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눈, 겨울 (3)
저택에 만연했던 오월의 햇살이 희미해져 갈 때쯤.
곳곳에 놓인 벽난로에 막 불을 놓은 듯, 여기저기서 자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은 새하얗던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었지만,
이내 뿌옇게 달아오른 유리 탓에 희미해져 보일 뿐이다.
나는 자연스레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한 물건들을 침대 위에 늘여놓고 차근차근 정돈해나갔다.
낡은 아밍소드를 축일 기름도 샀고 신은 가죽 장화의 겉면을 보강해 줄 보호제도 구했어.
또 혹시 모를 위험과의 조우를 대비해서 괴물 도감까지 마련했으니 길어질 여정에 제법 그럴싸한 초석을 다졌다고 볼 수 있겠지.
생각해 보니 이 물건들 모두 가족들이 내게 아낌없이 주었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네.
덕분에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제 이 땅을 배우는 것은 오롯이 내 몫에 달려 있다는 걸.
그리고 벌써 이 땅에 대해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
이곳, 아이베리아의 눈과 겨울은 중립지역의 낙엽과 가을보다 따듯하다는 걸.
그 따듯함이라는 게 단지 이방인인 나를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한 깃발로 말미암아 저들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자신감이 이곳의 겨울을 무색하게 만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대표적인 예로,
이 마을 구성원들은 모두 이곳의 영주인 베지어에게 유감없는 존경을 표하고 있다.
또 마을 곳곳에 펄럭이는 깃발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확실히 중립지역과는 달라.
하나의 결속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의식을 발휘하는 공동체라니.
심지어 그것이 재물이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베지어라는 인물이라서, 그가 휘날리는 깃발 때문에.
그래서 더 파악해보고 싶어.
그 결속의 본질적인 기원이 무엇인지 말이야.
그럼,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기를 각오할 만큼 지키려 했던, 맥레인의 그 맹세의 본질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지도.
똑똑.
한참 골똘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가, 문 두들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목을 가다듬어 답했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그러자 열린 문 너머로 더블릿을 차려입은 멀끔한 모습의 톰이 걸어들어왔다.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자리에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곧 내려가겠습니다.”
내 말에 톰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제야 그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보는 것 같네,
주홍빛이 감도는 짧은 머리, 코와 광대에 흩뿌려진 주근깨.
생김새는 확연히 다르지만, 전체적인 인상으로부터 느껴지는 색감은 마치 촙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본연부터가 다정하고 익살스러웠던 촙과는 달리 톰은 그러한 모습 속에 철저하게 본의를 숨긴 채 쉬이 드러내지 않는 자다.
다행이라면 적어도 내게 적의가 없다는 것 정도.
짐을 모두 정리한 나는 곧바로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렇게 마주한 거대한 홀엔 제법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는데, 대략 스무 명 남짓한 장정들이었다.
서로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부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벌써 술에 절어 식탁 위에 고개를 처박은 자도 있다.
곧 식탁의 가장 상석에 앉은 베지어가 날 발견하곤 반색했다.
“이쪽에 앉으시게.”
그의 말을 듣고 따르면서도,
도중에 눈에 담아볼 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베지어의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깃발 문양이 박힌 히트 실드다.
다리미를 닮은 특유의 모양을 한 그 방패는 딱 보아도 오래된 물건이었지만, 그렇기에 그 고풍스럽기가 더더욱 대단했다.
“내 선조의 물건이라네, 그 옛날 가릉비드 평야에서 벌어졌던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해낸 역사의 증표이기도 하고.”
내 휘둥그레진 얼굴을 보았을까,
베지어는 활짝 웃으며 벽에 걸린 히트 실드를 가리켜 자랑스럽게 알려 주었다.
“리튼 가문은 유서가 굉장히 깊군요.”
“그야 자랑할 만큼 깊지! 이 프랑쿠아를 아마포의 특산지로 탈바꿈시킨 것도 리튼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걸세.”
