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7화 (127/365)

127화. 옛것 (2)

세 말이 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향한다.

말들의 몸은 베나즈의 검은 깃발로 뒤덮여 있고, 그 위에 올라탄 두 기사의 갑옷은 발굽이 땅을 치댈 때마다 새벽 중에 훔친 빛으로 반짝였다.

그렇게 낡은 이정표 셋 정도를 지나치고 나서야,

우리는 폴간 평야 인근에 있는 기슭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투구를 벗어든 조이는 절그럭절그럭, 걸어가 장작을 구해오고.

베르융은 줄곧 짊어지고 있던 대검을 내려놓고 돌멩이를 집어 터를 잡는다.

“보급이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멀리서 장작을 들고 온 조이가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조이와는 반대로 베르융은 묵묵한 표정으로 내게 따듯한 물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베르융.”

“겨울이 끝나간다지만 아직 날이 찹니다, 손가락이 얼지 않게 미리 풀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작게 핀 모닥불 위에, 우리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양손을 가져다 대며 온기를 묻혔다.

“조이, 자네 갑옷은 원래 나와 같이 잿빛이 아니었나?”

“그랬지.”

“그런데 어찌 겉을 다 갈아냈는가?”

“에르엥님과의 맹세를 지키고 싶었거든, 다시 돌아와 새로운 깃발 아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하리라고 말이야.”

“그런가…, 나는 무관심했네. 새로운 깃발이 세워질지도 몰랐고, 그저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으니까.”

“갑옷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인 것이 중요한 거지.”

“그래, 결국은 베나즈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였으니.”

두 사람은 눈에 불꽃을 한가득 담은 채 옛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억센 가지로 모닥불을 괴롭히다가,

곧 둘의 말소리가 멎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하던 행동을 멈추어야만 했다.

어느새 둘의 시선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두 늙은이가 잠깐 추억에 젖어버렸습니다.”

특유의 쾌활한 조이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리는 듯한 둘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석 달 전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이제 내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이스터님을 만나 한창 진형 수업을 받고 있었던 때가 말입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그때의 기억들을 차근차근 나열하듯 설명했다.

* * *

선생께서는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 손수 보살펴 키운 개미들을 내게 소개해주셨지.

크기가 가장 작아 힘이 약한 개미는 ‘군’

군보다는 크고 강하지만 소수인 ‘별’

별보다 거대하며 일반적인 개미들 사이에서 재앙인 존재 ‘기’

진형 수업은 상기한 저 세 종의 개미를 이용한 일종의 말판놀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것은, 개미에게 최면을 유발하는 문양을 개발하고 그것을 이용해 학습시킨 토르킨님의 지혜였다.

특수하게 제작된 유리판 아래 개미를 군집시키고.

그 위에 특정 문양이 그려진 말을 놓으면 굴곡 된 문양을 읽은 개미가 학습한 행동을 취한다.

이를 이용해 상대 진영을 무너트리는 것이 바로 이 수업의 목표.

그렇게 나는 한 달 내내 토르킨님께 무참히 패하며 진형을 익히고 전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치를 대강 섭렵하였을 때쯤.

토르킨님이 키우신 저 세 종의 개미가 각자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군은 일반적인 병사와 같고, 별은 갑옷을 입은 기사이며.

기는 그러한 기사 가운데 인챈트를 거머쥔 자.

딱 보면 저 셋이 가진 힘의 상관관계가 명확해 보이지만.

바로 그 지점이 진형 수업을 관통하는 맹점이자, 함정이었다.

별과 기는 군을 이기지만,

군들이 그리는 진형을 별과 기는 이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형을 이루는 군은 별이 이끄는 군의 진형을 막을 수 없으며, 별이 이끄는 군은 기가 이끄는 별의 진형을 이길 수 없다.

진형이란 건 물리고 먹히는 그러한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인 것이다.

* * *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설명을 막 끝마치자마자 따라오는 조이의 물음에 나는 낮은 목소리로 즉답했다.

