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15화 (115/365)

115화. 멀어짐과 마주함

조용히 신경을 가다듬고.

갈라진 검집이 물고 있던 낡은 아밍소드를 뽑는다.

이내 손목에서 느껴지는 둔탁함과 동시에 전체적으로 정돈되지 못한 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본디 셀레어였다면 지금쯤.

몸 안쪽에서부터 발현된 변화를 느끼고 있었을 텐데.

이를테면 신체 내부에서 용솟음치기 시작하는 기류와,

이윽고 그것을 내 의지에 따라 마음껏 검에 실어 표출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 말이야.

그런데 이 검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자루에 깃들어 있을 인챈트에선 그런 것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어쩌면 내 몸이 감당하기엔 아직,

이 검이 품고 있는 인챈트가 한없이 거대하단 뜻일까.

손목을 돌려 쥐고 있는 검을 두어 바퀴 회전시킨 나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어 대번에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숨을 가득 들이마셔,

단단히 부풀어 오른 신체의 탄력을 이용해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러 쳤다.

팍!

무딘 날에 으깨진 바람이 뒤늦게 따라오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힌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은 그 덕에 대번에 비산하듯 사방으로 튀어 올라 진눈깨비를 만들었다.

급작스러운 행동에 고조된 심장이 고막을 두들기니, 그 기세를 이어가 본격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검을 휘두르다가.

끝내 마지막 휘두름과 동시에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퍼질러지듯 드러누웠다.

혹 검을 휘두르다 보면 변화의 단서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연하게 피어오른 허무함을 토로하듯 속마음으로 작게 되뇌어 볼 뿐이다.

멀다, 멀어.

아직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있구나.

더그덕.

눈에 파묻혀 가만히 있길 몇 분, 인근에 자유롭게 풀어두었던 벤투스의 발굽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푸흥!

언제 왔는지 내 눈앞에 들이닥친 축축하고 거대한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푸악!”

키히힝!

내 아직 짐승의 언어를 익히진 못했지만, 저 울음소리만큼은 지금도 알아들을 수 있다.

저건 아주 크게 웃은 거야.

“벤투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얼굴에 묻은 벤투스의 콧물을 닦기 위해 눈 한 줌 집어 얼굴에 비빈다.

악, 바늘로 면전을 두들기는 것처럼 따끔거려!

결국엔 조이가 챙겨 주었던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내용물 대부분을 얼굴에 끼얹어야 했다.

이어서 눈을 퍼다가 수통 안에 꾹꾹 눌러 담는데 열중하던 나는,

문득 방금까지 절절히 느꼈던 허무함이 휘발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피식 웃으며 벤투스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걸음마도 떼지 못했는데 뛰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그렇지 벤투스?”

푸념하듯 녀석에게 말하는데,

벤투스는 얼른 가자는 듯 이미 내게서 등을 돌린 후였다.

* * *

한참 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아주 신비한 광경 하나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예전에,

빈센 다르마야를 연기했었을 적에 어렴풋이 보았던 연금술사 무리를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휘날리는 눈발 아래에 여러 모양을 한 유리병을 나열해 놓고 그 안에 펄펄 끓는 무언가를 옮겨 담길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를 이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 행위로 말미암아 단편적인 기상을 채취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채취한 저 차가운 바람 줄기 가운데 하나는 분명,

비질라가 좋아했던 구름 사탕을 위해 팔려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난 연금술사 무리를 지나쳐 눈 덮인 풍경 속에서도, 꿋꿋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고고한 나무가 보이는 언덕을 넘자,

그 이후부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니까.

외로이 나 있는 길 중간에 웬 바퀴를 매단 나무 기둥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까이 가서 보니…,

바큇살마다 묶인 밧줄 아래 네 구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아직 피부 대부분이 변색 되지 않은,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듯 보이는 그 시체들은 각각 한군데 이상씩 날붙이 따위로 인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흔들흔들.

나부끼는 바람에 시체의 다리가 휘청인다.

