저 곳곳에 걸린 깃발이 눈에 띄었다.
그 깃발은,
지금껏 내가 길게 설명한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함축해주었다.
마을 곳곳엔 마치 먼 곳에서 방금 복귀한 듯 보이는 여러 남자가 한곳에 모여 장비를 손질하고 있었다.
개중엔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이도 보였다.
그런 그들 지척에 다다랐을 때,
그중 한 사람이 날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외부인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뛰어나와 그를 가로막아 섰다.
저 사람은 분명, 기사 베지어를 따르던 종자였었지.
“영주님께서 친히 마을에 초대한 분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가오던 남자는 군말 없이 내게 짧게 인사하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차가운 겨울임에도 뭐가 그리 뜨거운 것인지, 상의를 벗은 채 장비 손질에 열중하는 장정들을 보니.
과연 마을 외곽의 허술한 목책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네.
“그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종자 톰은 부랴부랴 끌고 온 말에 올라타 내게 친절히 말해주었다.
그렇게 그를 바짝 따라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큰길을 따라 오르니 몇몇 마을 사람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대부분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 놀이에 심취한 어린아이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톰이 지나갈 때마다 다가와 살갑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고,
그러다 어떤 아이는 버릇처럼 뒤따르던 내게도 살갑게 인사를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뒤집어쓴 어스름을 고쳐 잡고 화답했다.
이내 길 끝에 도달하자 방책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저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따지자면 외견상으론 저택보다 성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인기척에 저택 안에서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말 고삐를 받아 준 터라 곧바로 말에서 내릴 수 있었던 나는 이어지는 톰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부로 향할 수 있었다.
“발드렝, 영주님이 직접 초대한 손님이 왔으니 오월의 햇살로 부탁드립니다.”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톰이 예의를 갖춰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노신사에게 부탁하자,
멀끔한 검은색 더블릿을 입은 노인은 곧바로 벨트 주머니에 끼워져 있던 유리병 하나를 꺼내곤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에 저택 안쪽에서 달려 나온 여인 하나가 조심스레 노인이 건넨 유리병을 받든 채 사라졌고.
잠시 후, 저택 내부에 쨍한 햇살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후끈한 온기를 느낀 나는 곧바로 쓰고 있던 어스름을 벗었고,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익숙한 모습으로 한쪽 팔을 접은 채 내게 고개 숙였다.
“외투는 제게 맡겨주시지요.”
그 친절에 살짝 고개 숙여 답한 나는 어스름을 건네곤 톰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도중에 손님인 나를 구경하려고 모인 것인지, 삼삼오오 모인 여인들이 계단 아래서 나를 힐끗거린다.
새들의 지저귐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프랑쿠아에 머무시는 동안 이 방을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톰은 2층 복도에 나열된 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 열었다.
방 안에는 빈 상자와 천을 켜켜이 쌓아놓아 만든 간이침대만이 놓여 있었다.
움막 안에서 잠들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이 정도 되는 깔끔함과 아늑함이라면 곧 맞이하게 될 밤잠은 얼마나 달콤할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은 이방인 대부분에게 관대하진 않지만, 이따금 몇몇 이방인들을 환대하시기도 합니다.”
“제가 그 몇몇 이방인에 속하다니 다행이군요.”
“영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시거든요,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녁에 있을 만찬에 영주님의 말벗이라도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제게 주신 호의를 생각한다면 안 될 것이야 없죠, 기별을 주시면 맞춰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톰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톰이라는 저 사람.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다.
검에 일가견이 있는 실력자란 걸.
* * *
문밖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몇 무리 사람이 후다닥 복도를 긁으며 도망쳤다.
그리곤 여지없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슬 마을 밖을 나서서 길어질 여정에 대해 대비를 해야겠어.
아래로 내려가니 늘 저택 입구 쪽에 상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아, 내려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어스름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과연 영주님이 초대하신 분이라서 그런지, 이런 옷감의 외투는 처음입니다. 마치 그림자를 그대로 들떠 만든 것 같군요.”
