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16화 (116/365)

116화. 마이스터

희끗희끗한 검은 머리는 기름을 발라 정돈했고,

자글자글한 주름 속을 뚫고 나온 광대는 윤택했으며,

수염을 밀어 드러난 말끔한 턱은 각지고 넓었다.

그러한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봄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부드러움과 같았다.

그러나 낮게 깔린 짙은 회색 눈썹 아래,

깎아지르듯 쏙 들어간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이지적인 면모가 돋보였고, 그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선 차가운 통찰이 흘러나와.

얼굴 안쪽에 깃든 느낌은 지금의 날씨를 닮아 냉철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또 그의 얼굴에 박힌 주름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거대한 신체를 보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진 바위를 번쩍 들어 치워낼 수 있을 만큼 건장하다!

노인은 다가오는 나와 벤투스를 번갈아 보며 정답게 말했다.

“들어오게, 산이 부린 심술을 오르느라 고생했을 테니.”

예상치 못한 그의 따듯한 말투와 행동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어 집 안으로 안내받기 무섭게 노인은 나를 낡은 의자에 앉히곤 혼자서 좁은 집 안을 바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핀 불 위로 주전자 하나를 내걸고는 운을 떼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뭔가?”

“디안, 디안 베나즈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금방 두 눈을 우수에 적셨다.

“멋진 이름이군, 나는 토르킨 루에르라고 하네.”

예상은 했지만, 확신까진 아니었는데,

그가 바로,

조이가 말한 마이스터.

“마찬가지로 멋진 이름이십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느껴졌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내 대답에 쾌활한 목소리로 화답한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껏 마주친 이름 가운데서도 가장 산이나 하늘 일부에 어울릴 것 같은 특이함을 느꼈으니까요.”

그 말에 토르킨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 그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그에게 똑같이 되물어 보았다.

“제 이름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깊은 눈망울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밤을 닮은 자네의 모습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러한 밤 가운데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박혀 있는 ‘베나즈’란 별도.”

토르킨 루에르.

그는 대번에 날 관통했다.

* * *

이름 모를 향긋한 차 한잔을 대접받은 뒤로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자 토르킨은 집에 딸린 유일한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곤 내게 내주었고,

그 안에 내가 가진 짐을 푸는 것도 손수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조이가 써준 편지를 잊지 않고 그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그 편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여 오전을 다 소비하고 난 뒤엔,

어제와 마찬가지로 토르킨은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저 소소하게 찻잔을 닦거나, 깃털 펜을 들고 무언가를 쓰거나, 낡은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행동만을 할 뿐.

이제 셋째 날이 되었다.

토르킨은 오늘도 역시 내게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묵묵히 내가 가진 물건들을 정돈하고 정비할 뿐이다.

넷째 날.

슬슬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나는 그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다섯째 날이 되었을 때.

결국엔 나는 그에게 찾아가 물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겁니까?”

그러자 그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되묻는다.

“그걸 왜 내게 묻는가?”

따지듯 묻는 그에게 나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토르킨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 ‘때’라는 건 자네가 결정하는 거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닐세. 왜 항상 때가 찾아오길 바라는 인간이 되려 하는 건가? 때를 스스로 찾는 사람이 될 순 없는 건가?”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많은 두 발 걷는 자들이 착각하지, 가르침을 주는 내가 주체가 되어 받는 이를 이끌 거라고 말이야.”

토르킨은 내가 말 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제 그 장대한 신체를 일으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건 아주 오만한 생각이야, 난 그런 애 같은 놈에게 가르침을 줄 마음이 없어. 명심하게, 가르침을 받는 자야말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토르킨은 날카로운 눈매로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한다.

“특히 그런 결심을 한 자네라면 더더욱 그래야 해.”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나를 뜯어고쳐야 할 것 같구나.

씁쓸하면서도 작심한 표정으로, 심중에 베어 물은 납득을 씹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가 내게 다시 묻는다.

“디안 베나즈,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 물음에 나는 확신에 찬 눈빛과 함께 답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토르킨 루에르는 이제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제자 될 사람아. 나는 자네의 선생 될 사람이네.”

나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쥐고 있는 손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 * *

여섯째 날,

날이 밝기 무섭게 나는 토르킨을 찾아가 물었다.

그건 내게 있어 아주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선생님,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런 내게 토르킨은 질문했다.

“무엇을 위해 그 막막한 길에 올라섰는가?”

“맥레인 베나즈, 그를 위해서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남긴 의지를 위해서지. 망자는 땅속에서 썩어야만 이로운 것이야. 망자가 마음 중에 썩으면 그건 심중을 좀먹는 사상충에 불과하네.”

조금은 속상했다.

토르킨의 그 가차 없는 말에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맥레인이 빛바래는 것 같아서.

그런 내 마음을 대번에 헤아린 그는 이번엔 좀 더 비튼 말로 나를 이해시켰다.

“하지만 의지는 망자와는 달리 썩지 않아, 건네받은 자 안에서 무한히 생존한다. 맥레인 베나즈는 죽었을지언정, 그의 의지는 자네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어. 그럼 이제 자네는 무엇을 위해 그 막막한 길에 올라섰는가?”

“맥레인 베나즈가 제게 건넨 의지 때문입니다.”