그 다리 사이,

나무 기둥에 적힌 글귀를 발견한 나는 고개를 좀 더 내밀어 그것을 유심히 살피려 했으나.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전혀 인지하지 못했어.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순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반쯤 파묻힌 모양새로 앉아 있던 장정 하나가 고개를 들어 존재감을 과시했다.

전신을 뒤덮은 플레이트 메일.

그리고 안면 가리개의 코 부분이 뾰족한 저 투구는 분명…,

책에서 적혀있기를 배서닛 헬름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안면 가리개로 철저히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마치 석상처럼 땅에 앉아 있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게 좋을 거야.”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한 사내에게 묘한 위압감을 느낀 나는 고삐를 당겨 벤투스를 뒷걸음질 치게 했다.

그러자 그는 마치 감상평을 전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말이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라비온의 기사, 켈론.”

“그럼 저들은…?”

슬쩍, 목 매달린 시체 쪽으로 눈길을 주며 묻자 그는 덤덤하면서도 순순히 내게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저 망자들과 연관성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듯이 말이다.

“이제는 망자가 되어버린 아길레드 가문의 남자들이지.”

“사연이 깊은 것 같군요.”

“그래, 아주 깊지. 하지만 이제 해결되었으니 괜찮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결투를 신청했고…, 결과는 보다시피.”

혼자서 넷을 쓰러트린 건가.

이 땅을 아직 모두 다 가늠해보진 못했지만,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도 같군.

“그런데 어찌 이 자리를 계속 지키시는 겁니까.”

“결투의 결과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

이윽고 켈론이라 칭한 남자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키를 가진 그에게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에 파묻혀 있었을 땐 마치 난쟁이처럼 작아 보였으니까.

“자네가 지금 막 이 거리를 지나치는 열 번째 사람이야. 그 말은 내가 원했던 숫자가 충족되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이죠?”

“상인 둘, 벌목장이 셋, 사냥꾼 하나, 바란의 병사 셋, 그리고 이방인인 당신까지. 이 정도면 제법 소문이 넓게 퍼지지 않겠어?”

이 자리를 오랫동안 지킨 건, 결투의 결과를 타인을 통해 만천하에 퍼트리기 위해서였나.

켈론이라 칭한 남자는,

“뭐, 자네는 퍼지게 될 소문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 보이지만…,”

투구 속에 가려져 있을 두 눈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뒤돌아 조용히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다다른 길 끝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교각이었다.

오래전, 이 자리에 얼마나 대단한 다리가 놓여 있었길래.

남아 있는 교각들은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식된 상태였지만 그마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리고 그런 교각 아래엔,

마찬가지로 매우 오래된 배들의 잔해가 서로 뒤엉킨 상태로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그 잔해 사이사이에 수 놓인 창문들에선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을뿐더러,

두 발 걷는 자들이 잔해 위를 거닐고 있는 모습까지 보였다.

해서 좀 더 전체적인 시선으로 배들의 잔해를 낱낱이 살펴보자, 그것들 모두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요새나 건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자, 벤투스.”

고삐를 잡아 더 근접하자 슬슬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프랑쿠아와 마찬가지로,

곳곳에 깃발이 달린 걸 보아하니 이곳 역시 누군가의 관리하에 놓인 영지였던 것이로군.

다만 영지의 모양새가 내 상상을 아득히 넘어섰을 뿐.

이곳에 만연한 분위기는 이 땅과는 어울리지 않는 제법 자유로운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러니까 그 성격이 중립지역에 가까운, 그런 곳인 것 같아.

배의 잔해들로 만든 간판들은 하나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돋우는 것들뿐이었다.

[멈추지 않는 키]

[좌초된 모루]

[두 발 걷는 인어들]

[비상하는 신호기]

멈추지 않는 키는 말 그대로 방향을 잃을 정도로 술을 퍼마시는 주점처럼 보였고,

좌초된 모루는 난쟁이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었으며.

두 발 걷는 인어들은 간판 아래 놓인 거리 전체가 홍등가다.

