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마이스터 (2)
겨울 하늘이 점점 멀어지고,
봄 하늘이 그만큼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수많은 탑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계절의 과도기가 찾아왔다.
그 아래,
정돈되지 못한 까칠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다.
조이 크레비디.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은화를 탈탈 털어 낡은 배에 올랐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는가.
선실에 걸려 있는 삐뚤삐뚤한 달력을 살피던 조이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돌아온 베나즈의 의지를 맞이하고,
이에 작심하여 떠난 때가 벌써 석 달 전의 이야기라니.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더 초조해질 것을 직감한 조이는 이번엔 부디 찾고자 하는 이와 만나길 간절히 바라야만 했다.
“대체 얼마나 먼 곳까지 떠난 것이냐, 베르융.”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조이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슬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때, 막 배에 올라탄 장정들이 거나하게 떠들어대며 조이를 지나쳤다.
“아직도 티바르와 라이튼은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지?”
“말도 마라, 이제야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 같던데.”
“중립지역에서 올라온 피난민들 때문에 국경이 아주 난장판이 됐다고 들었어.”
“이 땅에 난장판이 아닌 곳이 어딨겠는가,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깃발이 부러지고 또 세워지고 있겠지.”
“참으로 어려운 시기야.”
조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본디 저런 소식들을 제일 먼저 듣고 알려주는 위치에 본인이 자리해 있었는데.
지금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소식을 접하고 있는 꼴이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근 석 달 동안 외로이 이동한 터라 혀 위로 굴려본 글씨가 몇 자인지 셀 수 있을 정도였던 그는,
오랜만에 만난 그들에게 특유의 거부할 수 없는 호감 넘치는 표정으로 분장하여 다가갔다.
“안녕하시오?”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그에게 장정들은 거리낌 없이 호의를 보였다.
“오, 처음 보는 얼굴이구먼?”
“행색을 보아하니 사냥꾼인 것 같은데, 요즘 사냥감들 수율이 어떻소? 참, 이 근방은 관리가 잘 안 되어서 괴물들이 빈번히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이어지는 상호 간의 호기심 속에,
조이는 그들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제법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과반이 항간과 과장이 뒤섞인 낭설이었겠지만.
아이베리아엔 지금 세 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다.
하나는 북방의 리시론.
다른 하나는 동방의 시르아.
마지막으로 서방의 나플리엔.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기둥 사이사이로 중간 규모의 기둥들이 언제나 그렇듯 분투하며 세력을 장악해나가는 형국이다.
그 과정에서 기둥을 잃은 깃발과 봉토들이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흩어져 있는 것이 지금의 아이베리아.
비교하자면,
그래. 그냥 규모가 큰 중립지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그 규모도 엄밀히 따지면 수십 배에 달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개개인만이 범람하는, 상호 간의 존중이 거세되어있는 중립지역과는 다르게 이곳엔 존중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게 중립지역과 아이베리아의 가장 큰 차이다.
이 땅이 기사들의 땅이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것.
조이는 장정들에게서 지고 떠오르는 지루한 깃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가슴 속이 벅차올랐다.
과거 기사들과 나누었던 존중과 존경이 떠올라서.
그리고 그런 과거의 향수를 불과 석 달 전에 맡았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너무나 기대되는구나.
지금 디안 베나즈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곱씹어 소화해낸 그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 * *
배에서 내린 조이는 장정들의 마차를 얻어 타고 장대하게 펼쳐진 밭들을 쉬이 지나칠 수 있었다.
벌써 조이와 친해졌는지, 마차를 끌던 장정들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아쉬움을 내비쳤다.
“언제 또 한 번 이 땅에서 마주쳤으면 좋겠군.”
“별들의 가호가 함께 하길.”
벌목꾼인 그들로서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작별인사에 조이는 존중을 담아 고개 숙여 화답했다.
“자네들이 있는 곳에 길이 있기를.”
이제 긴 잠에서 태동하는 벌레와 새들의 간간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조이는,
겨우내 밭에서 기어이 싹을 튼 잡초들과 씨름하는 농민들에게 묻고 물어 작고 허름한 집 앞에 도달하였다.
햇볕 아래,
작은 담 너머로 보이는 낡은 집 마당엔.