내 대답에 토르킨은 호탕하게 웃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누군가가 지켜왔던 의지를 건네받은 그대는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의지를 계속해서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어떻게?”

“베나즈의 이름에 묻은 얼룩부터 지우고 싶습니다. 그의 장렬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모르겠다.

이렇게 내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는 생각을 말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토르킨은 답했다.

“그럼 ‘기둥’이 되게.”

그리고 내가 재차 묻기도 전에 그는 날 보며 확신하듯 말했다.

“이미 ‘기반’은 다져져 있지 않은가?”

* * *

일곱째 날.

토르킨은 나를 앉혀놓고 느긋하면서도 긴장감이 들게 하는 멋들어진 목소리로 내게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

“세상엔 아주 많은 인챈트가 있어, 그 수는 대충 헤아려도 수백, 아니 천의 자리로 품어야 하는 건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지.”

이내 그가 고개를 치켜세운 채 본격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현자의 기록법에 의거, 낮은 숫자에 치달을수록 그에 해당하는 인챈트 역시 손에 꼽을 만큼 적어진다네.”

토르킨은 찻잔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에 묻혀 책상 위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0에 해당하는 인챈트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총 11개에 달하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그나베노스…,”

내 말에 토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는가? 현자가 인챈트를 만든 이유를 세상 사는 자들은 마법사들을 견제하기 위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또 다른 이유도 있어.”

“그게 뭐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두 발 걷는 자들의 분쟁을 위시한 자연스러운 기상의 흐름. 용의 시대 이후 사라질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현자가 구축한 방안이기도 하네. 인챈트라는 건 말이지.”

그래,

그 말대로,

지금도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인챈트를 가진 이들이 기상을 흩뿌리고 있겠지.

그 수가 몇이든 간에.

마치 자연스레 기상 현상이 세상에 만연하듯이.

“자 그럼, 이제 내가 자네에게 질문을 좀 해볼까? 인챈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게 말해보게.”

“말씀하신 대로 재해에 해당하는 현상을 담아낸 물건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담아낸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것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네, 그 영역은 손 놀리는 자들의 것이니까. 다만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면 인챈트의 실체는 ‘글씨’야. 현자가 자신의 기억을 잉크 삼아 써 내려간 것이지.”

“저로서는 말씀해주신 대로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로군요.”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추상과 실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니까. 자네는 단지 그 결과물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되네.”

“알겠습니다.”

다시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간 나는 알고 있는 것들을 찬찬히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또 다수의 인챈트를 다루는 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힘든 일이라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네, 다만 그러한 사례는 한 번도 관측되지 않았을 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야.”

“인챈트를 구현하는 방식은 해당 기상의 일부를 갈무리하여 방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자체로 재현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부담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것들이었지요.”

내 말에 토르킨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이번엔 토르킨이 말을 이어갔다.

“이제 자네에게 보이는 공백을 내 채워주지.”

* * *

첫째,

인챈트의 주인은 그 성격이 가진 기상의 성질과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가령 어둡고 음습한 기상의 주인은 그 성격이 마찬가지로 음습해지기 쉬우며 호쾌함이 만연한 기상은 주인의 성향마저 대범하게 만들기도 한다.

둘째,

인챈트는 비단 무기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물에 담길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챈트가 무기를 주체로 삼는 이유는 그 힘을 가장 쉽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사의 땅이라 불리는 이곳 아이베리아에 존재하는 인챈트의 주체는 9할이 무기에 해당한다며 이 말을 했을 때 토르킨은 참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셋째,

인챈트는 같은 종류에 해당하는 기상이라고 해도 그 특징이 다를 수 있다.

인챈트의 특징은 세 개로 분류되는데.

바로 군림, 장악, 재림으로 그 특징이 나누어진다.

군림은 말 그대로 발휘됐을 때에 다른 기상을 관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특별한 힘의 특성상 5년 이하에 해당하는 인챈트에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0에 해당하는 인챈트는 모두 이런 군림 형에 속한다고 했다.

다음은 장악.

대부분의 인챈트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며 말 그대로 제공을 장악하여 그 힘을 발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개중에는 군림에 해당하는 인챈트조차 관제하지 못 하는 것들도 더러 있으며, 반대로 전투용으론 도저히 쓸 수 없는 유약한 것도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재림.

즉시 발생형 인챈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자 발휘된 즉시 그 기상의 기세가 신체에 덧씌워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벼락이 이에 해당하며 말 그대로 신체를 기반으로 기상을 재림시켜내기에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모든 특징 가운데 재림은 사용자의 신체에 가장 많은 부담을 안기기에 양날의 검에 해당한다.

그렇게 토르킨이 내게 해준 설명을 한참 되뇌고 있던 때에.

토르킨은 말했다.

“자 이제 기둥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슬슬 감이 오지 않는가?”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

군림하게 될 내 관제 내에,

우렁차게 장악하고 강렬하게 재림할 기상들이.

그러나 그 방편은 대체 어떻게…?

토르킨은,

내 펜던트를 가리켰다.

“베나즈가 네게 남긴 건 비단 의지뿐만이 아니지, 그 이름의 인장을 가지고 그의 땅으로 가거라.”

그가 웃는다.

그리고 또다시 나를 관통하듯 말한다.

“그가 남긴 가족의 이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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