“알려주십시오, 두 사람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를.”

채 다 품지 못했지만, 모두 헤아리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 어설픈 0의 주인이 조이와 베르융을 품어야 하기에, 그래서 알아야겠습니다.

조이와 베르융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번쩍이는 눈으로 동시에 답했다.

“곧 있을 전투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제 시간이 더 지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가던 때.

드디어 기슭 너머 폴간 평야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착한 것 같군요.”

조이는 곧바로 투구를 옆에 낀 채 말에게로 다가갔다.

“저들을 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 위에 올라탄 조이가 폴간 평야 쪽으로 달려가는 동안 반대편에선 열댓 마리 정도 되는 새들이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 * *

빨리 끝내고 싶다더니 말과 행동이 다르구나, 이슨 블로사.

평야를 가로질러 완만한 언덕 위까지 말을 타고 오르니 그 너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도착한 병사들이 천막을 치고 있고, 관리병으로 보이는 자들과 시동이 주위에 퍼져 나무와 돌멩이 따위를 줍고 있다.

전투에 임하는 병사는 대략 백에서 백 오십.

세 종류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면 영주의 것을 제외하고 두 기사가 이 전장에 참여했군.

사실상 티히트라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인 것 같은데…,

저들 내부에 우리의 전력을 꿰뚫은 자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저들이 보낸 포고문의 답장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그저 굴러들어온 명분을 거창하고 화려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쇼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베나즈의 얼마 남지 않은 추종자들이 깃발을 빌려 군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어난 족족 참혹할 정도로 짓밟혀버렸지.

그렇게 그들을 짓밟아 얻은 명분으로 몇몇 깃발은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고 말이야.

그래, 아이베리아의 깃발들은 이제 학습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베리아에서 베나즈의 이름을 짓밟는 것만큼 편하게 명분을 얻는 방법도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 다시 베나즈의 깃발을 올리려 하는 자가 나타났다.

티히트라는 그 얻기 쉬운 명분에 침을 흘리고 달려든 거고.

하지만 너희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지금 베나즈의 깃발을 올리려는 자는 진정 그 이름을 이어받은 후계자이고,

그런 그를 지키기 위해 글라디옴, 맥레인 베나즈의 친우 둘이 옆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철저하게 씹어 뱉어주마.

흙 알갱이 사이로 스며들 정도로.

* * *

평야를 둘러보고 온 조이가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제법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왔더군요, 대략 백오십 정도 되는 병력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다.

조이의 말을 들은 베르융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기사는 몇이나 되나?”

“둘이다.”

“그렇다면 일이 더 수월해지겠군.”

베르융은 곧장 한쪽 팔을 가슴에 댄 채 내게 고개 숙였다.

“상대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결투.

맥레인이 해주었던 옛날이야기에서도.

또 토르킨님이 가르쳐주신 것들 가운데서도 중요하게 열거되었던 그것은,

기사로선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상대 기사와 목숨을 건 결투는 곧 전쟁의 결과가 되기도 했으며, 따라온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진 명예로운 행위이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숭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결투는 기사를 잃을 수도 있는 일종의 도박과 같은 행위.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기사에겐 실패라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묵묵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절벽에 매달린 새벽이 슬슬 힘을 잃고 있다.

폴간 평야 너머에선 정비를 마친 군세가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동시에 갑옷을 차려입은 베르융이 말을 몰아 그들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적들의 지척에서 고삐를 잡아당긴 베르융이 크게 외친다.

“나 베르융 오르테가 티히트라의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하지만 베르융의 그 말에 적 진영에선 누구도 나서려 하질 않는다.

하여 베르융은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티히트라엔 결투에 응할 명예로운 기사 한 명조차 없는 것이냐!”

그러나 재차 이어진 베르융의 외침에도,

적 진영은 그저 잠잠할 뿐이다.

* * *

미리 도열한 병사 뒤편,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이슨이 막 시동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타려는 순간.

