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1화 (121/365)

121화. 양자택일

리케니엔의 저택.

그 가운데 가장 넓은 1층의 홀은 방금 막 안으로 들어온 자들로 금세 북적였다.

일렁이는 불꽃을 머금은 벽난로.

그 앞으로 검게 칠해진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네 사람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조이.”

“저희가 많이 늦었습니다.”

“그리 늦은 것도 아닙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갑옷을 차려입은 조이는 옆구리에 벗은 투구를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 옆엔 마찬가지로 갑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베르융님.”

내 말에 그는 특유의 우직하고 강인한 턱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고맙소.”

“무엇이 말입니까?”

“전부다.”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자 그는 대번에 나를 잡아당기더니 팔을 맞대곤 고개 숙였다.

그리고 다음은 모자 관계로 보이는 여인과 내 또래로 보이는 청년에게 다가가자,

베르융은 그들 앞에 나서서 대신 소개했다.

“이쪽은 제 안사람인 아네즈 오르테입니다, 그리고…,”

“저는 베르긴 오르테라고 합니다, 영주님.”

청년은 베르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발 앞서 나가며 본인을 소개했다.

갈색 곱슬머리에 질끈 묶은 꽁지머리가 인상적인 그는 확실히 베르융의 우직한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아네즈 그리고 베르긴.”

나와는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올곧게 자라온 사람 같아, 베르긴은 말이야.

“리케니엔에 산적들이 들이닥쳤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조이는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 짧은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베나즈 가문의 사람이 되었군요, 디안. 당신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든든하다.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함께 한다는 건.

* * *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의 열기도 한층 가라앉았다.

덕분에 나는 고요함을 즐기며 쌓여 있는 문서들을 차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 내 옆에서 바돈은 쉼 없이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직 승리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바돈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곧 저녁 만찬이니 오늘은 이쯤 하시지요. 나머지는 제가 다 정리해놓겠습니다.”

“아니, 바돈도 오늘은 이쯤 하세요. 늦게까지 붙잡는다 한들 하루 만에 정리될 양도 아니잖습니까.”

그 말대로,

오늘 리케니엔을 찾아와 눈도장을 찍고 간 마을 대표를 비롯하여 그들이 가져온 선물의 양은 꽤 대단했다.

당장 그 분량을 문서화 하는 작업조차 겨우 막 마친 수준이건만,

마을 복구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과 피해 규모까지 헤아려야 하는 상황이라 행정적으로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마 내일도 종일 이 서류를 붙잡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어제 전투로 인해 검의 가드가 헐거워졌었지.

자기 전에 짬을 내서라도 정비를 해둬야겠어.

“바돈, 같이 내려갑시다.”

보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돈은 마지못해 따라 일어섰다.

“혹 제게서 거리끼는 것이 있기라도 합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될 저녁 만찬에 제가 어찌 감히…,”

“재회의 기쁨이 뭐 귀한 것이라도 된답니까, 더군다나 오늘 만찬에 올라올 재회의 주체는 제가 아니라 이 땅입니다. 정확히는 이 땅에 서려 있는 베나즈라는 이름이지요.”

“그 말을 들으니 슬퍼집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제가 섬기는 이는 그 베나즈의 이름을 가진 디안님이니까요. 스스로 자격이 미흡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돈은 옷매무새를 고치며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디안님은 맥레인님과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같이 피 흘린 듯 보이는 그런 모습이 말입니다.”

솔직히 바돈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욱 깊고 날카로운 사람이었구나.

“갑시다, 바돈.”

“예, 영주님.”

바돈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저택에 내려가자 바돈의 아내인 세라와 마을의 사냥꾼 할리.

그리고 베르융 일가와 조이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바돈이 조심스레 내게 귓속말했다.

“할리가 어찌 저 자리에…?”

“이번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녁 만찬에 초청했습니다.”

“제게도 말씀해주셨으면 방금 그 궁상을 보여드리지도 않았을 텐데요…,”

“바돈 말고도 믿을만한 가신이 한 분 더 계셨기에 그분께 부탁드렸습니다.”

내 말에 바돈이 세라를 흘깃거린다,

그 흘김에 세라는 새침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 *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격식 같은 것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말을 들은 베르융은 손에 닭 뼈를 든 채로 답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지금껏 작은 밭을 일구며 살아온 터라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분명 리케니엔의 부흥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에 점잖게 앉아 있던 베르긴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지금부터 제 가문은 리케니엔의 기사로서 이 땅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이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조이 역시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내일부터는 제가 행정 쪽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노련한 바돈과 함께라면 기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토대를 마련하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그리곤 과일주를 마시며 날 흘겨보던 조이는,

“방금까지도 문서에 한바탕 시달리신 것 같은데.”

히죽 웃으며 날 꿰뚫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억지로 글씨를 씹은 눈꺼풀은 대게 졸려 죽기 직전인 사람의 것처럼 변하거든요.”

아하.

“지금 제 눈이 그런 모습입니까?”

“아니요, 장난이었습니다. 그저 정황상 그럴 줄 알고 떠본 것뿐이지요.”

풉.

하고 옆에 있던 바돈이 겨우 튀어나오는 웃음을 틀어막는다.

이에 세라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 눈치를 보며 안간힘을 쓰듯 웃음을 참았다.

반대로 베르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표정으로 날 우러러보고 있었고.

