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양자택일 (5)
뜨거운 발굽이라 불리는 도시, 리디굴람.
위대한 벨로스터 가문의 주성이 있는 이곳은 문화와 명예가 살아 숨 쉬는 곳.
근방의 마상 시합장에선 지금도 낭만을 위시한 두 깃발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으며,
벨로스터 가문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일곱 연합 원정대, 칠라드에선 매일같이 진기한 것들의 영원한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베리아의 중앙 지역 중 남동쪽 일대를 쥐고 있는 벨로스터 가문은 동방의 패권국인 시르아로부터 항상 긴장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적어도 리디굴람은 그런 긴장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곳엔 유서 깊은 건축기업 악시안의 본사가 있었고, 이들이 만든 3중 성벽 솔레아, ‘편자’가 리디굴람 전체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저 솔레아 때문에 긴장이 무뎌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것관 별개로 벨로스터 가문은 아직 충분한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어쩌면 3파전으로 고착된 아이베리아에 이 벨로스터 가문이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야.
그래서 혹하는 마음에 머나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와 봤는데.
어제 또 다른 선택지가 내 앞에 날아들었다.
회색 꽁지깃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리웠던 그 새가 가져온 선택지는,
내게 묘한 이끌림을 주었다.
이제는 세월 속에 풍화되어버린, 배반자란 한 줄로 기록된 땅에 모든 걸 번복하고 뒤엎을 의지가 나타났다니.
누가 봐도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지 않은가?
나는 버릇처럼 이마에 크게 난 흉터를 긁적이며 평생 가지고 가리라 맹세한, 늙은 선생께 받은 철학을 떠올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탐험하는 여행자니 한 번뿐인 여행 다른 여행자의 뒤를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탐험하며 얻은 모든 걸 쏟아내길 요구하는 목적지를 고르라.
그래, 그래.
내가 가진 역량 모두를 시험에 빠트려보고 싶다면, 날아온 이정표가 제격이지 그래.
그렇게 가진 역량으로 모든 시험을 깨부수고 죽기 직전까지 나태해 질란다.
“아, 언제 또 거까지 걸어가냐?”
냄새나는 붉은 더벅머리,
입을 감춘 풍성한 수염.
서른 초반 즈음의 젊은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낡은 지팡이 끝을 돌려 화려한 도시를 등진 채 절뚝절뚝 짝다리로 잘도 걷는다.
마이스터 토르킨 루에르의 스물네 번째 작품이자,
그의 평가상 10에 해당하는 통찰력을 가진 괴짜.
기지어 도.
주어진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그가 거대한 리디굴람의 성문을 지나쳐 다시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
* * *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이 유독 펑퍼짐한 승마용 바지, 조드퍼즈를 입었음에도 걷는 과정에서 풍만한 골반의 굴곡이 옷 바깥으로 살짝살짝 드러난다.
그 아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반짝이는 부츠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거대한 마당을 가로지르며 금발을 휘날리던 여인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난쟁이 앞에 멈춰 섰다.
“라자딜르, 저게 그 합금판이야?”
“예, 말씀하신 대로 가장 수율이 좋은 30번대 합금으로 준비했습니다.”
난쟁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발의 여인, 스페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강철판을 바라보았다.
거치대에 걸려 있는 강철판은 보는 시선을 달리할 때마다 마치 잿빛 안개가 낀 것 같이 기묘하게 반짝인다.
이제 스페라는 자신의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머스킷을 보며 단 안경을 낀 난쟁이, 라자딜르에게 말했다.
“처음은 일반 화약으로 하자고.”
그녀의 말에 라자딜르가 허겁지겁 테이블에 놓인 머스킷 한 자루를 집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스페라는 멀리 걸려 있는 합금판을 향해 사선으로 서더니 그대로 그것을 표적 삼아 조준했다.
우아한 자태에는 한치의 흐드러짐도 없다.
이윽고,
탕!
내리쳐진 공이로부터 불똥이 튀고,
동시에 합금판에서도 불똥이 일었다.
다만 합금판 쪽에 일어난 불똥은 흑색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음은 발렉손의 숨결로.”
이어지는 스페라의 말에 라자딜르가 다음 머스킷을 그녀에게 건넸다.
다시 자세를 잡고,
탕!
내리쳐진 공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연기, 그리고 합금판에 일어난 흑색 불똥.
“아라에니의 열기로 해보자.”
재차 이어지는 스페라의 지시.
또 다른 머스킷을 건넨 라자딜르.
이어서,
타앙!
주홍빛 불똥과 함께 노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역시나 합금판에 검은 불똥이 튀긴다.
사격을 마친 스페라는 책상 위에 머스켓을 내려놓고 천천히 합금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를 뒤로 바로 다음 머스킷을 집으려던 라자딜르는,
늦게나마 상황을 알아차리곤 후다닥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확실히…, 좋네.”
스페라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잿빛 합금판은,
그 어떤 손상도 없이 거울 같은 단면을 유지한 채였다.
특유의 화약 자국이 합금판에 얼룩처럼 묻어 있었지만, 이것은 해당 업계인들 사이에선 일종의 ‘품질 보증 표식’과 같은 것이었다.
“라자딜르, 이걸로 하면 딱 좋겠어. 색도 그와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저어…, 그런데 스페라님.”
“왜?”
“아시다시피 30번 합금강은 최소 단가가 금화 20만 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걸 원하는 모양으로 성형하는 데만 금화 10만 개가 들지요. 그게 갑옷이라면 20만은 더 들 겁니다.”
“그래서?”
스페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라자딜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라자딜르는 긴장을 머금은 창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뿐이다.
“우리 조합의 기술자가 다 달라붙으면 며칠이 걸릴까?”
