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양자택일 (3)
“디안 베나즈입니다.”
“스페라에요.”
뭐랄까.
그녀는 화려한 온실 속을 대표하는 한 송이 꽃 같았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 핀 것이 아닌, 스스로 엄선된 햇살을 골라 받아가며 장대하게 핀 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갈색빛 가는 눈썹에 짙게 실린 당당함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또 그녀는 아름다웠다.
누가 봐도 호감부터 느낄 수밖에 없는 화려한 외모야.
홍채는 구름 묻은 달빛처럼 은은한 잿빛인데 동공은 또 밤처럼 어두운색을 가지고 있어 속내를 쉬이 알 수 없다.
그런 오묘한 눈동자를 가둔 날카로운 눈매로 빚어낸 눈빛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이런 자가 의도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상대를 구슬리기 시작한다면 아마 헤어 나오기 힘들겠지.
그녀는 길게 늘어트린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흑색 짧은 스커트가 딸린 고삐 드레스, 아래로는 감색 부츠와 흰 승마 바지.
이 근방에선 보기 힘든,
도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복색 또한 신기해 보일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중립지역에선 저런 복장을 더러 본 기억이 있었는데.
정말 이 땅을 밟은 횟수만큼 예전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씁쓸하네.
“우선 이 부분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무슨 연유로 이곳을 찾아오신 건지요?”
내 질문에 스페라는 재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정돈하곤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히 별다른 이유 없이 제가 이런 곳을 찾아올 일은 없겠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확고한 이유가 있기에 제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고요.”
그녀는 등받이에 상체를 눕힌 채 편안한 자세로 말을 이어갔다.
“아주 특별한 편지를 하나 받았어요, 우리 후배님이 주인공인 편지를요.”
후배?
편지?
“혹, 마이스터 토르킨 루에르님의 제자십니까?”
“바로 아시네요, 그래요. 당신 이전에 내가 그분 밑에 있었죠.”
그녀에게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래, 막연히 처음 안 동문 선배를 마주했을 때나 느낄만한 그런 껍데기에 가까운 동질감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반가운 것은 진짜여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려야겠군요.”
내 행동에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슬쩍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편지는 또 무슨 얘기입니까?”
“그건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후배님. 지금은 서로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 만이 중요할 뿐이니까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며 이해 못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말했다.
“세상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연속된 관계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연속된 관계가 아닌 반복된 관계 속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이런 반복된 관계를 타파할 ‘연’이라는 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랍니다.”
“그 말씀 하신 연이라는 건…,”
“지금 같은 경우는 학연이 되겠네요, 동문 후배님.”
스페라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은근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 보듯 살폈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좋은 부분을 보신 것이고, 하여 제자들 가운데 아직 종착지를 찾지 못한 이에게 이정표를 제시한 거예요. 당신이라는 이정표 말이에요.”
토르킨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를 이정표로 제시했단 말인가.
되려 그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부터 느껴지는 것만 같네.
“그분께 어떤 철학을 선물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 나는 아직 디안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이 내게 말해 줄 차례에요.”
스페라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내가 말하길 기다렸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담담히 말했다.
“우선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관계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그 말에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스페라.
나는 그런 그녀를 관통하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연속된 관계는 분명 말씀하신 대로 대단한 이점이 있겠습니다만 제겐 그것이 되려 단점에 속합니다.”
“단점? 대체 무엇이?”
“저는 반복된 관계 속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야만 하니까요.”
“아니, 대체 왜?!”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즉답에 스페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반복된 관계 속을 돌고 돌아 그 쳇바퀴의 크기를 가늠해야만 합니다. 또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큼 움직여야 이 쳇바퀴가 도는지, 걸려 멈추는 부분은 없는지 모두 다 알아야 하지요.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선배님,
제 부족한 말뜻을 이해하셨습니까.
* * *
결국엔 자신이 헤아릴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발을 들이밀라 이거잖아?
이런 자들을 몇 본적이 있어.
그리고 그런 자들 대부분이,
군주의 자리에 있는 자였지.
크다,
그릇이.
어디 얼마나 대담한지 조금 더 떠볼까.
“유감이네요, 후배님. 저와는 가는 길이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작은 이정표 하나 들여다 봐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배님.”
어쭈.
“나중에 조합이 필요할 일이 있으시다면 포개어진 손을 찾아주세요, 도시 대부분에 분포되어 있으니까요. 후배님.”
이쯤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슬쩍 드러내 보자.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대금을 당장 치를 형편은 못되지만, 이자까지 합쳐서 확실하게 갚아드리겠습니다.”
뭐 하자는 거야?
방금 한 말과 전혀 다른 행동…,
아니야,
저건 선을 긋고 있는 거다.
이러면 더는 못 참지!
노골적으로 상승세를 그리려는 품목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건 조합의 대표로서 실격이잖아?
“리케니엔의 영지 가운데 2할을 봉토로 하사해주시지요, 후배님. 그곳에 포개어진 손의 부지를 설립하겠습니다.”
“선배님?”
깜짝 놀란 표정 짓지 마, 이 요망한 녀석 같으니.
“앞으로 잘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계산이 굉장히 철저해서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빼기를 넣어버리는 사람이거든요.”
뭔가 눈뜨고 코 베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게 처음으로 생긴 후배님이라서 그런 걸까.
건방진데 귀여운 구석이 있어.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엇…!”
대뜸 디안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내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어 왔다.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흙냄새가 이렇게나 좋았나.