장성한 청년이 짚을 엮어 다가올 가을에 세울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었다.
그놈 참 훤칠한 것이, 과거 베르융과 쏙 빼닮았구나.
특히 콧등 사이에 완만한 언덕 하나 들어간 것 같은 매부리코가!
덜컥 반가움에 조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연신 헛기침을 하며 그것을 참아낸 뒤 조심스레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크흠, 안녕하시오?”
조이가 낸 인기척에 청년은 만들고 있던 허수아비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초롱초롱한 것은 어미를 닮은 건가.
갈색 곱슬머리에 조금은 긴 뒷머리를 질끈 묶은 그 청년은 조이를 경계하다가도 일부러 찾아온 손님임을 직감하곤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과거 베르융과 아주 친밀한 사이였었네.”
그러나 이어지는 조이의 말에 청년은 얼른 허리를 더욱 굽혀 예를 다했다.
“그러셨군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때,
조이는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혹, 베르융 이놈이 이런 아들을 남겨놓고 먼저 눈을 감은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런 불안감도 잠시,
청년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선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셨습니다만 이 시간쯤이면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고맙네.”
그렇게 집으로 들어선 조이는 가까스로 추슬렀던 감정을 결국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아네즈!”
“조이? 조이 크레비디?!”
집 안에서 열심히 곡식을 빻고 있던 한 여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베르융과 맥레인과 함께 쏘다녔던 말괄량이 소녀는 이제 한 가장의 안주인이 되었구나.
그간의 세월이,
그 세월 속에 있었을 고난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옛 모습과 다름없는 곱디고운 모습으로 조이를 발견하기 무섭게 달려가 반겼다.
“세상에, 조이. 당신이 살아있었을 줄은 몰랐어! 베르융과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었는데!!”
“나야말로 아네즈, 너와 베르융의 이름을 그리움이란 강물에 몇 번을 적셨는지 몰라!”
이어서 아네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별안간 조이의 등 뒤를 살폈다.
당연히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맥레인은? 그 심술쟁이 맥레인 베나즈는 어디에 있어?!”
그리움에 드리운 얼굴로 꼿꼿이 고개를 들어 살피던 그녀는 이내, 조이의 표정을 보곤 굳은살이 배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흐느낄 동안,
베르융의 아들은 조용히 문 앞에 서서 지그시 미소 지었다.
자신의 어미 얼굴에 핀 웃음꽃과 그 웃음꽃에 서린 이슬이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벌컥.
집 문이 열리고.
“아네즈, 오늘 사냥은 꽤 성공적…,”
아직도 활기가 넘치는, 그러나 쇳소리가 그만큼 진해진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욕이 들어간 거친 말 몇 마디와,
씁쓸한 담금주 한잔이면 됐다.
시커먼 두 장정 사이에 켜켜이 쌓인 그리움은 그렇게 거두어졌다.
아네즈는 불을 쬐며 빻은 곡식을 찌고 있었고,
청년은 집구석에 마련된 작업대에서 화살촉을 다듬으며 두 남자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아들의 이름이 뭔가?”
조이의 물음에 베르융은 대답 대신 아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청년이 다가와 조이에게 고개 숙여 정식으로 인사했다.
“제 이름은 베르긴 오르테입니다.”
평범한 농민에게선 나올 수 없는, 예의가 깃든 자태다.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다.
그 역시 이 청년과 비슷한 동년배일 테니 서로를 잘 이끌어줄지도 몰라.
조이는 이제 작심한 듯 베르융에게 말했다.
“베르융, 맥레인이 무사히 일을 마쳤네.”
베르융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풍이 돌아왔네. 맥레인의 의지와 함께 말이야.”
“조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알지 않는가.”
“우리에게 덮인 세월의 무게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네.”
“그러니 짓이겨져 한 줌의 재가 되기 전에 들어 매쳐야지.”
베르융은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대뜸 베르긴이 다가와 우뚝 섰다.
“아버지,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제게 검을 가르치셨습니까.”
이에 조이가 베르긴에게 물었다.
“검을 배웠다? 베르융이 자네에게 검을 가르치던가?”
“오르테의 13번을 5년 전에 다 깨우쳤습니다.”
조이는 경악했다.
