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2화 (122/365)

122화. 양자택일 (2)

선생께서 편지를 보내시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이 편지를 받은 여인 역시 처음으로 받아보는 것이었으니까.

토르킨 루에르의 28번째 제자이자 작품인 그녀는 약간의 설렘을 안은 표정으로 편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시기상으로 편지에 해당하는 인물은 29기수에 해당하는 것이 확실한 데…,

“고작 2년이란 시간 만에 또 다른 제자를 양성하신 건가? 아니지, 그보다 29기수는 더 빨리 하산했을지도 몰라.”

애초에 이 편지가 왔다는 것은,

‘그릇’에 해당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하니.

적어도 어느 부분으로든 출중한 면모를 가진 존재임이 틀림없다.

“여러모로 대단한 후배님이 나타나셨군…?”

여인은 얇지만 탐스러운 입술을 슬쩍 포개며 특유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선생의 제자 가운데 아직 묵묵히 길을 걷는 중인 자들에게만 갔겠지.

그들 가운데 편지의 내용을 쫓는 이가 몇이나 될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여인은 잠시 잡고 있던 고삐를 놓곤 고급스러운 벨벳 주머니에서 금박 입힌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나뭇잎의 그림자로 빻은 햇살 가루로 가장 수준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날씨 파편이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터라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 사이론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곧 유리병을 열어 길게 늘어트린 자신의 금발에 흩뿌리자,

숲 바닥에 떨어진 햇살과 같이 그녀의 고운 머릿결 군데군데에서 화한 빛깔이 휘날렸다.

이내 추위에 살짝 상기된 두 뺨이 따스함에 녹아 뽀얀 살구색으로 돌아오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입김마저 멎자.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난쟁이 무리에게 말했다.

“일정을 좀 바꿔야겠어.”

너무 궁금하잖아, 그 대단하신 후배님이.

“아빌로의 영주가 무려 넉 달이나 기다려왔던 자리입니다.”

“넉 달 동안 발휘한 인내심이라면 다섯 달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하지만…,”

“라자딜르, 우리 조합이 내세우는 가언이 뭐지?”

여인의 말에 난쟁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모두 허리를 숙였다.

“대가 없는 시간은 없다.”

단 안경을 걸친 난쟁이의 즉답에 여인은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빌로의 영주는 기다린 값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테니 이번 약속이 어그러진다 한들 그렇게 기분 나빠하진 않을 거야.”

“허면…, 어디로 가십니까 스페라님?”

“고독한 땅에 있는 리케니엔이라는 곳이다.”

금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정숙하고 훤칠한 여인, 스페라.

그녀는 그리 말하곤 고삐를 잡아 다시 말을 끌었다.

편지에 적힌 이가 가진 그릇은 과연,

얼마나 넓고 깊을지.

능히 그 안에 자신을 포용해낼 만큼의 인재일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어서.

* * *

“이제 디안님은 명색이 기사단의 수장이시니 그에 상응하는 훌륭한 갑주가 필요합니다.”

조이는 끼고 있던 얇은 나무 테 안경을 벗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열거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갑주를 마련해야 비로소 주민을 포함해 마주치는 대중 모두가 디안님을 기사로 인식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조이. 그보다는 리케니엔에 산재 되어있는 문제를 처리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리 말씀하셔도 저는 제게 주어진 일만을 쫓을 뿐입니다. 리케니엔의 사정은 이미 베르융이 헤아리고 있으니 곧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테죠.”

조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깃 달린 펜을 흔들며 고심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디 땅과 땅을 연결 짓는 수단으로는 혼약이 가장 좋습니다만, 0의 주인이신 디안님이라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집니다. 바로 재해들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그 세를 늘릴 수 있으니까요.”

“조이,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다 따라오실 수 있을 만큼 디안님은 총명하신 분이잖습니까.”

몰랐는데,

아니 모를 수밖에 없지.

중립지역에서도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으니까.

내가 알던 것과는 달리 조이는 뭔가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 같다.