베르융은 그저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일련의 펼쳐진 상황들이 참으로,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술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다른 마을에서 받은 귀한 가죽 가운데 몇 개를 골라 할리에게 하사했다.

할리는 구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을 나섰고,

그렇게 베르융 일가 역시 내일 일찍부터 집을 짓기 위해 자리를 떠나자.

자연스레 나와 조이, 그리고 바돈만이 자리에 남았다.

조이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내 내가 앉아 있던 자리 뒤편에 세워두었던 아밍소드를 조심스레 집어 들곤.

취기 오른 얼굴로 제법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드를 이리저리 흔들곤 품에서 억센 끈을 꺼내 정비하기 시작했다.

“조이, 제가 하겠습니다.”

“당장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맥레인이 꿈에 나타나 날 두들겨 팰지도 모릅니다.”

음, 내 직접 겪어봐서 더 잘 알지.

그의 말에 덩달아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조용히 검을 정비하는 조이를 바라보았다.

“0이 이제 두 재해를 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시작이 본궤도에 올랐음을 의미합니다.”

조이는,

검을 정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심스레 이 자리에서 묻겠습니다. 디안, 디안 베나즈님.”

가드를 단단히 고정하던 그의 손이 멈춘다.

“토르킨 선생께 가르침을 받은 지금,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맥레인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에 그가 다시 묻는다.

“그 길은 많이 험난할 겁니다.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시 답했다.

“이미 그것은 내 삶 가운데 너무나 익숙한 것입니다.”

내 확고함을,

조이는 확인했을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드를 간단히 정비한 뒤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내게 올렸다.

* * *

“리케니엔에 비축한 곡식의 분량으론 수확까지 버티기엔 빠듯한 것 같군.”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조이님?”

“우리에겐 늘 명분이라는 게 있지, 과거에 이 땅 모두가 우리를 명분 삼아 소모 시켜준 덕분에 말이야.”

“혹, 전쟁을 준비하는 겁니까?”

“그건 아무래도 나중의 일이 될 것 같군. 지금은 리케니엔 인근 지역의 서열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인재 역시 턱없이 부족하니 그 부분도 충족시켜야만 하고.”

“서열의 재정립이라 하시면 그것이 전쟁 아닙니까?”

“때로는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네.”

밖에서 바쁘게 오가는 조이와 바돈의 목소리가 들려와.

덩달아 잠자리에서 깬 나는 버릇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햇살 한 줄기 보이지 않는 푸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서나,

왈칵.

문이 열리며 조이와 바돈이 들어왔다.

“아직 주무시고 계…!”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급한 안건이 있습니다.”

당황하는 바돈과 달리 조이는 냉철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내게 건넸다.

“그게 뭡니까?”

“리케니엔이 속해있는 땅, 빌비온의 지도입니다.”

그에게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펼치자, 누워 있는 물방울 모양을 한 지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 가운데 물방울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부위에,

조그맣게 표시된 영역 안에 적혀있는 건 리케니엔이었다.

그리고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엔 광활하게 표시된 두 영역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형태로 있다.

하나는 ‘발기지르’

다른 하나는 ‘켄타나’

“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두 깃발이 바로 빌비온의 실권자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넘어서야 할 거목이기도 하지요.”

이어서 리케니엔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조이가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리케니엔은 빌비온의 ‘검은 구역’에 해당하는 곳에 있습니다. 검은 구역은 저 두 깃발의 자치령에서 벗어난 곳을 의미합니다.”

“어찌 이 부분의 땅은 그들이 간섭하지 않는 겁니까?”

“빌비온의 서쪽 경계선에 작은 왕관을 쓴 귀 큰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아주 높을 겁니다.”

“그래서, 하고자 하려는 말씀이 뭡니까?”

“주변 땅을 정돈하고 서쪽의 귀 큰 자와 접촉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해야 할 게 많습니다. 우리를 후원해줄 기업도 필요할 것이고,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어줄 여러 조합도 들이며 덩치를 불려야 할 것입니다.”

조이는 눈을 반짝이며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가다,

결국엔 제풀에 지쳐 크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그리곤 자신이 너무 열성적이었음을 알아차리곤 제법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조이, 천천히 합시다. 만들 탑의 높이를 구했다고 꼭대기부터 만들진 못하니까요.”

“제가 너무 급했습니다.”

“하지만 급했던 만큼의 정보였다는 건 확실하군요.”

말 그대로,

지도를 보는 순간 실감했어.

이 땅에서 시작될 이야기가 본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을.

“조이, 어찌 되었든 우리의 다음 목표는 정해진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다음 목표는,

리케니엔을 중심으로 몸집을 불리는 것.

* * *

탑의 주무름에 유유히 옮겨 다니는 구름처럼.

참으로 느긋하게 움직이는 말 위로 여인 하나가 고삐를 잡고 있다.

그런 여인의 뒤로는.

조랑말을 탄 난쟁이 수십이 대열을 갖춘 채 따르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

여인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품에서 고이 접어둔 편지를 꺼내 다시 펼쳐 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편지에 적힌 필체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

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이른 나이에 상인 조합의 대표 자리에 오른 그녀에게,

그 길을 제시해주었던 자에게서 온 편지의 내용은.

너무나 흥미로운 것이었으니까.

[태풍이 돌아왔으니, 그 태풍의 벼락이 되고 바람이 되길 꿈꾸던 자들이여.

또 허무하게 지게 될지언정 화려하게 필 각오가 된 자들이여.

걸음을 옮기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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