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0화 (120/365)

120화. 불어오는 바람 (3)

지난 3개월간,

맥레인이 내게 건네준 이 0으로부터 이해한 것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무게’

0에 담긴 재해는 일부인 한 줄기 바람조차 셀레어의 전체보다 무거웠으며,

하여 나로서는 검에 실어 휘두르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은 결국엔 앞의 이야기를 고집하였을 때나 만들어지는 결과였을 뿐.

실어 휘두르는 것이 아닌, 단지 흘려보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가능한 영역의 이야기.

그래서 흘렸다.

자루에 담긴 0의 극히 일부분을.

그리고 그 결과는,

보란 듯이 눈앞에 펼쳐졌다.

“끄윽…!”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렸던 사내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내뱉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찌그러진 브레스트 플레이트 위로 입과 코에서 터져 나온 핏물을 닦아내던 그의 얼굴엔,

아직 당황이 짙게 묻어 있다.

나는 그것이 채 옅어지기 전에 달려들었다.

“이…익!!”

이를 악문 채 양손으로 검을 크게 치켜든 놈을 향해, 나는 사선으로 파고들어 어깨로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아 넘어트리곤.

아밍소드의 가드 부분으로 놈의 턱을 휘갈겼다.

퍽!

그러나 턱이 순간 어긋나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내 배를 걷어차곤 자세를 고쳐 일어섰다.

“너…, 그 자루에 담긴 게 대체 뭐냐…!”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내게 이죽거린 남자는 침착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산적의 두목이라고 해도 근본은 기사라 이건가.

굉장히 억센 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검을 살피더니 대번에 다리를 뒤로 물려 자세를 달리했다.

아무래도 내 검이 자신의 갑옷을 뚫지 못할 거란 판단을 내린 것 같은데.

그 판단은 아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런데 고작 그런 낡은 포장지에 감싸놓은 꼴이라니, 참으로 기이한 놈이로구나.”

잡은 자세로 말미암아, 허벅지에 힘을 바짝 준 그가 내게 순식간에 쇄도해왔다.

카각!

이내 서로의 검이 맞부딪히고,

캉!

동시에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역 궤적을 그린 내 검이 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큭!”

그러나 갑옷에 가로막힌 것을 확인한 상대는 다시 깊숙이 발을 내밀어 내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다시 서로의 검이 부딪히기 무섭게,

팍, 팍!

이번엔 놈의 오른쪽 무릎과 왼팔을 차례로 휘둘러 쳤다.

순간 무릎에 충격을 받아 상체를 쏟을 뻔한 상대는 붉게 멍든 턱을 갈라지도록 깨문 채 겨우 자세를 회복했다.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놈이 다루는 스탠스는 적어도 셋 이상이지만,

그 가운데 둘은 그리 숙련된 것이 아니다.

완숙하게 익힌 하나의 스탠스를 이용해 응용하기 편한 두 개의 스탠스를 곁가지 식으로 익힌 것 같은데.

그걸로는 내게 타격을 줄 수 없어.

반대로,

이 아밍소드를 가지고는 놈의 팔다리를 감싸고 있는 갬비슨을 뚫고 신체를 무력화시킬 수가 없다.

중립지역에서 숱하게 상대해왔던 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걸친 갑옷의 질이 무지막지하니,

다른 방법을 이용하는 수밖에.

상대가 다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롱소드를 쥐고 위로 크게 들쳐 올린 그의 동작에 가진 박자를 어그러트리듯 순간 달려든 나는,

상대가 들어 올린 양팔 사이로 팔 하나를 비집어 넣어 놈의 턱을 올리침과 동시에 발로 다리를 걸어 중심을 무너트리고.

그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드러난 겨드랑이에 검의 가드를 찔러넣듯 쑤셨다.

으득.

“끄아아악!!!”

견갑골 쪽이 부러진 건가.