그리고 비상하는 신호기는…,

여러 신문을 취급하는 곳인가.

군데군데 굽이지듯 꺾인 갑판 오르막을 올라가 선수로 보이는 배의 파편 끄트머리에 마련된 비상하는 신호기에 도달한 나는,

근처에 벤투스를 묶고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내게, 근처 벽에 기댄 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들었어? 아길레드 가문이 아주 박살이 나버렸다던데.”

“당연히 들었지 이 사람아!”

“아니 그런데 아길레드 가문이면 가주는 물론이고 장남에 차남까지 인챈트를 가지고 있다 들었는데 그렇게 쉽게 몰락한단 말인가?!”

“그래봤자 라비온의 켈론이 직접 나선 이상 소용없는 얘기지,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하나라 불리는 작자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자를 이기려면 기사 오십은 끌고 와야 할걸?”

대화 속 처음 듣는 단어들의 향연에 나도 모르게 귀 끝이 연신 쫑긋거렸다.

예사 인물은 아닐 것 같다곤 생각했는데.

저들의 대화 속에 섞인 유난을 보면 역시 라비온의 켈론이란 남자는 예상한 대로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그나저나,

이미 만연한 듯한 소문을 보니 켈론, 그가 원하던 대로 소문이 일대에 퍼질 대로 퍼진 것 같네.

이내 매대에 도달하자 안에 있던 노인이 인기척을 느끼곤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날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요즘 저 아래 남쪽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읽을 소식이 한가득 입니다!”

“그럼 남쪽에 관련된 신문 하나 부탁드립니다.”

“예예! 은화 두 개입니다!”

값을 치르고 노인이 건네는 신문을 받아든 나는,

신문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글씨보다.

당장 아래에 작게 쓰인 글귀에 눈이 갔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비어 있는 손으로 목에 걸린 펜던트를 쥐었다.

[중립지역 최악의 무법자 집단인 시몬 바스티유 토벌 성공!]

중립지역에 있었던 모든 일이,

마치 이 한 줄에 함축되어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픔도 결국 소중한 몇몇 가족들에만 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맥레인, 당신의 이야기는 나로서 계속 이어지게 될 거예요.

나는 다음 장을 넘겨 이제는 서서히 사라져 갈,

중립지역에 대한 애증을 느끼며 그와 관련된 소식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라이튼 제국이 티바르 제국과의 1,2차 전면전에서 대승]

[티바르, 제국 내 최강의 벼락을 전선에 불러들일 것인가!]

[에브르의 변경백 에지스 베이선의 장남인 몽투르 베이선이 중립지역에서 라이튼 제국에게 붙잡혀.]

[라이튼 제국은 에브르의 변경백에게 장남의 생환에 대한 배상금으로 금화 430만 개를 요구.]

신문에 빈틈없이 기재된 글귀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그 격함이 감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치열하구나.

그리고 쉬이 꺼지지 않겠구나.

중립지역에 피어오른 불꽃은.

* * *

오래된 배들의 무덤을 지나,

거대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숲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 벤투스는 거침없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따금 이끼의 냄새를 맡으며,

어두운 그림자에 채 증발하지 못하고 체류한 이슬의 채취를 따라.

아슬아슬한 바위 더미 위로 발굽을 대고 올라가는 벤투스가 혹여나 넘어지지 않을까.

뒤에서 녀석의 엉덩이를 받치고 올라가기도 하고,

반대로 미끄러진 내게서 어스름을 베어 물어 낚아챈 벤투스가 끌어당기기도 하며.

숲이 숨겨놓은 비경과도 같은 길에 끝끝내 들어섰을 때쯤.

이미 하루가 훅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맞이하는 오늘의 햇빛 사이로,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흔적만 간신히 남은 성채와,

그 안에 갈무리하여 쌓아 올린 듯한 집.

그곳에서, 내 길잡이인 벤투스가 드디어 우뚝 멈춰 섰다.

이에 맞추어.

집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누가 영악하고 그리운 나침반을 들고 찾아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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