그의 몸에서 나는 오묘한 향기 때문에 그런가.
멀뚱멀뚱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추후 봉토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가 먼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럽시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뺨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획 돌린 나는 도망치듯 저택을 나와야만 했다.
밖은 어느새 그의 눈동자를 닮은 밤이 펼쳐져 있었다.
“스페라님, 대화는 잘 나누셨는지요…?”
“라자딜르, 어쩌면 빌비온을 시작으로 아이베리아 내륙에 거대한 사업이 전개될지도 모르겠어.”
“세상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란 말입니까? 하긴…, 마을 주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챈트를 가진 산적들을 이곳의 영주가 거의 단신으로 개박살을 내놨다고 하더군요, 과연 스페라님의 동문이십니다.”
라자딜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찬탈은 무슨…,
디안 베나즈는 리케니엔을 지키는 방법으로 거머쥐었구나.
“가자 라자딜르. 큰 구름을 불러, 조금 쉬고 싶네.”
“알겠습니다.”
* * *
조이가 걱정된 얼굴로 내게 한달음에 달려와 물었다.
“디안님, 어떻게 된 겁니까? 웬 이방인이 찾아 왔다고 들었습니다.”
“조이.”
“예, 무슨 일입니까!”
“학연이란 거, 굉장히 대단한 거였네요.”
멍한 표정으로 말하는 내 모습에 조이는 고개를 더욱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은 참으로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구름을 용골 삼아 건조된 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리케니엔 절반을 그림자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며 리케니엔의 한 편에 건조되기 시작한 난쟁이들의 조합은 신세계 일부를 엿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리케니엔을 전반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줄 날씨 파편 보관소를 비롯해 여러 물자가 쏟아져 나오니 구경나온 주민들 역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찬가지로 저택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나란히 기대어 서 있는 조이와 눈을 마주치며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리케니엔의 정비는 곧 끝이 나겠군요.”
“예, 조이. 슬슬 다른 것에 집중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깃발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일대를 휘어잡아야 합니다.”
내 말에 조이는 기다려온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말없이 내게 고개 숙였다.
사실 포개어진 손이 내 영역에 들어온 이상,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되어버렸지만,
반대로 저것을 품음으로써 해결될 일들이 더 많을 테니 부담 없이 안고 갈 수 있다.
직후 리케니엔에 설립된 조합장과 만나고 온 바돈이 받아 온 계약서를 내게 내밀었다.
스페라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야.
그녀는 내게 어떤 형식상의 자리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베나즈 가문의 기사단이 벌어들이는 토지의 1할을 포개어진 손의 부지 설립 용도로 쓰겠다는 내용뿐이다.
말 그대로 그저 길을 걸을 뿐인 자라는 건가.
어쩌면 나도,
베나즈의 이름을 정상 궤도에 올리고 나면.
진정으로 그때가 온다면.
삶의 한 페이지는 그저 길을 걷는 장면으로 채우고 싶구나.
* * *
포개어진 손이 리케니엔에 설립된 지 나흘이 지났다.
비단 난쟁이라서가 아니라, 숙련된 기술자의 위상은 정말이지 낙후된 마을 입장에선 존재 자체가 기적과 같았다.
이마에 뿔 박힌 거대한 소를 몰아 땅을 뒤엎고, 대리석과 철을 섞어 만든 합금을 바닥에 깔아 수로의 기반을 쌓기 시작하니 그 뼈대만으로도 제법 그럴싸한 청사진이 두 눈에 보일 지경이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수로 공사는 더욱 본격화되어 리케니엔 인근 산 하나를 수원지로 지정하여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였다.
산에 물길을 트는 작업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는데,
잘 만든 벼락들을 한 지점에 모아 동시에 풀어 구멍을 뚫어내는 장면은 종일 구경해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다.
난쟁이들 특유의 투박한 방식과 그 투박함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만듦새 간에 차이를 하루하루 체감하기를,
꼬박 열흘이 지났을 때쯤.
기계식으로 꾸려진 공사는 순식간에 끝맺음에 치닫고 있었다.
리케니엔을 관통하는 수로에,
처음에는 흙탕물이 한참 동안 흐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나오니 그날은 주민들의 흥얼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수로가 첫 기능을 개시하였을 시점에,
나는 조이와 베르융을 불러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조이, 베르융. 슬슬 리케니엔이 기지개를 필 때가 왔습니다. 주위에 포진된, 정돈되지 않은 토지를 하나로 묶어 갈무리합시다.”
내 말에 베르융이 곧바로 문제점 하나를 거론했다.
“주위 마을 대부분은 우리 뜻을 따라 함께 하겠지만, 북쪽에 있는 티히트라의 영주 가본은 쉬이 설득당하지 않을 겁니다.”
이에 조이 역시 곧바로 동의하며 말을 덧붙였다.
“티히트라는 빌비온의 ‘검은 구역’ 내에서도 그 세력이 가장 큰 영지입니다.”
리케니엔이 속한 땅 내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라 이건데.
“그렇다면 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할지도 모르겠군요.”
내 말에 베르융이 즉답했다.
“그렇습니다.”
하면.
“아이베리아는 기사의 땅이니, 마땅히 마주한 일을 기사로서 해결해야겠지요.”
근본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내 말에, 조이와 베르융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되돌아온 베나즈 가문의 공식적인 첫 전투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겐 역전을 거듭했으나, 맹세를 지키고자 무관이 되길 자처한 두 명의 기사가 함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