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양자택일 (4)
베르융과 바돈이 다섯 마을을 통폐합해 리케니엔에 귀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잡음은 없었는데, 과연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갑옷을 입은 베르융의 모습이 열 마디 말로 하는 설득보다 더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산적 일당에 의해 극심한 손해를 입은 몇몇 마을은 스스로 구제할 자구책조차 없었기에 이런 리케니엔의 손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베르융과 바돈이 이틀에 걸쳐 움직일 동안,
조이는 보름에 걸쳐 사용한 금액을 정리하여 내게 보고했다.
그 값이 무려 아이베리아의 금화로 31만 개.
물론 이는 순전히 포개어진 손 조합에 진 빚이었다.
거기다 먹을 곡식 또한 부족한 처지라 액수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말 무섭다, 돈이라는 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이는 대번에 알겠다는 듯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명분이란 것은 대부분 피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가진 명분이 외부의 포식에 다 잡아먹히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씁쓸하군요.”
“이제 시작인걸요.”
갑자기 몽글몽글한 꿈속에서 현실로 배출된 것만 같은 기분이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지막까지 저와 베르융이 옆을 지켜드릴 테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그 끝에 가서도 꼿꼿이 서 있을게요, 조이.
“영주님!”
저택 안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세라가 나를 불렀다.
“세라?”
“보여드릴 것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어오는 그녀의 등장에 조이는 말 없이 작게 인사하고 자리를 지켜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세라.”
그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새롭게 관리인으로 고용된 리케니엔 주민 몇이 그녀에게 인사하다가,
그녀 뒤를 따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황급히 허리를 숙여 정수리를 보였다.
“일손이 늘어 요즘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답니다. 마치 예전 베나즈 가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세라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 모든 게 바돈과 세라, 두 분 덕분입니다.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주셨잖습니까.”
“아이고 참, 옛날에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푼수쟁이였답니다. 그래도 메리안님은 이런 저를 이쁘게 봐주셨지요.”
말을 잠시 멈춘 세라는 조심스럽게 날 흘겨보더니 다시 고개를 획 돌리고는 사근사근한 웃음소리를 냈다.
“디안님은 메리안님을 닮은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아마 메리안님이 계셨더라면 디안님을 보고 바깥사람 말고 자길 닮아 다행이라 말씀하셨을 겁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네.
곧 저택 1층, 좁은 복도로 빠져나와 별채 식으로 붙어 있는 방에 도달하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네즈가 우리 둘을 반겼다.
이번에 베르융과 바돈이 함께 움직이는 바람에 두 사람도 부쩍 가까워진 듯 보였다.
그렇게 방 안에 들어선 내게 둘은 난잡하게 어질러진 실과 바늘들을 치우고 돌돌 말린 검은 천을 펼쳐 보인다.
활짝 펼쳐진 검고 거대한 천,
그 중앙엔.
검 한 자루가 백색 실로 수놓아져 있다.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베나즈의 문장이라는 걸.
* * *
늦은 밤까지 조이와 함께 접견실에 틀어박혀 문서를 처리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아침이네, 어제보다 따듯해진 햇살은 내 두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옆에는,
크어억 크어억.
기름진 상태로 뻗친 콧수염을 움찔거리며 최선을 다해 코를 고는 조이가 보인다.
“허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올린 나는 상체를 들어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누군가 밤새 잠들어 있는 내게 덮어준 듯, 어제 세라와 아네즈가 만들어 주었던 깃발이 스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혹여라도 조이가 깰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접견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다 막 복도로 올라오는 낯선 소녀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화들짝 놀란 그녀가 내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니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이번에 저택에 관리인으로 고용된 사람 중 하나겠구나.
광대 위에 흩뿌려진 좁쌀 같은 주근깨에서 그 풋풋함이 느껴지는 앳된 소녀는 이내 자세를 고쳐잡고 나를 지나쳐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복도 위를 걸었다.
벌써 이것저것 가르침을 받은 모양인데,
그녀에게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나 저 소녀나 어제를 열렬히 태웠을 테니까.
1층 홀로 내려가자 방금 막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세라가 보였다.
뒤이어 그녀는 날 발견하곤 곧바로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영주님, 잠자리가 시원치 않았을 텐데 가서 편하게 더 주무시지요. 아직 날이 이릅니다.”
내게 깃발을 덮어준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군.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영주님의 짐을 덜어줄 자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요.”
“지금도 충분히 버틸 만합니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살려줘요.
“참, 새벽에 남편이 전서구를 보냈는데 오늘 해가 제일 높이 뜰 때쯤 이곳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오늘은 느슨하게 보낼 수 있겠어.
삶은 닭고기와 빵을 곁들여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한 나는 저택 밖으로 나와 여유를 만끽했다.
불과 보름.
보름의 시간 동안 리케니엔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가올 올해의 사계는 이전에 겪었던 사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베나즈 가문은 매번 한계에 부딪히게 될 거야.
그리고 매번, 한계를 깨트리기 위해 모두가 달려들 거다.
문득, 마을 전경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열심히 달리기하는 누군가가 보였다.
이미 땀으로 온몸이 젖은 그 남자는 근처 공터에 멈춰 투박하지만 투박하기에 육신이 더없이 고달픈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유의 강인한 눈매와 살짝 솟은 매부리코만 봐도 알 수 있다.
베르긴 오르테.
그를 보는 순간 몸이 근질거렸기 때문일까.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긴은 다가오는 날 보고는 천천히 아래로 휘두르던 쇠몽둥이를 거두곤 인사했다.
