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18화 (118/365)

118화. 불어오는 바람

열화된 인챈트.

그것은 탑에서 껴 맞춘 날씨들의 파편을 모아 실로 옷감을 짜듯 만들어진 하나의 기상이며,

대부분은 연금술사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

당연하게도 집단에 따라 그 완성도가 천차만별이고, 개중엔 힘을 발휘하기는커녕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질 낮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인챈트 가운데서도 현자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것과 흡사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마이스터에 의해 만들어졌다.

비록 현자의 법칙에 따라 100년의 인챈트 앞에선 그 힘이 무력화되지만, 그 완성도는 일반적인 인챈트와 진배없으며.

그 위력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인챈트는 열화된 것이라 부르지 않고 마이스터의 작품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마이스터의 작품 중 하나가 벤투스의 안장주머니에 걸려 있다.

내게 가르침을 주신 토르킨께서 근 20년간을 짜 맞춰온 이 한줄기 벼락은,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작은 워해머에 새겨져 있었다.

이 워해머 또한 토르킨님의 작품이었는데, 선생께선 이것을 졸업선물이라며 내게 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지.

워해머는 기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다르게 말하면 이 워해머는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의 이정표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진정 목숨을 걸고 상대해야 할, 미지의 적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상징적인 물건이었으니까.

이 벼락의 이름은,

[유스티아.]

그 이름의 뜻은,

[정의]

그리고 토르킨님은 그러한 상징적인 물건에 완전히 반대되는 물건 또한 내게 주셨다.

그것은 작은 머스켓이었으며,

비정하고 명예 없는 자를 처결하기 위한 도구였다.

걸친 갑주를 부정하고 벗은 자, 날붙이에 피 묻히며 죽어가는 영광을 누릴 수 없으니 과거의 잔재 속에 묻혀 죽게 하라.

책을 통해 중립지역의 가장 굵직한 규칙을 배웠듯이.

토르킨께선 이 말을 제일 먼저 내게 가르치셨다.

그 말은 확실히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중립지역에서 화약은 말 그대로 값비싼 사치품이었는데.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선 그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구나.

* * *

아직도 가르침을 받던 나날들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첫날부터 선생께선 갑옷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초라한 깡통을 입으라 명하셨지.

그렇게 둘이서 한참을 낑낑거리며 깡통을 뒤집어쓰고 한 일은,

몸싸움.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레슬링이었으며,

아주 간단한 몸동작으로 상대의 목뼈를 으스러트리거나 교묘하게 엉켜 관절을 뽑아버리는 흉악한 무술이었다.

선생께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내내 나를 압도했고, 나는 그저 막기 위해 급급하게 움직여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맥레인으로부터 부러지고 멍드는 몸의 대화를 여러 번 나눠본 나로서는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적응이라고 해봤자 선생님을 상대로 방어에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야.

몇 주간 그렇게 치열하게 몸을 치대고 나서는,

이 일련의 격투가 배움보다는 내 과분한 사고를 덜어내는 과정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솔직히 그때 느꼈던 감정적 홀가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맥레인이 남긴 의지에만 초점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윽고 선생께선,

고민을 갈고리 삼아 깊은 세상으로부터 건져 올린 철학을 내게 설파하셨다.

아, 되뇌어 보는 김에 다시 마음속에 새겨 보자.

첫째,

내 운명을 사랑하라.

둘째,

존중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값싸면서도 귀한 화폐이다.

셋째,

진리는 없다. 이미 세상은 미완성으로 완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토르킨님이 말씀하신 그 말들은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들이었다.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을 훌륭한 인재들 역시, 각기 다른 말들을 듣고 세상에 퍼져나갔겠지.

그리고 내가 바로 그중에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심 자랑스럽다.

동시에 펜던트를 만지며 속으로 말해본다.

맥레인 당신도 이런 나를 보면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라고.

이후엔 남이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또 남을 격려하는 법과, 반대로 남에게 냉정해지는 법도.

어떨 때는 타인을 안달이 나게끔 구슬리는 방법도 익혔다.

결국엔 이 땅을 주무르기 위해선 검보단 사람을 더 잘 휘둘러야 했으니까.

다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군사학이었다.

각기 다른 역할을 가진 수많은 종의 개미를 이용해 토르킨님을 상대로 ‘모의전’을 치러 진형을 겪었고.