문제는 뭘 끼얹어도 그 열정이 식지 않는다는 거고.

하지만 나쁘지 않아.

그의 열정은 끝 겨울을 완연한 봄으로 바꿀 만큼 뜨거웠으니까.

“인챈트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과 접점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선 가장 이상적인 일일 겁니다. 일단 리케니엔에는 수로 공사가 절실할뿐더러, 디안님의 갑옷을 만들 대금 또한 지원해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갑옷이 그리 비쌉니까?”

“비싸지기로 마음먹으면 한도 끝도 없이 비싸지는 게 바로 갑옷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더더욱 우선순위에서 배제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삽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디안님?”

콧수염을 휘날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조이를 뒤로 한 채, 나는 한참 공사 중인 부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그곳에 있던 베르융이 대번에 달려 나와 내게 인사했다.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훤히 드러낸 베르융의 상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바위처럼 단단해 보인다.

더군다나 그러한 바위 곳곳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는, 보는 것만으로도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리케니엔에는 늘 일손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나는 반쯤 파놓은 집터 구덩이에 뛰어들어가 삽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베르긴이 쏜살같이 내 옆에 붙어 같이 삽질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융은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 더욱 기합을 넣어 주위에 일하는 주민들을 뜨겁게 달궜다.

“조이, 뭐합니까?”

“예?”

“삽질하세요.”

“…,”

“장난입니다.”

어제의 농담을 되돌려주며 슬쩍 인사하자, 그는 미소를 띠며 군말 없이 삽을 들었다.

* * *

추위가 무색하게 회색 린넨셔츠가 땀으로 다 젖었다.

온몸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반대로 집터는 반듯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제 베르융은 그 구덩이에다가 나선형의 특이한 모양을 한 씨앗을 흩뿌린다.

“그게 뭡니까?”

내 물음에 베르긴이 대신 답했다.

“귀 큰 자들의 건축법입니다. 집의 뿌리를 심는 것이지요. 저것이 자라 나무 바닥재와 결합하면 탑의 웬만한 재해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진답니다.”

“그것 참 놀랍군요.”

“타인의 환경만큼이나 낯설고 새로운 것도 없지요. 반대로 저도 디안님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제게서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디안님을 볼 때마다 오르테 가문이 다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요.”

베르긴이 올곧고 강인한 눈동자로 날 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이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쓰임의 순간이 왔을 때, 전 누구보다 단호하고 간결하게 휘둘려질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고 쓰겠습니다. 오르테의 젊은 검을요.”

베르긴은 멍한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그 우직한 얼굴에 제법 잘 어울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슬슬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다.

바돈의 보고도 받을 겸, 돌아가야겠어.

“베르긴, 저택에 좀 다녀와야겠다. 주민들에게 줄 삯을 그곳에 두고 왔거든.”

“예, 아버지.”

마침 베르긴도 저택에 들러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같이 가죠, 베르긴.”

“좋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나란히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바돈?”

“영주님!”

바돈은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 겨우 멈추곤 몇 번이고 숨을 고르고 난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외지에서 온 이방인이 영주님을 만나 뵙길 원합니다…!”

“누가 절 찾아왔답니까?”

순간 프랑쿠아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뭔가에 시달린 듯한 바돈의 인상을 보니 그쪽 사람들은 아닌 것 같네.

애초에 프랑쿠아의 기사들은 내 행방에 대해 아는 게 없을 테니 콕 찍어 이곳을 찾아올 수가 없다.

“그게…, 대뜸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영주님을 만나야겠다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저택 안으로 안내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금방 가겠지 했는데…, 보기에 불안한 오기를 부리며 계속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내 말에 바돈이 다시 앞장서 달려갔다.

“무례하군요, 그 이방인 말입니다.”

베르긴은 불상의 이방인이 행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혹, 근방에서 흘러들어온 첩자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라면 고작 산적 무리를 퇴치했다는 마을에 행정력을 낭비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첩자라면 그렇게 대놓고 행동하겠습니까?”