저 너머에서 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베르융 오르테가 티히트라의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 목소리에 이슨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막 그의 뒤를 따라 시동의 도움을 받고 말에 올라탄 기사 몰룬 역시 벙벙한 표정으로 이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티히트라엔 결투에 응할 명예로운 기사 한 명조차 없는 것이냐!”

병사들 쪽에서 은근한 시선들이 이슨과 몰룬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 둘은 금세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오르테? 오르테라고 한 것 맞습니까?”

몰룬의 말에 이슨이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에르엥 기사단의 그 악명높았던 검사 오르테가 이곳에 있다고?”

몰룬이 목소리를 죽인다는 것도 깜빡하고 중얼거리자 이슨이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이제 병사들의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이들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할 것인가? 블로사 가문의 이슨이여! 그대가 보낸 답장으로 인하여 이 자리가 완성되었다!”

더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없었는지, 이슨은 고삐를 잡아 말을 몰았다.

이내 병사들 사이로 말을 끌고 나온 이슨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 말을 타고 있는 기사를 눈에 담는다.

잿빛의 퀴레스, 턱이 홀쭉한 그레이트 헬름.

그리고 안장 위 한쪽 어깨에 거대한 대검을 짊어지고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그 모습은.

틀림없이.

옛날 소문으로 들었던 그것과 똑같구나.

이슨은 병사들 앞에서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배반자의 잔당은 들어라! 우린 베나즈라는 깃발을 일으켜 세우려는 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명예가 오가는 결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 말에 잿빛의 기사 오르테가 답한다.

“지금 그 결정으로 너는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죽인 거다.”

무시무시한 경고에, 안색이 창백해진 병사들이 급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의 뜻은 잘 알았다, 이슨 블로사.”

이윽고 잿빛의 기사는 가차 없이 고삐를 돌려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 * *

베르융이 돌아왔다.

동시에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간결하게 두 기사에게 말했다.

“곧 전투가 시작되겠군요. 조이, 베르융…,”

이에 전신을 갑주로 무장한 두 기사의 투구가 내 쪽을 바라보니,

나는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 진영을 노려보며 명령할 뿐이다.

“좌우를 정돈해주십시오, 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기가 이끄는 기에게 진형이 무슨 소용이랴.

막강한 힘으로 진형 그 자체를 때려 부술 뿐이리라.

* * *

[53년, 다소르]

[무리 구름 사이에 피어난 변덕]

전투가 시작되기 무섭게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는 기사 이슨의 검에서 풀려난 인챈트의 힘.

“우군은 나를 따르라!”

이윽고 이슨이 먼저 고삐를 치달아 육십이 넘는 우군을 끌고 평야를 가로지르자,

몰룬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곤 이슨의 뒤통수에 던질 욕지거리를 간신히 씹어 삼켜야만 했다.

그가 이끄는 좌군 앞에는 잿빛의 기사 오르테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슨이 우군을 이끌고 평야를 가로지르며 이동하자, 곧 그들 앞에 방금 말에서 내린 은빛의 기사가 나타났다.

“창병들은 앞으로, 궁병대는 진형을 갖춰라!”

그의 지휘 아래 이십의 궁병대가 일거에 시위를 당겨 은빛의 기사를 겨냥하고 나서야 이슨은 의기양양하게 은빛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이 일대는 내 재해가 장악하였다, 베나즈의 잔당이여. 저들의 시위를 떠난 활은 비바람을 발판삼아 널 관통할 것이고, 떨어지는 빗방울은 유독 너만을 무겁게 만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빛 기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의 양은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슨의 말에도 은빛 기사는 조용히 세이버를 뽑아 들어 자세를 잡을 뿐이다.

그리고 이내 아멧 투구 안쪽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을 장악한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조이 크레비디, 그의 세이버로부터 푸른 일렁임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21년, 이다치오]

[세상을 적신 하늘의 눈물]

그 인챈트의 근원은 홍수.

구름에서 쏟아지는 재해의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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