이에 유감없이 철저하게 패배했으며,

틈을 파고들어 쟁취한 승리가 얼마나 달콤한지도 맛봤다.

판단은 산보다 무거웠고 결단은 태양보다 뜨거웠지만.

다시 마주하라 한다면 능히 뛰어들어 맞이하겠다.

어느새 나와 벤투스는 하산을 마치고 평지를 거닐고 있었다.

오를 땐 그렇게나 높게 느껴졌었는데?

되려 그 많은 가르침을 되뇌기엔 산이 너무 낮게 느껴지네.

이럴 때 보면 발상의 전환이라는 게 참으로 마법 같은 단어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벤투스, 바람처럼 달릴 준비가 됐니?”

푸흥!

녀석의 갈기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 쓰다듬은 나는 곧바로 안장 위에 올랐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지도 덕분에,

이미 목적지는 한참 전에 정해 놓았다.

그곳은,

베나즈의 땅.

‘리케니엔’

* * *

토르킨 루에르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비어 있는 종이 수십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그중 하나를 붙잡고 잉크 먹인 펜을 들어 거침없이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태풍이 돌아왔으니, 그 태풍의 벼락이 되고 바람이 되길 꿈꾸던 자들이여.

또 허무하게 지게 될지언정 화려하게 필 각오가 된 자들이여.

걸음을 옮기시게.]

그 편지는 때를 기다리는, 토르킨의 키워낸 인재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의 편지 수십 장을 흉내 낼 수 없는 명필로 완성 시킨 그가 새장에 모여 있던 새들의 발에 하나씩 엮어.

끝내 모두 바깥으로 날려 보냈다.

* * *

리케니엔.

과거엔 영광스러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0의 주인을 배신한 배반자의 땅으로 전락해 그 규모가 비루하고 볼품없는 마을에 불과한 땅이었다.

대부분이 떠나가고,

승자가 써 내려간 역사 속에 베나즈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가신들만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곳은 이제.

주변에 그 세력이 불어난 산적 집단에 징수까지 당하는 굴욕을 겪고 있었다.

사실 말이 산적이지,

그들의 주축은 이 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둥 잃은 깃발이었고,

해서 웬만한 가문의 사병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규모까지 그 세력을 탄력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산적 무리의 두목은 근방 마을 주민이라면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안게츠의 기사, 테쉬킨.

인챈트의 주인이자 ‘난잡한 벼락’ 이란 무시무시한 별칭까지 가지고 있는 자였다.

기둥은 되기 싫으나 그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테쉬킨은 이 근방에 산적으로 군림하여 주변 마을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테쉬킨이 이끄는 산적이 리케니엔을 징수하는 날이었다.

그 수가 20에 달하는 산적들이 말을 타고 리케니엔으로 향하는 길목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땐.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제국에서 파견한 사신단의 행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그렇게 리케니엔에 도달한 그들은,

거만한 모습으로 말에서 내려 광장에 설치한 종을 울렸다.

땡- 땡-

이어 그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리케니엔의 열 남짓한 집에서 사람들이 급하게 달려 나와 약속이라도 한 듯 광장에 2열로 줄지어 섰다.

이윽고 줄지어 선 사람들에게,

산적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들고 있던 미늘창을 땅에 박은 채 찬찬히 걸어 나왔다.

“할리, 사냥은 잘 되어가나?”

짙은 검은색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묻는 그의 말에, 마을 주민 중 하나가 덜덜 떨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물론입니다. 작은 엘크 하나를 잡았지요…!”

금발의 젊은 청년인 할리는 두려움이 깃든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름한 푸줏간을 가리켰다.

그곳엔 막 손질을 마친 엘크 고기가 부위별로 갈고리에 걸려 있었다.

“음, 아주 좋아.”

걸려 있는 고기를 확인한 산적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진 채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시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서 캠프로 데려갈 여자를 차출하겠다.”

그 말에,

덩치 큰 중년의 남자가 따지듯 물었다.

“저희 마을은 제시하신 세금을 충분히 납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린 산적이 이죽거리며 되묻는다.

“그럼 지금부터 징수할 세금의 양을 3배로 올리지.”

“어…어찌!”