자연스럽게 넘어진 놈 위에 올라탄 형태가 된 나는, 그대로 잡은 자루의 끝에 달린 폼멜로 그의 안면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퍽.

퍽퍽.

퍽!

뭉개진 코, 꺼진 광대.

튀기는 핏방울이 내 뺨을 적시고 나서야 행위를 멈춘 나는,

흰 눈을 부라리며 기절해 있는 상대를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바로 토르킨 루에르 선생께서 가르쳐주신,

게걸스럽게 물어뜯는 늑대 자세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저택을 적시는 가랑비에 얼굴을 씻은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어 밀고 들어오는 놈들을 향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 * *

제법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불길 사이를 헤집고 달려 나왔지만, 코앞에 있는 방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꿰이는 자,

어스름을 두른 채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 있던 내게 좀 더 접근하려다 저택에서 날아온 활에 눈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자.

방패로 진형을 짜고 정문을 통해 천천히 진입하다가 난데없이 날아든 거대한 돌덩이에 나뒹구는 무리.

방금 그건 나도 무척이나 놀란 장면이라 저택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러자 테라스로 뛰쳐나온 한 덩치 큰 사내가 보인다.

마을 주민인 것 같은데 힘이 아주 장사인 것 같네.

“안으로!”

위험에 노출된 그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치자,

그는 퍼뜩 놀란 뱁새 눈으로 날 바라보다 얼른 저택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대략 마흔 정도의 적을 쓰러트렸을 즈음.

상황은 우리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자신들의 두목이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는지, 금세 전의를 상실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겨우 숨을 고르며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보기와 달리 저택 곳곳엔 가랑비에 다 죽어가는 불화살이 셀 수 없이 꽂혀 있었다.

곧 소강이 찾아왔다.

전투는 별안간 소란스럽게 벌어졌지만,

그 끝은 참으로 허무하게 맺어졌다.

주축을 잃은 산적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와해 되겠지.

우두머리를 잃어 무리가 해산된 들개, 그것도 두 발 걷는 자를 물었던 개라면.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고독에 말라 죽을 것이다.

건조를 집어먹은 낙엽이 이어서 모두 전소하고 나자, 잿빛 연기 너머로 마을 곳곳에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일말의 악의를 발휘한 건가,

개 같은 산적 놈들.

얼마 안 가 저택 안쪽에서 바돈의 우렁찬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다들 불을 끄시오! 얼른!”

우르르.

저택 안쪽에서 튀어나온 마을 주민들이 우물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들러붙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나도 어느새 그들 사이에 껴들어 불을 끄는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후 모든 상황이 다 끝나고.

마을 곳곳이 불에 탔음에도,

몇몇이 화살에 맞아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광장에 서 있는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뜨거운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기다려왔던 걸까.

오명이 붙은 이 땅에,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고 믿어왔던 승리를.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내 행동을 따라 했다.

이윽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해산한 그들 사이로,

바돈이 내게 다가왔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승리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앞으로는 많은 게 바뀔 겁니다, 바돈.”

그를 위로하고자 던진 말에,

바돈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 숙여 즉답했다.

“베나즈의 이름으로서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참, 바돈. 이곳에 쓸만한 감옥이 있습니까?”

“하나뿐이지만 충분히 견고합니다.”

“잠시 저 좀 도와주십시오.”

바돈을 데리고 저택 앞으로 가자 그곳에 미동도 하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테쉬킨…!”

바돈이 이를 갈며 넝마가 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바돈의 반응을 뒤로 한 채, 놈의 팔을 목에 걸어 들쳐 올렸다.

이어 바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급히 나를 거들어 반대편 피범벅이 된 겨드랑이 쪽으로 머리를 쑤셔 넣었다.

“이 극악무도한 놈은 어찌…? 과거에 기사였다곤 해도 지금은 산적에 불과한 자이니 배당금을 받을 곳도 없을 겁니다…!”