설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그가 안내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베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통을 그대로 축소한 듯한 모양의 술잔으로 식탁을 두 번 내리쳤다.
탕탕!
장내에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자, 이곳에 모인 장정들 모두가 대번에 침묵을 지킨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부르는 자들도,
술에 절어 식탁 위에 고개를 처박았던 자도 어느새 벌떡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감은 자들의 몫까지 마시고 노래하라! 그들의 먹먹해져 있을 귓전을 밤새도록 시원하게 때려보자!”
베지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거나한 함성을 질렀다.
슬프고, 통쾌하게.
난 이방인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땅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술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세공소에 있었을 적에 이런 자리에 지켜야 할 예절 같은 건 일찍이 빠삭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떠했소, 이 땅은? 부족한 걸 모두 만족할 만큼 충족시켰소?”
“충분히요.”
“그거 다행이구먼!”
베지어는 쾌활하게 웃으며 탄력적인 거품이 잔뜩 올라온 맥주잔을 거침없이 기울였다.
그리고는 자랑스러움이 만연한 미소로 내게 여러 가지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저자가 이 프랑쿠아 영지를 수호하는 세 기사 중 하나인 마고르.”
손가락을 가린 곳엔 소매를 걷어붙인 채 무심하게 맥주를 때려 박고 있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있었다.
“그 옆이 가르긴.”
그런 사내 옆에 붙어 있는 뱃살이 튀어나온 중년의 남자는 양손에 닭 다리를 들고 번갈아 뜯고 있다.
“저 뒤에서 홀로 애무하듯 피리 불고 있는 자가 파딜이지.”
음, 마지막으로 가리킨 사내는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까,
피리를 불어야지 왜 혀로…,
베지어 역시 마지막 사내를 가리키곤 곧바로 헛기침하며 내 시선을 분산시켰다.
“베지어님에게 있어 저들은 가족과도 같겠군요.”
내 물음에 베지어는 잔에 담긴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킨 뒤 시원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가족이라…, 그래. 가족이지.”
* *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끌벅적했던 만찬장도 서서히 소강에 접어들었다.
장정들은 기사고 할 것 없이 대다수가 그대로 식탁 위에 뻗어 잠들었고, 저택을 관리하는 가신들 몇만이 조용히 어질러진 자리를 정리했다.
그 가운데,
나는 베지어와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그가 말한 가족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그 본질이 무법자들로 구성된 가족은 허황한 꿈을 좇아 연속된 무모함을 저지르는 것과 같이.
깃발을 주축으로 모인 가족의 꿈은 한없이 소박한 것이었다.
그 소박한 꿈이라는 건,
깃발을 중심으로 모여든 자들의 안위.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안위를 책임지며 소박한 꿈을 향해 달려나가면,
어느새 그 앞에 대의가 기다리고 있다.
‘소박하기에 대의까지 번지게 되는 것이다.’
베지어가 진득한 취중 속에 내놓은 그 한 마디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내.
맴도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맥레인.
당신이 나를 통해 소박한 꿈을 꿨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연히 대의로 번지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 이 만찬도 막바지에 다다름을 직감했을 때에.
베지어는 꼭꼭 참아왔던 본심을 내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대의 이름을 모르는구먼.”
“디안, 디안 베나즈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베지어는 주름이 깊이 박힌 눈가를 활짝 피며 웃었다.
“그런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해서, 디안.”
베지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솔직히 처음 그대와 마주쳤을 땐 덜컥 욕심부터 났지.”
욕심?
“오랜 세월 자루를 잡다 보면 자루를 가진 자를 보는 눈도 자연히 떠지기 마련이네. 특히 자네와 같이 출중한 자들은 더더욱 내 눈에 띌 수밖에 없어.”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겁니까?”
“처음은 자네를 어떻게 해서든 등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물론 그 생각이 지금도 아예 없지는 않아.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는 중일세.”
