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19화 (119/365)

119화. 불어오는 바람 (2)

무슨 말이 필요할까.

리케니엔의 주민들은 그저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보고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난 그런 그들에게 작게 고개 숙여 화답했다.

직후 나는 마을 남자들과 함께 널브러진 시체를 치웠다.

마을 아낙네들은 곳곳에 웅덩이진 핏물을 흙으로 덮었고, 뒤늦게 숨어 있던 아이들도 나와 그녀들을 거들었다.

시체를 모아 불에 태우고, 미리 여인들이 우물에서 퍼 올려놓은 물로 손을 씻고 나서야.

초로의 남자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 전에 머나먼 길을 거슬러 오시느라 피곤하시진 않으신지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야만 했다.

“기…다렸습니다, 하염없이…, 그런 우리에게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펜던트를 손에 쥐며 답했다.

“너무 늦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내 헤집어진 마을을 어느 정도 갈무리하여 정돈했을 즈음.

초로의 남자는 나를 마을 내 가장 큰 저택으로 안내했다.

돌담은 이미 한참 전에 무너졌는지 성한 데가 없었지만, 저택은 참으로 관리가 잘 되어 멀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택 내부로 들어서기 무섭게,

흑발을 둥글게 말아 질끈 묶은 중년 여성이 내게 다가와 능숙하게 어스름을 벗겨갔다.

이어 남자는 나를 데리고 저택 지하로 향했고,

드러난 제법 넓은 지하 공간 안에서.

아늑하게 안치되듯 놓여 있는 한 석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지하, 빛이라곤 두 촛불뿐인 그곳에서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간직한 석상은 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반짝이고 있다.

찬찬히 석상을 살피던 나는 이내,

그 아래 새겨진 글씨를 보고.

펜던트를 벗어 석상의 두 손에 조심스레 걸어두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석상을 향해 고했다.

비록 이곳에 묻히지 않았을지라도,

당신의 넋이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맥레인의 그리움에 제가 다 사무칠 정도였습니다…, 메리안님, 디안 베나즈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리안 베나즈]

그녀의 이름이 적힌 석상 앞에서 고개 숙여 묵념한다.

어느새 모인 가신들은 모두가 소리죽여 흐느꼈다.

* * *

“저는 바돈 앵킬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안사람인 세라 앵킬로지요.”

말끔하게 정돈된 수염, 뒤로 넘긴 갈색 머리.

광대 아래로 깎아지르듯 들어가 있는 양 뺨에 갈라진 턱 끝.

그 위로 크게 솟은 코와 유순한 눈매 속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

지나친 세월만큼 우직해 보이는 초로의 남자 옆에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네요, 이것이 진짜 꿈이라면 전 눈 뜨지 않으렵니다.”

윤기가 흐르는 흑발에 미약한 주름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아리따운 중년 여성이 꿋꿋한 흔적 묻은 투박한 손으로 치마를 붙잡고 내게 인사했다.

검고 짙은 눈썹 속, 바돈을 닮아 유순한 눈매를 가진 그녀의 잿빛 눈동자는 마치 물살에 깎인 윤택한 조약돌 같구나.

“저희 앵킬로 가문은 옛날부터 베나즈 가문을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끊긴 줄로만 알았던 베나즈 가문의 명맥을 이어주신 디안님께 우린 다시 유감없는 봉사를 맹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돈. 그리고 세라. 베나즈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진심으로 새기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잡으며 안도했다.

그런 그들과,

아니 마을 주민 모두와 하루빨리 교류하며 이 땅에 뿌리내리면 좋았을 테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세라, 주민들을 한 자리에 모두 불러 모아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애써 감춰왔던 불안감을 그제야 드러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돈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다.

대대적인 토벌을 피할 목적으로 숲을 중심으로 은거하는 산적 세력.

그 주축은 기둥을 잃은 기사며,

간간이 무리를 풀어 주변 마을을 순회해 수탈하는 것을 볼 때 제법 신중함을 부릴 줄 아는 까다로운 적들이다.

하지만 애써 발휘한 신중함이 가로막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산적 무리인 그들의 특성상 분명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겠지.

이윽고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온 바돈이 찾아온 장부를 훑으며 내게 보고했다.