“저희가 소유한 최고의 대장간에서 작업을 착수하면 한 달 정도가 걸릴 겁니다.”
“백색 모루 급 채권을 쓰면?”
“저…, 스페라님…,”
“응?”
스페라가 히죽 웃는다,
라자딜르는 이에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며 답한다.
“보름 안에 끊을 겁니다, 그런 괴물들이라면.”
“그래, 그걸로 하자.”
라자딜르는 결국 참았던 궁금증을 토하듯 내뱉었다.
“스페라님께서 이렇게 무모한 투자를 하는 건 처음입니다…! 그러다 낭패를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자딜르.”
“예?”
“고작 갑옷 한 벌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투자하기로 했으면 기틀까진 마련해 주는 게 예의야. 그게 내 철학이고. 그리고 그가 저 갑옷을 입고 벌어다 줄 토지가 얼마나 클지 누가 알아?”
그렇지,
라자딜르는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곁에 붙어서 시중을 들다 보면 가끔 깜빡하고 잊는 것이 하나 있다.
스페라, 그녀는 인간이면서 한 난쟁이 조합의 정상에 서 있는 자였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 갑옷 안감은 리디굴람의 칠라드에서 구해야 할까 봐. 내가 알아본 소재는 다른 데서 구할 수가 없다네.”
“스페라님…,”
“잘 다녀와, 라자딜르.”
그녀는 싱긋 웃으며 금발을 휘날리곤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난쟁이 자라딜르는.
양 갈래로 땋은 수염을 씰룩거리며,
“라자딜르 이 병신 같으니! 내가 왜 스페라님께 대들었을까!”
한창 투덜거리다가 얼른 아장아장 리디굴람으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 * *
어제 베르융과 바돈이 리케니엔으로 복귀했다.
저녁엔 그들의 여독을 풀어줄 겸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술통을 열어 저택 관리일에 봉사하는 자들까지 불러 모아 편히 마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곧 쉼 없이 벌어질 일에 대비한, 일종의 마지막 유흥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저택에 다시 꽉 찬 술통들이 들어서기 전까진,
어제와 같은 자리는 쉽사리 마련되지 못하겠지.
날이 밝자마자 나는 저택 밖으로 나와 미리 기다리고 있는 베르긴과 합류했다.
“속은 괜찮습니까, 베르긴? 베르융님이 깔때기까지 가져와서 베르긴의 입에 꽂는 걸 봤는데…,”
엄청났지 어제.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저장하는 저장고 마냥…,
베르긴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죽을 것 같습니다.”
어제의 대련 이후 나는 베르긴과 부쩍 친해졌다.
촙과 안드레처럼,
또래 친우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동질감이 좋았다.
특히 베르긴은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빼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늘 똑 부러지는 모습으로 날 대해주었다.
“어제는 자리에 나오지 않으셨지요.”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모두 영주님을 따를 겁니다.”
“말만 들어도 마음이 한시름 놓이는군요.”
“그럼, 출발할까요?”
나는 베르긴을 따라 리케니엔의 뒤쪽 산을 통해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다 돌고 오니 새벽이 옅어져 있었다.
리케니엔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찼다.
주민들은 얼마 가지지 못한 물건들로 이곳에 생긴 조합을 적극적으로 이용 하였으며,
이전까지 억압받아왔던 생활을 청산하려는 듯.
씨앗을 심을 계절을 학수고대하며 철저한 준비를 거듭했다.
추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리케니엔은 드디어 자체적으로 세를 거두며 영지로서 제 역할을 하게 되겠지.
베르긴과 헤어진 뒤 저택에 돌아왔을 땐,
그렇게 어지럽혀져 있었던 홀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홀에서 나를 기다린 듯 보이는 바돈은 내게 다가와,
“디안님, 잠시 메리안님을 뵈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손히 고개 숙여 내게 말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본디 베나즈 가문의 일원이 아니면 저택의 지하실로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는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이후로 벌어진 모든 일엔 디안님의 의지를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단이 필요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바돈.
그 말을 들은 나는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저택의 뼈대를 기둥 삼아 펼쳐진 어두운 내부.
한 줄기 햇살이 유일하게 비치는 곳엔 아름다운 석상이 우뚝 서 있다.
“메리안님, 좋은 아침입니다.”
맥레인, 잘 지냈습니까.
석상의 맞댄 손 부분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든 나는 조용히,
또 오랫동안 석상 앞에서 묵념했다.
* * *
석양이 지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펜던트는 내게 다시 돌아왔고, 그 펜던트는 다시 메리안님을 기리는 석상의 손에 걸렸다.
바돈은 난쟁이 조합에 찾아가 펜던트의 모양을 딴 특별한 반지를 제작해 가져왔고,
그렇게 저택의 관리인들을 포함, 조이와 베르융 일가까지 모두 저택의 홀에 모였다.
소문을 들은 리케니엔의 주민들은 저택 바깥에 모여 다 같이 흘러가듯 한 노래를 합창했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저택 내부에 가득 찼다.
노래의 제목은,
임하소서.
[라한의 산줄기 아래]
[태양이 스치는 모든 땅 위에]
나는 바돈에게 미리 언질 받은 대로 한쪽 어깨에 가문의 깃발을 휘감은 채 오른손으론 낡은 아밍소드를,
[다음에 뜰 달 아래 빛나는 것들 위에]
왼쪽 손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민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되노니]
이제, 바돈이 예를 갖춰 만들어진 베나즈 가문의 인장을 들고 내게 다가와.
[깃발이 세워지네]
내 왼손 새끼손가락에,
[깃발이 세워지네]
끼워 넣는다.
[깃발이 세워지네]
베나즈 가문의 깃발이 다시 세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