베지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푸념하듯 말을 이어갔다.
“저 벽에 걸린 히트 실드로 말미암아 내 선조는 에즈워트 황가에 의해 기사로 서임 받을 수 있게 되었지. 그런데 그 에즈워트 황가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변방에 흩어진 봉토는 강제로 독립을 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기둥을 잃은 깃발이 되었다는 소리겠지.
“다행스럽게도 중립지역과 맞닿은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네. 또 중립지역에서 흘러들어오는 잔챙이들의 처리 비용까지 우리에게 떠넘길 수 있었으니 구태여 건들 필요가 없는 거야.”
베지어는 빈 술잔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선조께서 이 땅을 고집한 그 소박한 결정 덕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있는 거겠지.”
그러나 그는 다시금 맹수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대의로서 천천히 커갈 생각이네. 우리의 깃발이 자체적으로 기둥이 되길 희망하네. 그래서 그대와 같은 인재가 더욱이 절실한 것이고.”
베지어는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 속에서도 날 헤아리려는 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정말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그 대의에 닿기를 바랍니다, 베지어.”
“고맙네.”
“그리고 예상하신 것처럼, 저는 곧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잘 알고 있네, 하나.”
베지어가 짙은 갈색 눈썹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떠나기 전,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 * *
이른 아침.
나는 베지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택의 넓은 앞마당으로 나와 미리 준비된 연습용 롱소드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런 내 맞은편엔,
훨씬 일찍부터 그 자리서 기다린 것으로 보이는 톰이 서 있었다.
“전후 사정은 모두 베지어님께 들었습니다.”
톰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운을 뗐다.
나는 그런 그에게,
잡은 검을 겨눈 채 말했다.
“해서, 결심하셨습니까?”
이에 톰은 각오를 다진 듯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대항해 자세를 잡았다.
“깃발의 결정 앞에 저는 그저 각오를 다질 뿐입니다.”
베지어의 말대로.
한없이 충성스러운 자다.
저 익살스러운 얼굴 뒤편엔,
깃발을 향한 진심 어린 충성이 숨어 있었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해서 여지를 두지 않고 휘두를 겁니다.”
톰의 자세로 보아하니 그가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모두 보인다.
그렇기에 곧바로 실력의 편차를 파악할 수 있었던 나는 그에게 단언하듯 경고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톰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내게 달려든다.
반,
아니, 반의반에 해당하는 속도를 상정해서 맞받아치길 작심한 나는 최대한 그의 빈틈만을 노리는 움직임으로.
카각!
큰 동작을 위시해 그가 오감으로 자신의 빈틈을 체감할 수 있도록 휘둘러 쳤다.
순식간에 어깨와 옆구리, 무릎과 정강이에 타격을 입은 톰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시간이 다 가지 않았습니다, 톰.”
맞대보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을까.
톰은 마치 과거 맥레인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내 모습을 연상시키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부탁드립니다.”
몇 번이고 내게 달려들었다.
베지어는,
깃발로 묶인 가족, 톰을 내게 부탁했다.
그에게 성장의 단서를 제공해 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수십 번의 합이 끝나고 보니 그의 온몸은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 단서의 방향을 쟁취한 듯 보였다.
* * *
베지어, 톰.
그리고 그 휘하의 기사와 주민들.
내게 동화책을 내밀었던 씩씩한 소녀까지.
이방인이 떠나가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모두 마중 나와 있다.
떠나기 전,
베지어는 말에 올라탄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만나세, 자네하고는 다음에 꼭 다시 마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런 그에게 나는 거리낌 없이 화답했다.
“눈과 겨울 중에 따스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이내 나는 박차를 가했다.
충분한 휴식을 만끽했던 벤투스는 고작 스무 걸음 만에 최고속에 도달해 프랑쿠아를 빠져나갔다.
다시 새하얀 세상의 품으로 빠져든 나는,
곧바로 벤투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 목적지는,
마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