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6화 (126/365)

126화. 옛것

티히트라의 영주는 보라.

나는 켜켜이 쌓인 오명이란 흙더미 속에서 오랜 시간 묻혀 있던 깃발을 일으켜 세우고자 한다.

이 깃발의 주체는 베나즈다.

묻는다.

그 흙더미 위에 깃발을 세워 가장 큰 땅을 차지한 자여.

그대는 이 깃발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가.

인정한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전의 장소를 정하여 사흘 안에 내게 보내라.

-리케니엔, 디안 베나즈-

구김 없는 고급스러운 종이,

그 위로 그림처럼 유려하게 쓰여 있는 글씨.

펼쳐진 종이 윗부분엔 붉은 촛농을 이용한 봉인이 들러붙어 있다.

봉인에 찍힌 문양은 만개한 꽃을 배경 삼은 한 자루의 검.

짓누른 모양새를 보아하니 반지로 만든 인장임이 틀림없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 경고를 위시한 선전포고문은 누구나 볼 수 있게 거대한 탁상 위에 놓여 있다.

* * *

“어떻게 생각하나?”

검은 구역이라 불리는 빌비온의 서쪽 지역.

그 가운데 가장 큰 땅을 소유하고 있는 티히트라의 영주.

가본 내쉬.

그가 희끗희끗한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탁상 위에 놓인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본 바로 오른편에 앉아 있던 우락부락한 남자가 답했다.

“가당치도 않은 놈들의 호승심일 뿐입니다.”

그 남자는 블로사 가문의 가주, 이슨.

‘53년, 다소르’의 주인이자.

드센 폭우라 불리는 기사이며,

티히트라에서 가본 다음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자였다.

이런 이슨의 말에 그 반대편에 앉아 있던 거대한 사내도 고개를 슬슬 끄덕이며 동조했다.

“거기다가 베나즈라니요, 그게 언제적 이름입니까? 그런 망령된 배반자의 이름을 가지고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의 이름은 몰룬, 아모랑 가문의 가주이자.

‘68년, 다티오’의 주인이며 높바람이라 불리는 기사였다.

몰룬의 발언에 이슨은 탁상 위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제법 격한 공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슨, 베나즈에 남은 핏줄이 있었답니까? 그 차가운 폭설에 대부분이 얼어 죽은 거로 알고 있었는데?”

“쯧, 주군을 배신한 베나즈의 가주가 죽기 전에 아무나 붙잡아 급하게 씨를 뿌렸나 보지요.”

쿵짝.

이슨이 말하면 몰룬이 받고, 몰룬이 답하면 이슨이 긍정한다.

그 둘의 이야기에 탁상에 둘러앉은 자들 역시 금세 분위기에 휩쓸린 듯 격한 반응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자리는 금방 과열되어 식을 줄 모르는 상황.

가본은 이를 보다 못해 크게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했다.

짙게 깔린 침묵.

이어 가본은 깍지낀 손을 탁상 위에 올린 채 제일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폴란, 자네가 얘기해 보게.”

가본의 말에 탁상 위 시선들이 한 젊은 청년에게 집중되었다.

감색 곱슬한 단발머리에 화살촉처럼 뾰족하고 짙은 눈썹을 가진 그 사내는 주위 눈치를 살피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근 남쪽 일대에 나타난 산적을 물리치고 일대 민심을 기반 삼아 빠르게 세를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폴란이 이슨의 눈치를 쭉 살피다가,

결국엔 가본을 보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무려 베나즈입니다. 과거 글라디옴을 배출한 가문 말입니다.”

“그것도 옛말이지.”

폴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슨이 일축했다.

하지만 폴란은 오히려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맞받아칠 뿐이다.

“옛말이기에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베나즈는 아이베리아에서 배반자로 낙인찍힌 이름입니다. 그것을 다시 일으키려 한다는 건 필시 그만한 명분이 있다는 말이지요.”

“더 말해보라.”

가본의 명령이 떨어지자 폴란은 본격적으로 탁상에 둘러앉은 자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쳐가며 말했다.

“그러한 명분으로 다시 세워진 베나즈 곁에 그 가문과 과거를 함께 했던 인재들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몰룬은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폴란을 가르치듯 꾸짖었다.