“어차피 모든 마을이 다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야. 애초에 너희들에게 이 문제를 회피할 방법은 없어. 전부터 말했지만, 우리에게 순응하기만 하면 우린 너희를 해치지 않아. 차출한 여인은 정확히 이틀 후에 되돌려 보낸다.”

결국엔 마을 사람 중 부당함을 참지 못한 사내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에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아예 없는 거요?!”

그러자,

“선은 우리가 정하는 거다, 이 병신 새끼야.”

산적의 표정이 대번에 굳더니 그대로 달려들어 군홧발로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남자는 뒤로 한참이나 날아가 땅에 처박혀 버렸다.

이어 산적은 그런 남자 옆에 있던 그의 아내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자 다음은…,”

방금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산적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다시 뒷짐을 진 채 마을 사람들을 살피던 중.

한 사람 앞에 멈춰 서서 이내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망조가 들어 기반도 없는 배반자의 가문에 아직도 이런 명물이 가신으로 남아있었을 줄이야.”

고운 흑발을 가진 중년 여성 앞에 멈춰 선 산적은,

대번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가.

서슴없이 골반 쪽에 손을 얹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그녀 옆에 있던 초로의 남자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움찔거렸지만,

되려 희롱당하던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말렸다.

이런 둘 사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여인의 엉덩이를 때린 산적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고 나왔다.

“링갈, 셋을 데려가서 고기를 챙겨라. 나머지는 곡식을 거두도록 해.”

“얀세르, 여기선 두 명만 차출하는 겁니까?”

“아니, 최소한 다섯은 데려가야지. 참?”

얀세르라 불린,

이 산적 무리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처음 끌고 나온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 딸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보기완 달리 기억력이 꽤 좋거든.”

섬뜩한 표정으로 일갈하듯 묻는 그에게,

여인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때,

마을 밖에서 바쁜 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인지했을 때엔 이미 잿빛 말을 탄 누군가가 순식간에 마을에 진입한 뒤였다.

그는 태연하게 말에서 내리고는,

푸줏간 근처로 다가가 허름한 헝겊으로 흙 묻은 부츠를 닦았다.

이어서,

머리에 쓰고 있던 어스름을 벗어, 마치 망토를 두르듯 어깨 뒤로 넘긴 그는.

또 정말이지 태연한 모습으로 매달린 고기 밑에 박혀 있던 도축용 칼을 집어 들었다.

그런 그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한 얀세르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한쪽 광대를 일그러트리며,

“죽여서 놈이 가지고 있는 걸 다 내게 가져와.”

살벌하게 중얼거렸고.

동시에 열이 넘는 산적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방에 남아있던 둘 정도가 쇠뇌에 볼트를 물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쇠뇌 위에 볼트를 막 걸치고 있었을 땐.

이미 상황이 한참이나 급변한 뒤였다.

관절이 파열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겨드랑이와 무릎 뒤, 발목 힘줄을 찔리고 베인 산적들이 비명을 꽥꽥 지르며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황은 싸움이 아닌,

말 그대로 짐승을 일방적으로 도축하는 모양새였음을 알아차린 얀세르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남은 인원들에게 손짓했다.

“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땅을 박차 날아들듯 들이닥쳐 시위를 당기고 있던 자 가운데 하나의 턱 위를 말끔히 베어 날려버렸다.

“으…으어….”

이미 조준에 필요한 최소한의 침착마저 잃은 나머지는 지니고 있던 무기를 바꿔 들어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도축용 칼에 사정없이 베여 쓰러졌고,

“뭐야…!”

이내 얀세르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봐야만 했다.

어느새 남은 건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기세를 잃지 않고 우직하게 미늘창을 양손으로 놀리며 남자에게 소리쳤다.

“덤벼라, 기사의 이름을 걸고 내 가진 창술을 모두 보여주지.”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기사라고 했나?”

“그래, 나는 안게츠의 중급 기사 얀세르! 내 창술을 받…,”

탕!

남자는 얀세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번에 꺼내든 머스킷으로 얀세르의 왼쪽 무릎을 날려버렸다.

“아아악!! 악!!”

“이건 총이야, 창술을 이겨.”

이내 남자는 들고 있던 도축용 칼을 내팽개치듯 던져 얀세르의 목을 꿰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