매튜 아저씨처럼,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노인의 모습을 보니, 괜히 내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옷감이 아니라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것의 가죽입니다.”
“세상에, 그렇습니까?”
매튜 아저씨의 모험담을 들었을 때 내가 지었던 표정처럼.
이번엔 내 모험담에 노인의 눈이 반짝인다.
뭔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노인은 반대로 나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걸 인지하곤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
“이 노인의 늙은 덩굴이 귀한 손님의 발목을 잡고 있었군요.”
서로의 배려로 인해 상충을 맞이하는 느낌보다 더 어색한 게 있을까.
나와 노인은 서로 멋쩍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곳에서 책을 비롯해 여러 물건을 구하려 하는데, 대략적인 위치를 안내받을 수 있을까요?”
“이곳 프랑쿠아는 마땅히 가게라고 불릴 만한 곳은 없지만, 주민 대부분은 항상 사고팔 것이 하나쯤은 있지요. 그중에서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단연 아마포입니다. 프랑쿠아의 아마포는 방금 나부낀 바람의 모양마저 알려 줄 정도로 그 하늘거림이 조각구름의 유순함에 버금갈 정도랍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노인의 설명에 이번엔 내 눈이 반짝였다.
비록 능숙하진 않지만,
중립지역에 있었을 때 안나 아주머니의 일을 도우며 바느질을 배웠었는데.
옷의 안감으로 기워 입으면 활동하기 편하겠어.
“그렇다면…,”
내 망설임 섞은 말에 노인이 아차 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따스한 불이 켜져 있는 집 문을 두들겨 보십시오.”
* * *
똑똑.
슬며시 문을 두들기면,
한 부녀가 빼꼼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혹, 이곳에 읽을만한 책거리가 있을지요.”
그러면 여인은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젓고.
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품 안에 있던 책을 내놓는다.
[바구르의 용들.]
이미 그 책의 주인공을 여러 번 역임한 듯한 아이의 눈빛에 나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여인은 그런 아이에게 이건 동화책이라며 애정 어린 핀잔을 보냈다.
그렇게 다섯 집을 차례로 방문하고 나서야, 단 안경을 쓰고 있는 한 중년의 남성을 통해 그의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 수집가인 그는 책을 팔진 않지만, 이곳에서 읽을 시간을 팔 용의는 있다고 했다.
해서 물었다.
“마이스터와 관련된 책이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책 수집가에 걸맞은 자신감으로 즉답했다.
“선생들에 관한 책이라면 많지요, 다 꺼내 드립니까?”
“가장 기초적인 것이 담긴 책이라면 좋겠군요.”
“3초면 됩니다.”
자부심이 태양보다 쨍하네.
물론…,
우당탕.
책장을 헤집으며 수십 초가 지난 뒤에야 만신창이인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그가 내게 건네준 책의 이름은.
[현자의 아이들]
표지를 보자마자 몰입한 내 표정을 보았을까.
얼굴 곳곳에 검댕을 묻힌 남자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내 옆에 호롱불 하나를 놓고 사라졌다.
그럼,
네가 품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좀 볼까.
그들은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린 현자의 제자들.
아니, 제자이기를 스스로 자처한 자들이다.
현자의 지식을 흠모하며, 현자가 강조한 균형을 위해 활동한 그들에게 세상은 현자의 아이들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런 그들을 통해 배출된 인물과 신묘한 물건들로 수많은 땅에 균형이 잡히자,
이제 세상은 그들을 향해 선생이라 불렀다.
물론 그들 모두가 올곧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뒤틀린 사상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고, 돈이 좋아 난쟁이에 빙의한 듯 가진 지식으로 물건을 찍어 내는 선생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용의 시대 이후 가운데 마법사와 같은 위상을 발휘하는 자들이어서,
인챈트를 가진 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명분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이스터는 그 위상에 걸맞은 이름이 필요하다고 느낀 리시론 제국이 지은 이름이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본래 이름처럼 정착되었다.