“예끼,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어찌 우리보다 옛것을 더 무서워한단 말인가?”

“구심점이 없잖은가, 구심점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0이 있길 하나, 아니면 적법한 베나즈의 이름을 이은 후계가 있기를 하나? 괴멸된 에르엥의 기사단이 출신 불분명한 씨받이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의미불상의 베나즈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모순이 가득한 이야기지 않은가!”

이 뒤로 붙는 이슨의 비아냥은 덤이다.

이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가본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폴란, 그대의 이야기엔 설득력이 없구나.”

그 말에 이슨과 몰룬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그 세력이란 것도 고작 형편만 나아지게 해준다면 누구든 따르는 우매한 작자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더냐?”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삶을 보장해주는 것만큼 확고한 명분도 없습니다.

폴란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곱씹어야만 했다.

꺼내 봤자 뒤따를 것은 비아냥과 꾸짖음일 게 뻔했으니까.

애초에,

가본이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다.

동쪽, 발기지르의 휘하로 들어가 야망을 펼치고 싶어 하는 저 늙은이의 마음을 폴란은 예전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줄 명분이 눈앞에 떨어졌으니,

가본이 머릿속에 그렸던 청사진대로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그 명분이라 함은, 이 땅에 금기에 가까운 부정한 이름이 걸린 깃발을 처분하는 것.

형식상 이보다 더 명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이 일이 가본의 계획대로 흘러만 간다면 능히 빌비온의 서쪽 지방 전체를 거머쥘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래서 불안하단 말이야.

폴란은 이를 씹으며 쓰린 속을 달래야만 했다.

왜 하필 베나즈일까?

다른 무너져내린 깃발도 많거늘, 어찌 가장 참혹하게 무너져 내린 그 깃발이 일어선 것일까!

그 각오가 두렵다.

그 각오로 꿈꾸는 원대한 목표는 대체 무엇일지 떨린다.

또한, 무섭다.

꿈을 펼쳐보리라 마음먹고 투신한 이 깃발의 무지가.

이윽고 가본이 깍지낀 양손을 턱 아래까지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선포했다.

드러난 그의 앙상한 팔은 최근까지 앓고 있던 피부병으로 인해 검게 얼룩져 있어, 그 노쇠함이 분명하게 보였지만.

그럼에도 티히트라의 영주다운 매서운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내뿜고 있었다.

“들어라, 아이베리아에 한 줄기 수치를 새긴 깃발이 주제를 모르고 다시 세워지려 하는구나! 하여 나는 배반자 베나즈의 부정한 사생아에게 뼈아픈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

이슨과 몰룬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나서 가본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 덩달아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따라 무릎 꿇고서 머리를 조아렸다.

폴란 역시 마지못해 한쪽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이 티히트라를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 불안이 그저 기우일 수도 있잖아?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남들보다 지성이 우위에 있다고 한들 그걸 빌미로 오답을 정답으로 정답을 오답으로 바꿀 수는 없는 법이라 하셨다.

일이 잘 흘러간다면 티히트라에 이보다 더 좋은 성장의 발판이 있을까!

그래, 한 번쯤은.

가늠해 볼 가치가 있다.

저들의 각오와 강함이 비례하는지 말이야.

“내일 그들에게 우리의 답을 보낼 것이다.”

가본은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이슨이 탁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가차 없이 찢어냈다.

“더러운 양피지를 준비해라, 놈들에게 어울리는 포고문을 내 직접 쓰겠다.”

* * *

보라, 부정한 자여!

우리는 그쪽의 뻔뻔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베나즈를 묻은 건 오명이라는 흙이 아니라 아이베리아의 명예였을 뿐.

그것을 파헤치고 불명예를 끄집어내 휘날리려는 사생아의 작태가 기사로서 참으로 수치스럽도다.

사흘까지 갈 것도 없다.

내일, 새벽이 막 지워지는 이른 때에 폴간 평야로 와라.

네놈의 깃발을 깔게 삼아 점심을 먹을 생각이니까.

-티히트라, 이슨 블로사-

* * *

너덜너덜, 폐급에 해당하는 양피지.

그 위로 욱여넣은 듯한 투박한 글씨.

조이는 그것을 든 채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내용을 파악하곤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베르융, 블로사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그런 가문도 있었는가?”