“오늘 그들이 끌고 온 말들을 합쳐 이곳에서 운용할 수 있는 말은 총 열한 필입니다, 제법 많은 편에 속하죠.”

“장비는 주민 모두를 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들이 제일 처음 약탈한 것이 바로 강재와 모루, 그리고 농기구를 제외한 장비였습니다. 다만 리케니엔은 예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사냥을 즐겨 하였기에 활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바돈이 장부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또 엄밀히 말하면 장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적들에게서 수거한 장비만 해도 미늘창 네 자루에 도끼 두 자루 그리고 영주님께서 발휘하신 신기에 가까운 검술 덕에 손상되지 않은 사슬 갑옷 여섯 벌이 있지요.”

그새 벌어진 일을 추스르고 그 안에서 헤아릴 것들을 추리는 솜씨를 보아하니.

어떻게 이 마을이 계속 유지되었는지 알 것도 같군.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위는 적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벽도, 이렇다 할 수성 병기도 없으니까요.”

바돈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숙였다.

“이 부덕한 제가 더 신경을 써야 했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서로가 부덕했으니 지금부터라도 화합하여 빈 곳을 채워야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돈은 그런 나를 우러러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언제 적들이 올지 모르니 기약 없는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철저함을 발휘해 봅시다.”

* * *

마을 광장엔 노인과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그 수가 마흔에 가까웠다.

그들은 나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는데,

아까까지는 정황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참으로 낯선 광경에 낯선 느낌이다.

하지만 처음 상자 안에서 눈을 뜨고, 묵묵히 거친 세상에 적응해 나갔던 것처럼.

나는 그저 똑같이 해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토르킨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은 미완성으로 완성되어 있기에 완성만이 진리가 아니며, 특히 완성되지 못한 나이기에.

그저 놓인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미완성의 완성을 이룰 수 있으리라.

지금은,

베나즈의 이름이 걸린 땅을 지켜내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들의 넋을 수호하는 것이 내 일이다.

“바돈, 주민들 가운데 손재주가 좋은 자들을 추려 방책과 활을 만들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영주님.”

“남은 자들은 모두 저택에 들어와 빗장과 가림막을 설치해야 합니다, 세라?”

“네, 영주님!”

내 부름에 주민들 속에 섞여 있던 세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곳에 혹 쓸만한 날씨 파편이 있습니까?”

“작은 밭에 쓰는 가랑비 하나와 건조한 바람, 유월의 햇살 이틀 치 정도뿐일 겁니다…, 그 외에는 모두 빼앗겼지요.”

“나뭇잎을 모아 건조한 바람을 먹이시고, 가랑비는 저택에 쏟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대략적인 지시가 모두 끝나자,

그들은 모두 두려움과 긴장감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약하나, 미약한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희망을 품고서.

그 모습이 마치 달이 지배한 밤 속에 빼꼼 고개를 내민 별들과 같아서,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밤을 두 눈으로 품은 채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유희를 위한 노래가 아니었으며.

무법 지역에서 되뇌었던 푸념도, 치기도 아니다.

그래, 디안 베나즈로서 처음으로 내뱉어보는 포부다.

“오랜 시간 베나즈라는 이름은 당신들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하여 서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베나즈의 희생과 이곳을 지킨 당신들의 희생으로 우린 다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기름 먹은 심지가 불씨를 만나듯.

그들의 눈 속에 순간 불꽃이 인다.

“꺾인 깃발은 다시 우뚝 설 것이며, 그것은 사계의 바람을 머금고 쉼 없이 휘날릴 겁니다. 제가 맹세하고 여러분이 그 맹세의 증거가 될 겁니다.”

덩달아 내 마음도 뜨거워졌다.

맥레인, 당신이 내게 부여해준 베나즈의 이름을 위하여.

슥.

낡은 아밍소드를 뽑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광장에는 우렁찬 벼락이 내리쳤다.

현자가 살아있다면, 능히 100년의 재해 속에 넣어도 될 거라 착각해도 될 만큼.

목청으로 빚은 벼락이 말이다.

* * *

테쉬킨은 맹수의 가죽으로 뒤덮인 바위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그 앞에 자신에게 보고를 올리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그들의 흔적이 끊겼다고?”