세상 전반의 대부분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고 알려진 그들에게,
지금도 기사는 깃발의 기둥을 고강하게 만들기 위해.
인챈트를 갖게 된 자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상인은 이득을 돌려줄 복잡한 수적 계산을 깨닫기 위해.
망치를 든 자는 완벽한 만듦새를 위해.
그들을 찾고자 헤매고, 또 가르침 받기를 고대하고 있다.
가르침의 영역을 가늠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말 그대로 선생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존재란 말인가?
마이스터라 불리는 자들은!
더 궁금해졌어.
맥레인은 마이스터에게 정확히 어떤 분야의 가르침을 받았을까.
* * *
베지어는 기사 둘과 함께 지역 순찰을 끝마치고 자신의 영지로 복귀했다.
방금까지 격전을 통해 승전을 울린 전사들이었던 마을 주민들은 그런 그를 향해 존경을 담은 경례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곧 저택에 들어선 베지어는 하인에게 고삐를 건넨 뒤 둔중한 몸을 내렸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뒤이어 마중 나온 노인의 물음에 베지어는 인중을 덮은 수염을 씰룩이며 답했다.
“세넬, 그건 언제나 내가 물어야 할 말이지. 영지 내엔 별일 없었는가? 들개무리를 박멸했다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던 터라 몇 마리 놓치진 않았을까 걱정이야.”
“영주님께서 키우신 이 땅이 그깟 들개 몇 마리에 벌벌 떨겠습니까, 무두장이 베르쉘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도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하, 그 아이가 프랑쿠아의 새벽 하나를 와장창 깨트렸었는데. 얼른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단 말이지.”
투구를 옆에 끼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톰이 그의 앞에 다가와 고개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톰.”
“일전에 마주쳤던 이방인이 약속대로 이곳에 와주었습니다.”
“그런가, 내 요청을 받아주니 고맙구먼.”
이제 톰은 능숙하게 베지어의 뒤에 서서 플레이트 아머에 결속된 매듭을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이번 갑옷 손질은 내 직접 할 테니 건들지 마라.”
“알겠습니다.”
플레이트 아머를 벗자 이번엔 그의 전신을 뒤덮은 체인 메일이 드러났다.
베지어는 허리를 숙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흔들었고, 그런 그의 옆에서 톰은 한참을 낑낑거리며 체인 메일을 벗겨야만 했다.
“난쟁이제 갑옷이 좋긴 한데, 벗으려고만 하면 이렇게 드세게 반항을 하니.”
갑옷을 벗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베지어의 투덜거림에 톰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성능이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프랑쿠아를 비롯한 주변 영지에 이방인들이 섣불리 침범하지 못하는 것도 난쟁이제 갑옷을 두른 열두 기사 덕입니다.”
“난 이제 늙었어, 톰. 내가 얼른 죽기라도 해야 네가 내 갑옷을 입을 텐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 베지어님이 온전히 땅에 묻힐 때까지 보좌할 생각이니까요.”
“짓궂은 놈 같으니…, 이 늙은이는 수많은 젊은이의 죽음을 충분히 봤어.”
“그냥 죽은 게 아닙니다, 베지어님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각오한 것일 뿐이지요.”
“씨발, 그들은 죄가 없는데.”
“베지어님, 너무 입이 거치십니다.”
톰의 꾸짖음에 베지어는 막 하인이 가져다준 술잔을 기울이곤 태연히 되물었다.
“참, 이방인은 어떠한가 톰. 눈여겨보았겠지?”
그 말에 톰은,
“예사 인물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금방이라도 떨어진 별처럼 생긴 사람은 처음 봅니다 정말. 벌써 저택 내 여공들 대다수가 그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을 지경이니까요.”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의 내실은 어떠한 것 같나?”
이어지는 베지어의 물음에,
톰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흐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걸음걸이는 분명 전사의 것이기는 한 것 같은데…, 저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영주님, 그는 진정 귀인의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