“영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베르긴. 리케니엔의 치안은 좀 어떻습니까?”
“마침 어제 보고를 드리려고 방문했었는데, 영주님께서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여 돌아가야만 했었습니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던 건가.
“이렇다 할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다만 슬슬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꾸려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리케니엔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으니까요.”
“그 부분은 베르융님과 함께 고민하고 제게 알려주십시오, 최대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화가 한바탕 끝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을 살피던 베르긴은,
용케도 내 의중을 파악한 듯하면서도.
과연 사내답게 대담히 입을 열었다.
“영주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지요, 베르긴.”
“아버지께 말씀 듣기를, 영주님은 과거 글라디옴이라 불렸던 맥레인님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검술을 배웠으나 세상을 겪어보지 못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합니다. 하여 감히 주제넘게 영주님께 대련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궁금하긴 했어.
비록 베르융님은 아니지만, 그런 베르융님이 잔뜩 투영되어 있을 베르긴의 실력이 말이야.
근래 차분하기만 했던 가슴이 대번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맥레인,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제 피도 당신과 같이 전사의 것이 되었나 봅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다만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검이라 베르긴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베르긴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와 베르긴은 저택 마당으로 이동해 그곳에 비치되어있는 연습용 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대치했다.
“제가 가진 것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입니다.”
이윽고 베르긴이 연습용 롱소드를 양손에 쥔 채 자루 끝을 옆구리에 바짝 붙였다.
이건,
맥레인이 보여주었던 스탠스 중 하나다.
오르테 13번.
아비베오에서 있었던 맥레인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까다로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검의 궤적이 괴이할 정도로 꺾이는 무시무시한 검술이었지 아마.
“그럼, 갑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베르긴이 뒤 축 삼은 발로 땅을 박차 순식간에 내 앞에 치달았다.
그 속도는 전력으로 투구한 돌멩이와 같은 수준이나,
마주한 입장에선 체감되는 속도가 그에 배는 되었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사선으로 비틀자 방금까지 상체가 있었던 곳으로 송곳 같은 은빛 섬광이 들이닥친다.
서로가 취한 첫 동작의 간극은 말 그대로 간발의 차.
과연 오르테 가문의 일원이 연마한 검술답게.
그 숙련도는 맥레인에 버금가는 수준이구나.
그런데 평생 단련해낸 이들의 검술을 그저 한 가지 패로 사용하던 맥레인이 지금은 더더욱 괴물처럼 느껴질 뿐이네.
직후 찌르듯 파고들었던 베르긴의 롱소드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깎이듯 사선으로 비틀어져,
마치 정자세로 사선 베기를 한 것만 같은 위력으로 뚝 떨어져 내 상체를 갈랐다.
엄청난 완력,
연습용 롱소드가 지나친 자리에 바람이 일어 주위에 먼지를 일으킬 정도다.
그러나 베르긴은 아직 자신이 벤 것이 내 잔상이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손목으로부터 감각의 부제를 느끼곤 의식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검을 뻗어온다.
본능을 앞선 육신의 의지.
강하다.
중립지역에서 겨뤄봤던 상대를 통틀어 단연!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의 본편을 슬쩍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야.
나는 허리를 꺾어 베르긴이 내지른 검을 피했다.
그러자 힘이 잔뜩 실려 휘둘려진 검은 아까와 같이 중간에 뚝 멈춰, 자석처럼 나를 향해 궤적을 꺾어 그리며 따라붙는다.
사각이다.
몸으로 피하는 건 불가능해.
카각!
내 검으로 그의 검을 맞받아치자,
그 완력에 내 두 발이 뒤로 슬쩍 밀렸다.
이어지는 대치, 검을 맞대고 서서 서로의 힘을 느끼며 교묘한 심리전에 돌입한 우리 가운데.
먼저 움직인 것은 베르긴.
내 중심을 앞으로 쏟게 만들려는 의중으로 순간 몸을 뒤로 물린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지 못한 수였다.
나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중심을 가다듬고 서 있었으니까.
이제,
흐름의 주도권은 내가 갖고 있다.
솔직히 그와 조금이라도 더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 저릿한 손목으로부터 느껴지는 그의 진심을 저버릴 순 없기에.
연주를 시작했다.
운명의 노래를.
검을 내지르기 무섭게,
캉!
재빨리 쳐내는 베르긴.
그 완력을 반동 삼아 휘청이는 검을 바로잡듯 휘둘렀을 때.
내 검 끝은 정확히 베르긴의 목에 들어서 있었다.
이어지는 정적 속.
“헉…헉…!”
베르긴의 거친 숨소리와,
“후…후….”
슬슬 북받쳐오는 내 숨소리만이 교차한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르긴은 금세 초롱초롱한 눈으로 흥분을 드러냈다.
물론 흥분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베르긴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첫마디를 내뱉었다.
“과연…,”
“베르긴, 참 매섭습니다.”
“영주님의 검은 그 매서움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두려울 지경입니다.”
끝내 서로 짧은 소감을 주고받고 나서야.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내민 검을 거두었다.
* * *
“디안님.”
조이가 윤기 나게 손질한 콧수염을 실룩이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예, 조이.”
“뭔가 오늘은 매우 들떠 보이시는군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런 전환된 기분이라면 리케니엔에 산재 된 여러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가뿐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가 접견실에 해당 문서를 미리 표시해 두었습니다.”
갑자기 올라왔던 기분이 팍 가라앉는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