천재라는 단어조차 어울리지 않는 경이로운 재능이로다.
“아버지, 평생 밤잠을 설치며 부르짖으시던 그 이름이 친우분의 입에서 열거되었는데, 어찌 평생 가지고 계신 뜨거움을 지금 감추고 계신 겁니까?”
“너 때문이다, 베르긴.”
베르융은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베르긴은 위축되긴커녕,
베르융보다 한 뼘 더 큰 키로 나아가 당당히 마주 섰다.
곧 조이는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 맥레인조차 심중으로 나은 자식에게 졌거늘,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찌 이기겠는가?
결국엔 베르융은 식혀 꺼트렸던 불씨에 베르긴의 풀무 같은 눈빛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보라,
이 자리에 깃발을 기다리는 세 기사가 탄생했다.
* * *
숫자는 통계를 만든다.
그리고 통계는 신뢰를 낳는다.
비록 그것이 타인에게 공인된 것이 아닐지라도.
개인이 겪고 느낀 경험으로 구축한 통계는 적어도 그 자신에겐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숫자에도 능통한 토르킨 루에르는 디안 베나즈를 만난 지 한 달 만에 자신이 구축한 통계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손수 엮어 만든 낡은 책을 꺼낸 그는 곧장 한 페이지를 펼쳤다.
그 페이지 상단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통찰력]
보고 들은 것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능력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이 글씨 밑으로는,
[맥레인 베나즈, 7]
[라렌 비엔슨, 8]
[조엘 겔르니, 8]
[아르딘 아빈, 9]
지금껏 그를 스쳐 지나간 제자들을 간결히 평가한 것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디안 베나즈는 눈에 담긴 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통찰이 뛰어나 이해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었고,
내놓는 철학마다 맹점을 파고드는 이지적인 면모 또한 보여 토르킨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해서 그는 잉크 먹인 펜을 놀려 적었다.
[디안 베나즈, 9]
9는 그의 통계에서 통상적으로는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했다.
그러니까 천 명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그런 재능에 속해야만이 토르킨 개인의 통계에서 9라는 숫자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넘긴 다음 장엔,
[기발함]
제법 추상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었으나 겪어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한 것이었다.
디안 베나즈에게 가르침을 준 지 두 달째 되던 때.
간단한 최면으로 길들인 개미 떼를 운용하여 진형전을 벌이는 훈련법에서 그는 다섯 번을 내리 지다가 토르킨이 수놓은 개미들의 치우침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었다.
보는 시야가 남다르다는 소리지.
[디안 베나즈, 9]
이어 다음 장으로 넘기자 전과는 달리 이번엔 명확한 주제가 떨어졌다.
그것은,
[신체 능력]
가진 모든 기술을 포함해 신체로 나타내는 능력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기사의 덕목인 무력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서 토르킨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적었다.
[디안 베나즈, 10]
간혹 이렇게 상정한 통계를 벗어난 상식 밖 괴물이 있기 마련이지.
과연 맥레인 베나즈의 의지답다고 해야 할까.
잠깐 그리움에 젖은 토르킨은 방금 적어 넣은 디안 베나즈 이름 아래 적힌 단 하나의 이름을 눈에 담았다.
[맥레인 베나즈, 13]
마지막으로,
토르킨은 ‘기이’라는 명제 앞에서 한참을 고심해야만 했다.
기이란,
디안 베나즈에게 석 달간 가르친 제왕학 가운데엔 들어있지 않은 과목이었지만,
반대로 가르치는 내내 요구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것은 신체 능력으로 나타나든, 통찰로 빚어지든,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감히 정형화시킬 수 없는,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잉태한 한 줄기 빛을 말한다.
[디안 베나즈, 13]
토르킨은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순간부터 확신했다.
이 능력은 분명 그의 심장 옆에 들어선 것과는 무관한, 순수한 본연의 능력이라고.
기대되는구나.
태풍이 일어날 날이.
“가는 거냐?”
“네, 선생님.”
짊어진 것들이 겨워 보이지 않을 만큼, 이제는 유쾌한 웃음도 지어 보일 줄 아는 사내가 조용히 토르킨에게 인사했다.
토르킨은 그런 그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는,
등 몇 번 두들겨주며 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