“리케니엔입니다.”

“배반자의 땅이라…, 과연 두 발 걷는 자들은 이름을 따라 길을 걷는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다시 배신을 일삼는구나.”

머리 양옆으로 흘러내린, 땀으로 젖은 검은색 긴 머리카락.

왼쪽 눈썹 절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흉터를 움찔거리며 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부라리던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늑대 새끼와 같은 작자들에게 소리쳤다.

“리케니엔에 사는 모든 것들은 이 근방의 땅 주인이 누구인지 되새기게 될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적나라한 전라의 모습으로 장정들 사이를 거닐었다.

그런 그가 있었던 바위 위에는,

잔인하게 난자당한 여인들이 여럿 널브러져 있다.

“갑옷을 준비해라, 출정이다!”

테쉬킨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산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그렇게 숲을 빠져나온 그들의 수가 대략 백 명.

그중 말을 탄 자가 스물에 달하였다.

그러한 행렬의 선두.

테쉬킨의 부관으로 보이는 비대한 남자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테쉬킨, 놈들을 치는데 굳이 화약까지 써야 합니까?”

“화약은 공포를 유발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야, 덩달아 이 땅에서 화약에 죽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도 없지.”

“값을 생각하면 낭비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그러나 부관의 마지막 말에,

테쉬킨의 표정이 대번에 맹수의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레만, 잊지 마라. 우린 기사다.”

“제가 잠시 본분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이 땅에 고결한 명예와 명분으로 세워진 기둥과 깃발이 몇 개나 될 것 같나? 정작 세워진 그것들은 대부분 세력에 의한 것들이다.”

테쉬킨은 갈변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배반자 베나즈의 땅속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혹시 모르지, 에르엥의 마지막 단서를 쥐고 있을지.”

“그 말씀은…?”

“그래, 배반자인 마지막 베나즈가 그곳에 0이라도 숨겼을지 누가 알겠느냔 거다. 그럼 우리에게 명예와 명분이 생기는 건 일도 아니지.”

비열한 웃음을 짓던 테쉬킨은 이제 고삐를 잡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뒤따르는 행렬은 그의 꽁지를 한참이나 뛰어 따라야 했다.

그렇게,

도달한 리케니엔은.

조용하다.

다만 마을 저택 쪽엔 추적추적 가랑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망친 걸까요…?”

“배반자라 멸시받는 와중에도 꿋꿋이 이곳을 지키던 벌레들이다, 그런 놈들이 아직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시기에 도망을 친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테쉬킨은 날카로운 코를 움찔거리며 주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놈들은 저택에 있다, 저 가랑비는 날씨 파편이야. 큭큭, 불을 쉽사리 지르지 못하게 수를 쓴 거로군.”

이제 테쉬킨은 한때 기사로서 휘둘렀던 검을 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자루엔,

[78년, 벨랑가르]

[살의를 가진 하늘이 땅에 던진 결정]

중심이 되어 이만한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금방이라도 힘을 드러내려는 듯 푸른 기운을 토해내고 있다.

“쳐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

그의 말이 떨어지자,

기세 좋게 저택을 향해 치닫는 그들에게.

곧 저택은 화답하듯 창 틈새 곳곳에서부터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다섯, 여섯.

아니 일곱 정도가 화살을 맞아 쓰러지고,

저택 주위에 흩뿌려져 있던 낙엽이 그 불화살을 집어먹기 시작하니, 안으로는 가랑비가 쏟아지고.

밖으로는 불 벽이 쳐지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테쉬킨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삐를 잡아 놀려,

거침없이 달려나가.

검을 휘둘렀다.

하늘 일부를 쨌으니 곧 그 안에서 우박이 쏟아지면, 그들은 저택째로 뭉개져 벌레처럼 죽겠지.

그런데 어찌,

하늘은 미동도 하지 않는가?

“테쉬킨님!”

부관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정면으로 떨군 그의 눈앞에,

저택 입구에 우뚝 선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낡은 아밍소드를 살짝 내리는 것만으로.

“억…?!”

테쉬킨은 물론 타고 있던 말까지 땅에 처박아 버렸다.

무엇이?

그래, 이건 틀림없이.

기압.

압도적인 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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