“아니, 바돈. 그는 이 땅에 아주 좋은 거름이 될 겁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 * *

다음 날이 밝기 무섭게,

나는 테쉬킨에게서 빼앗은 검을 들고 감옥에 갇힌 그를 찾아갔다.

그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곤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이건 네가 섬겼던 가문으로부터 받은 것이냐.”

“그냥 죽여라.”

“그래, 죽일 거다.”

내 즉답에 테쉬킨은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다만 너도 알다시피 인챈트라는 것은 본디 주인이 죽으면 덧없어지는 것이지, 그러나 반대로 주인의 의지만 있다면 인챈트는 다음 사용자에게 전승될 수도 있다.”

그래, 말 그대로.

인챈트라는 것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소멸할 수도, 또 소멸하지 않고 남아 다음 사용자에 의해 명맥이 이어질 수도 있다.

맥레인이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것처럼.

토르킨 선생께서 이 부분을 내게 가르치면서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지.

하루에도 수십 날씨가 지고, 수백 날씨가 전승된다고.

“배반자의 종자 놈 주제에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 땅이 베나즈라는 이름을 인정할 것 같으냐?”

“시험해봐야겠지, 적어도 이 땅은 아직 베나즈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이…씨발…!”

“산적 테쉬킨. 너의 뜻은 잘 알았다.”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들고 있던 검을 저 멀리 내던져버렸다.

이에 테쉬킨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없는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집행은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이뤄질 것이다.”

나는 그대로 그를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온갖 욕지거리가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그저 사형자의 뒤늦은 탄식 섞인 울음소리였을 뿐이었다.

* * *

저택 수리가 한창인 와중,

바돈과 세라 부부와 함께 제법 시끄러운 점심 식사를 끝낸 뒤, 나는 바돈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바돈, 이 마을에서 말을 가장 잘 타는 자가 누굽니까?”

“사냥꾼 할리가 가장 잘 탈 겁니다.”

“그럼 지금 바로 그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바돈은 쏜살같이 저택을 빠져나갔다.

직후 집무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돈이 젊은 청년 하나를 데리고 내게 찾아왔다.

금발 곱슬머리를 한 청년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만나뵙… 아니 저를 보고싶… 아니 어쨌든 영광입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올린 그에게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말을 잘 탄다고 들었습니다.”

“어찌 존대… 아니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할리, 당신에게 아주 귀중한 일을 맡겨보려 합니다.”

할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겨우 내게 대답했다.

“넵…!”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리케니엔에서 산적 두목 테쉬킨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퍼트리십시오.”

이 일대 공동의 적을 잡았으니, 이걸 시작으로 지역에 유대를 걸쳐 볼까 한다.

그래, 테쉬킨의 처형은 곧 리케니엔의 성장에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내 말을 들은 할리는 곧바로 안장에 올라탈 기세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집행 당일.

불구대천의 원수가 처형된다는 소식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리케니엔을 찾았다.

그 수가 어림잡아도 백이 훌쩍 넘어,

그만큼 산적들이 끼친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반증해 주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몇 마을의 대표자들은 내게 찾아와 감사의 표시로 재물이나 기타 마을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대로,

배반자의 땅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며 선 긋는 내용이 적힌 서신만을 보낸 마을들도 있었다.

덕분에,

판가름이 수월해졌어.

존중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값싸면서도 귀한 화폐이다.

내가 내민 존중에 화답하여 직접 이곳에 찾아온 마을의 대표자들은 비교적 싼 값으로 유대를 손에 넣은 것이고,

반대로 선을 그은 그들은 정작 내 존중이 필요로 할 때,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바돈이 정리한 이번 전투에서 수거한 물품 목록을 살피던 나는, 곧 밖에서 들려오는 환희에 찬 함성에 햇살이 들어오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행이 끝났다.

돌아온 베나즈의 이름으로 진행된 공식적인 첫 행사가 끝이 난 것이다.

곧,

바돈이 나를 찾아왔다.

“가문의 오랜 친구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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