베르긴은 내 의견을 듣곤 금세 수긍해야만 했다.

결정적으로…,

이 거대한 땅에서 베나즈의 이름은 아직 배반자의 낙인이 찍혀 있는, 지금은 썩어 없어지기 직전인 낙엽과도 같은 것이다.

당장 베나즈의 적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신경에 작금의 리케니엔은 상정조차 못 되는 것이 현실이야.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저들이 떨군 그 낙엽이 퇴비가 되어 새로운 뿌리의 양식이 될 테니까.

그렇게 저택에 도착하자 바돈이 대뜸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래도 리케니엔의 공식적인 첫 대면이니 말끔한 모습으로 나서야지요!”

그게 좋겠다.

나와 바돈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베르긴은,

“그럼 저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녀오겠습니다.”

내게 인사하곤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 * *

생각보다.

기반이 형편없네.

그만큼 이 땅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하다는 말이겠지.

말을 타고 리케니엔에 인접한 순간부터 스페라는 봄꽃 묻은 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이렇다 할 벽도, 제대로 된 수로조차 구축되지 못한 작디작은 마을의 냄새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남루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명마와 그 위에 올라탄 스페라의 모습은 주위의 모든 시선을 강탈할 만큼 특별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조랑말을 탄 두 난쟁이의 모습은 적어도 이곳에선 이질적인 광경이기도 하니까.

이윽고 스페라는 말을 타고 마을 주변을 유유자적 돌아다니길 반복하다가 그나마 큰 규모의 저택을 발견하곤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마을 곳곳이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걸 보면,

이곳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나 본데.

뚜렷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이곳을 거점 삼은 것 치곤, 찬탈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한 건가?

진정 이곳에 그만한 그릇을 가진 이가 있는 게 맞는 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린 그녀가 감색 가죽 부츠를 번뜩이며 성큼성큼 저택 정문으로 향하자.

안에서 멀끔한 중년 남성이 달려 나왔다.

“이곳은 베나즈 가문의 영지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는 포개어진 손 조합의 수장, 스페라입니다. 이곳의 영주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오늘 어떤 방문이 있을 거란 말씀이 없으셨는데…,”

“아, 미리 약속된 것은 아닙니다.”

이곳까진 포개어진 손 조합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모양이구나.

스페라는 내심 숱한 자들에게 받아 왔던 극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영주님은 안에 계십니까?”

“집터 공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뭐?

땅 파러 밖에 나가 있다는 거야?

“그럼 전해주시지요, 방문객이 왔다고요. 아주 귀한.”

“약속되지 않은 일정을 영주님께 강요하실 순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죠.”

“잠…!”

순식간에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민 스페라의 뒤로, 중년 남자는 당황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택 내부는 제법,

고풍스러웠지만, 너무나 단출하기 그지없어 눈동자 몇 번만 굴리면 모든 장식품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투박한 홀에 마련된 의자 하나를 골라잡고 앉은 그녀는 이제 팔자 좋게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곤 여유로운 모습으로 영주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눈치를 보던 중년 여인이 건넨 한 잔의 차를 대접받았음에도, 한 모금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길 몇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스페라의 둥글고 어여쁘게 솟은 이마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무례하고,

경우가 없는.

저들의 작태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때,

벌컥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저 사람이 바로…,

“반갑네, 후배님.”

차갑게 쏘아붙이듯, 흙으로 범벅이 된 장신의 남자에게 말을 거는 스페라에게.

반응하듯 고개를 돌린 남자는,

마치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이런 무례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따지려는 찰나.

다시 한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제야 또 다른 남자 하나가 스페라의 맞은편에 다가섰다.

별도 제 말하면 빛난다더니.

저자야말로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릇이로구나.

겨우 화를 식힌 스페라는 이윽고 마주한 남자를 두 눈에 담았다.

우워어…,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선 채 굳어버렸다.

진짜 별이 서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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