“하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 모르는 게 당연하기도 해.”

“알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군.”

베르융의 말을 끝으로, 조이는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게 건넸다.

내일인가.

“두 분은 준비가 되셨습니까.”

양피지를 내려놓은 나는 양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 둘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한다.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르테 가문은 언제나 영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 * *

늦은 저녁,

이제 이 추위도 겨울 끝에 매달려 내일이면 떨어지겠구나.

나와 조이, 베르융은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삶은 베리와 푸석한 통밀빵.

그리고 통째로 구워낸 메추라기.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조이와 베르융이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치우기 시작한다.

나도 그릇을 한데 모아 다가온 세라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베르융이 내게 살짝 고개 숙이며 말한다.

“제 아들이 리케니엔의 사내들 가운데 30명을 추렸더군요, 죄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우리와 함께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줄만 알았는데, 베르긴이 사람 꾀는 실력이 꽤 좋군그래?”

“몰랐나 조이? 베르긴의 어렸을 적 꿈은 발언가였다네.”

의외다.

나도 베르긴이 그저 우직하고 무뚝뚝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그래, 얼마 전에 베르긴이 마을에 경비대를 들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

리케니엔을 내외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서른 명의 각오를 귀히 품어야겠어.

문득,

그 말이 떠오른다.

소박하기에 대의까지 번지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의 소박함을 머금고 가진 대의를 찬찬히 퍼트릴 것이다.

“베르융, 혹시 모르니 그들은 따로 무장시켜 리케니엔 내에 주둔시켜주십시오.”

내 말에 조이가 엄살을 피웠다.

“디안님이 우리 두 늙은이를 혹사시키려는 모양이야, 베르융.”

사실 방금 한 말은 일종의 떠보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나는 아직 과거 맥레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저 두 사람의 정확한 역량조차 모른다.

그런데 지금 내 말에 반응한 조이의 모습을 보면, 그 윤곽이 슬슬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능히 둘이서도 티히트라 전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저 충만한 자신감을 드러난 윤곽에서 엿보았으니까.

“베르긴을 리케니엔의 수비대장으로 봉하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베르융이 가슴에 손을 댄 채 고개 숙였다.

* * *

정비를 위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바돈과 세라에게로 향했다.

“저택에 남은 것이라곤 이 갬비슨 한 벌 뿐입니다.”

바돈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들고 온 갬비슨을 내 앞에 펼쳐 보였다.

그러자 검은 바탕에 흰 줄과 점이 무늬로 들어가 있는 낡은 누비 갑옷의 전체적인 모습이 내 두 눈에 들어왔다.

“맥레인님이 사냥을 나가실 때 간간이 입었던 것이기도 하지요. 관리를 잘 해보려고 했지만…, 좀먹는 습기를 물리칠 햇살 조각이 없어….”

“괜찮습니다, 세라 그리고 바돈. 베나즈 가문의 갑옷을 입을 수 있어 전 기쁩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조용히 다가와 갑옷을 입혀 주었다.

이어 세라가 손수 만든 가죽 벨트가 덧대어지고.

바돈이 자신의 것을 내 발에 맞춰 직접 제단 해온 군화까지 신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곧 베나즈 가문의 공식적인 첫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

토르킨님의 작품인 워해머 유스티아를 벨트 앞쪽에 매달고, 왼편엔 낡은 롱소드를 물리고 난 직후 곧바로 저택 밖으로 나서자.

절컥.

절컥.

부산스러운 장비들의 소리가 일제히 들리며.

자리에 모인 수십 장정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 맨 앞에 우뚝 서 있는 두 남자.

은빛의 풀 플레이트 아머로 전신을 무장한 채 붉은 깃이 달린 아멧 투구를 옆에 낀 조이와,

잿빛의 두껍게 벼려진 퀴레스로 무장한 채 푸른 깃이 달린 그레이트 헬름을 옆에 끼고 있는 베르융.

그 찬란한 둘과 눈을 마주친 나는 이제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갑시다, 폴간 평야로.”

모두를 아우르듯 담담하게 떨어진 내 말에.

베르긴이 이끄는 장정들은 리케니엔 안으로,

반대로 나와 두 기사는 말을 타고 그 밖으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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